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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탈레반을 공격하려 하는가?

미국은 왜 탈레반을 공격하려 하는가?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다시 뉴스의 전면에 떠올랐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폭격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다.

 수니파(이슬람교의 정통파를 자처하는 다수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 정권은 미국에 대항하는 '성전'(지하드)을 외치고 있다.

 서방의 지배자들과 언론들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를 퍼뜨리는 데 여념이 없는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탈레반이 자신들의 '전설적인' 권력 장악 과정, 패배를 모르는 이슬람교, 폭넓은 대중 지지를 자화자찬하고 있다면, 서방의 지배자들과 언론들은 단순히 이에 대한 거울 이미지를 퍼뜨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처음부터 미국의 원수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애당초 미국은 탈레반이 집권할 수 있도록 돈과 무기를 대주었다.

 서방은 탈레반 정권의 여성 억압을 비난한다. 그러나 미국은 탈레반보다 훨씬 더 여성을 억압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적극 후원하고 있다.

 사실, 탈레반이 여성을 공공 생활에서 배제하는 것은 급진적인 이슬람교 때문이라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사원'과 촌락의 금욕주의 탓이 크다. 탈레반은 여성이 베일만 두른다면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이 그랬다가는 파문감이다.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퍼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만행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고 어린이들은 나무 줄기를 씹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고 있다. 텐트 하나에 평균 50여 명이 들어앉아 일사병을 피하려 발버둥치고 있다.

 물론 탈레반 정권도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사람들한테 고통을 안겨 줬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보고서에 따르면, 1996년에 탈레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입성할 때 그 도시는 완전히 '공포 정치'의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탈레반 정권은 여성을 공공 생활에서 배제하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도 보장하지 않으며, 음악·영화·연 날리기·체스를 즐기지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전신을 뒤덮는 부르카(인도에서 차도르를 일컫는 말) 착용을 강요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후원을 받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그런 사정은 비슷하다.

송유관

 탈레반에 대해서 알려면 1992년으로 돌아가 그들이 집권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9년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때 친소적인 나지불라 정권을 세우고 물러갔다. 그러나 대중이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을 지지할 리 없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연합 반군인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1992년에 카불을 점령하고 나지불라 정권을 타도할 수 있었다.

 그 뒤 반군들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어떤 정파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 인구의 3분의 1이 외국으로 피신했고, 3백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인접국 파키스탄 접경 지대에는 몰려들어 난민촌을 형성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탈레반이 등장했다.

 탈레반은 1994년에 파키스탄의 난민촌에서 처음 결성됐고 거기서 대원들을 모집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 난민촌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란의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을 더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세력을 육성하려는 파키스탄 지배자들을 도와 줬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돈을 들여 수백 개의 종교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세대의 율법학자들을 교육시켰다. 그들은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익숙한 하나피야(수니파 이슬람의 4대 학파 중 하나)가 아니라 극히 편협하고 금욕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1990년대 내내 파키스탄 정보국은 탈레반에게 미국의 무기를 대주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 덕분에 1994년에 1백 명이었던 탈레반은 몇 년 사이에 3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탈레반이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된 이유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지원이나 파키스탄의 후원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에 탈레반의 조직원은 대부분 너무 어려서(탈레반은 '학생'이라는 뜻이다) 1979년의 소련 침공을 알지도 못했다. 이 젊은 전사들은 평등주의적인 원칙을 신봉했다. 그들은 파키스탄 사회의 봉건적인 성격을 배격했기 때문에 여러 부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거의 2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참화와 절망 속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줄 수 있는 세력이 바로 탈레반이라고 여겼다.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완전히 파괴된 사람들은 탈레반한테서 희망을 찾았다. 금욕적이고 엄격한 탈레반이 끊임없는 논쟁과 자리다툼과 피 튀기는 전투에 골몰하는 기존 이슬람 정치인들과는 다른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수천 명의 청년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부정부패 타파와 내전 세력의 무장 해제, 이슬람법에 기초한 순수한 이슬람 정부 수립을 내걸고 지지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탈레반은 드디어 1996년 9월에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집권에 성공했으며, 북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90퍼센트를 장악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대중을 빈곤에서 구제할 수도 없었고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이슬람의 종교 규범을 사회에 강요하려는 그들의 시도, 특히 여성의 노동에 의지해야 하는 가정이 많은데도 여성의 취업을 금지하는 조치들은 대중 속에서 환멸만을 자아냈다.

 탈레반은 또한 시아파(이슬람교의 소수파) 무슬림을 이교도로 여기는 형태의 이슬람 근본주의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시아파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란과 앙숙 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탈레반을 적극 지원했다.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은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노릇을 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전해 왔고,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탈레반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옛 무자헤딘 반군들을 지원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를 빼고는 이슬람권에서도 대부분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진정한 비극은, 송유관이 지나가는 중앙 아시아 나라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동서 교통의 요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이나 인접 지역 소강국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전쟁터로 삼아 서로 계속 싸움을 벌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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