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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영화 ‘조커’는 선동적이며 모방 범죄를 낳는 해로운 영화일까?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서 플렉의 삶

영화는 최소한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했던 아서 플렉의 이야기 다룬다. 아서는 코미디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정신질환과 가난으로 고립된 어려운 나날을 보낸다. 심지어 자신이 받던 사회보장제도가 복지 삭감으로 중단되어 약조차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그러나 가슴 속에 꿈 하나를 품고 있던 그에게 우리 모습이 투영되기도 한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아서

실업과 가난에 처한 청년들을 보며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취업을 포기하거나, 과도한 업무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퇴사 후 여행을 떠나는 청년들을 보며 ‘의지가 부족해서’ 도피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슷한 논리로 아서의 행동을 결국 사회에서 도태된 ‘Incel’[1]의 발악이라며 비난하는 평론가도 있다. 이에 반해 아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오히려 조커가 되기 전에 아서는 굉장히 순박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복지 삭감으로 더는 약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럼 어떻게 약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장면을 보면 그가 자신의 정신질환을 치료받기를 원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광대 분장을 하고 가게 광고를 하다가 이유 없이 폭행과 강도를 당한 아서에게 친구가 필요할 때 쓰라며 총을 건네려 할 때, ‘나는 이런 것을 소지하면 안돼’라며 거절 의사를 밝힌 데서 그의 통제력도 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서의 폭발을 부추긴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닌 이 사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웃는 질환을 가지고 있는데 영화에서 그의 웃음은 비극적이고 불편하며 전혀 웃기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때 하나의 장치로서 사용된다.

지하철에서 만취한 남성 셋이 한 여성을 희롱하는 장면을 보고 아서는 질환이 도져 또 웃음을 터트린다. 아서가 자신의 질환 때문이라며 사과하지만 그 남성들은 아서를 무시하며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

그는 저항을 못 하다가 전에 친구가 자신을 보호할 때 쓰라며 총을 건넨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총으로 그들을 저지한다. 이렇게 극중에서 첫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는 돌아와 불안감과 알 수 없는 해방감에 휩싸인다. 그는 확실히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태어난 자는 아니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 그 속의 고담 시티

고담 시티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도시다. 극 중 티비 속 뉴스 장면들이 자주 보이는데, 이 장면들은 고담 시티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가난에 사람들의 분노가 상당하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구실을 한다. 마침 아서가 죽인 그 셋은 금융 자본 웨인사에서 일하는 청년들이었다. 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열광하며 살인을 저지를 당시 조커 분장을 하고 있던 아서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 조커 분장을 하고 시위에 나서게 된다.

금융 자본가 토마스 웨인은 시장 선거에 출마해 가난한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살길이라며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라고 시위를 비난한다. 광대 살인 사건(아서가 웨인사 직원 세 명을 죽인 사건)을 지지하는 이들은 노력해서 이 자리에 오른 이들을 시기하는 것이라며 말이다.

이 사회에 대한 폭로

시위대가 부유한 청년들이 살해당한 일을 옹호한 것을 논하기 전에, 그들이 거리로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가난과 실업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 때문이었음을 봐야 한다. 극심한 불평등 속에 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분노가 누적된 결과이었다.

조커가 자신을 조롱한 유명 코미디언 메레이가 진행하는 생방송에 섭외돼 집에서 리허설을 할 때 그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 생방송에서 자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 방송에서는 계속 자신을 조롱하며 시청률을 높이려 자극적인 말은 내뱉는 머레이를 보며 그에게 총구를 겨눈다.

이 사회에 부적응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눌지 아니면 자신을 버린 사회를 표상하는 머레이에게 총을 겨눌지를 고민하던 아서는 후자를 택했다. 이런 메시지는 아마 이 사회 지배자들에게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 영화가 선동적이며 모방 범죄를 유도한다는 주장에 대해

먼저 선동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악당은 꼬리칸 사람들을 억압하는 메이슨일텐데, 그녀가 선동적이라는 비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메이슨은 지배자들의 사상을 선동했는데, 조커는 그 반대 사상을 선동하므로 ‘조커’가 위험하다고 한다면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영화는 이런 오명을 쓰기 마련이다. ‘조커’는 선동적이고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에 담겨진 인간의 소외가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한 편에서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시위의 성격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위험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지하철에서 실탄으로 시위대를 쏜 경찰을 비난하지는 않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분노하며 일으킨 시위는 폭력적이고 그것을 탄압하는 경찰들의 행동은 폭력적이지 않은 것인가?

조커의 행동이 그 시위를 촉발시킨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시위를 대중의 누적된 분노와 운동이 아니라 한 개인의 행동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완전 틀렸다.

천대받고 고립되어 있는 조커에게 동질감을 느껴 모방 범죄를 일으킬까 걱정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천대받고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건강했던 사람들도 온갖 종류의 차별, 착취, 천대를 겪으며 미쳐버리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이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현실에 대한 폭로를 담고 있는 이 영화를 해로운 영화라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계급적 관점은 부재, 그러나 좋은 폭로

이 영화는 개인의 타고난 본성에서 악함의 근원을 찾지 않는다. 주류 상업 영화가 '악당'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인물로 그려낸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2] 이 체제를 수호하고 싶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불쾌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영화가 폭력적이고 선동적이며 과장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화의 약점도 있다. 물론 상업 영화에서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이 영화는 지금의 사회를 그저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로 분열된 사회로만 그린다. 그러나 이 사회는 단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받는 계급, 즉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잘못된 계급적 관점에 기초한 영화를 그저 찬양하며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공감할 만한 현실적 폭로가 잘 담겨 있다. 영화의 내용 자체가 불온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 봐도 그렇다.

추천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은 어서 예매해서 보시고 보신 분들은 함께 토론을 나눠 봐도 좋을 것 같다.



[1] 비자발적 독신(Involuntary celibate), 줄여서 인셀(Incel). 흔히 여성차별적이며 폭력적인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백인 남성들을 뜻함.

[2] https://socialistworker.co.uk/art/49018/We+should+welcome+Joker+as+a+look+at+the+roots+of+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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