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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국가》 - 노엄 촘스키, 두레

노엄 촘스키는 가장 최근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서방의 정치가들이 매우 애용하는 용어(‘깡패 국가’)의 기원과 의미에 담긴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불량국가》는 최근의 강연과 기사 들을 묶어낸 것으로 그리 두껍지는 않다. 하지만 본문의 일부 글들은 원래 주제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다루는 범위가 광범하다. 촘스키는 전후 미국 대외 정책을 검토하면서 중남미, 인도네시아 그리고 최근의 발칸 전쟁을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덧붙여, 촘스키는 전후 국제 질서 구조(특히, 세계인권선언)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분야는 제3세계 부채와 주빌리 2000 캠페인에 관한 연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경제적 주권에 대한 최근의 논쟁을 포함하여 미국의 국내 무대도 검토하고 있다. 촘스키는 이 책의 첫 장에서 검토할 항목들을 밝히면서 깡패 국가라는 용어의 이중적 의미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첫번째는 선별된 적국에 적용되는 중상모략적 의미다. 두번째는 자신은 국제적 규범에 구속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국가들에 적용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오래된 격언에 따르면, 강대국들(특히, 세계 패권을 쥐고 있다고 하는 미국)이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촘스키는 이 책 전체에서 전후 미국의 국내외 정책에 대한 근본적 믿음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공식 문서와 연설문 들을 폭로하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 준다. 실제로 촘스키가 제시하는 어떤 인용문들은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다. 본문에는 미국의 위선에 대한 수많은 예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권과 발전의 선구자라는 선전 공세는 문서 기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세계인권선언 제25조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적절한 수준의 삶을 누릴 권리”를 소중히 간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것을 거부했다. 유엔 인권위원회 미국 대표 모리스 에이브럼은 “발전은 권리가 아니”며, 그런 것을 제안하는 것은 “위험한 선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기업은 살아 있는 인간보다 세계인권선언의 보호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로 가장한 광대극에서 주요 양당 후보에 대한 기업의 기부금은 기업의 ‘언론 자유’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됐다.

정부의 말과 행동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는 점을 안다면, 미국 지배 계급이 문자 그대로 살인과 마찬가지인 정책을 어떻게 그럭저럭 추진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75년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다니얼 패트릭 모이니한은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에 대한 유엔의 비난이 어떻게 묵살당했는지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이니한은 미국이 그 침공을 지지할 뿐 아니라 “국무부는 유엔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간에 완전히 무력하다는 점이 입증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결과, 동티모르인의 3분의 1이 학살당했다. 미국측에서는 수하르토가 그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 줬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렇듯 수치스로운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 책은 권위 있고 매력적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촘스키의 이전 저작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예전에 출판된 저작들에 수록된 개인 강연과 기사 들의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일련의 주제들과 그가 보여 주는 불굴의 태도는 촘스키의 이전 저작들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이슬람》 - 이희수 외, 청이출판사

조승희

《이슬람》의 소제목은 “이슬람 문명 올바로 이해하기”다. 이 책을 만드는 데 이슬람권 현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12명의 소장학자들이 참여했다. 한국이슬람학회 회장인 이희수 씨는 서문에서 “이슬람을 제대로 만나는데 우린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서방 지배자들이 이슬람인들은 항상 참혹하고 두려운 테러리스트이며 그들의 종교는 전근대적인 미개종교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13억이나 되는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비난과 왜곡에 맞서 이슬람을 방어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이희수 씨는 “왜곡된 이슬람을 객관적이고 현지 문화 입장에서 바로 잡아보자”는 것이 이 책을 발간하게 된 취지라고 말한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의 망령

《이슬람》은 서방의 지배자들과 언론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이 호전적이며 강압적인 종교 전파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한다. 꾸란에서는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적혀 있다며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한 이슬람은 그후 1백 년도 채 안 된 시기에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는 물론 남서부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했다.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에게 일정한 사회적·법적인 차등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보다 비무슬림들에게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부과하는 인두세였다.

그런데 이 공납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수탈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적어도 제1차세계대전까지 중동의 이슬람 사회는 소수 민족에 대한 지위 인정과 다원주의적인 공존에 익숙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2천여 년간 아랍인과 유대인이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함께 공존해 온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무슬림들은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는가

이 책은 아랍인들이 미국에 분개하는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다고 제대로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이스라엘은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옥한 땅(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 80퍼센트, 아랍인 공장의 40퍼센트)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사는 주변국을 걸핏하면 침공해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미국은 계속 벌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지원했다.

“오늘날 중동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는 시나이 반도, 지중해 쪽의 가자지구, 요르단과의 경계인 요단 강 서안, 시리아의 베카 계곡이나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즉각 철수를 위한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그 결의안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상황이 이런데도 미국이나 서방 세계는 이스라엘은 5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지 않아도 아무 제재를 하지 않으면서, 아랍 민족의 조그만 실수에 대해서는 폭격, 무역봉쇄, 경제제재 등의 조치를 취한다. 그러니 아랍 쪽에서 미국이나 서방 측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과 여성

언론은 이슬람 여성은 서방과 달리 남성으로부터 온갖 억압과 속박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론은,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 아랍 세계 여성의 지위는 단지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산채로 매장하거나 죽이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랍·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이슬람에서 행해지는 여성 억압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것이 일부다처제와 베일이다. 이 책은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군대의 초기 전투에서 많은 남성들이 사망하게 되자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과 아이들이 많아져 이들을 구제하는 방도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일부다처제가 아내들의 공동거주·공정부양·공평상속 등을 전제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일정한 조건 ― 경제적 부양 능력 ― 하에서만 허용되고 또 가능한 혼인 제도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까지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이슬람 국가들에서조차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베일에 관해 말해보자. 이 책은 “역사적으로 히잡 착용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 왔다.”고 옳게 지적한다. 애초에 베일은 비잔틴 제국에서 유행하던 것인데 이를 이슬람이 받아들였다. 실제로 꾸란은 ‘유혹하는 것’,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히잡은 여성에게 순결성을 강요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가려야 할 신체 부위에 대해서는 가슴 외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히잡 착용은 다른 서방 세계의 여성들이 이러저러하게 차별당하고 억압받는 것처럼 여성 억압의 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이슬람》이 “히잡은 여성을 속박하는 개념이 아닌 여성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서방 지배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여성을 억압하는 이슬람 지배자들이나 또 이를 정당화하는 이슬람 페미니즘에 타협한 것은 아쉽다.

그 외에도 이 책은 중동 국가들의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너무 우호적이며(예컨대 무바라크를 중동 평화의 중재자라고 본다), 중동 내의 빈부 격차에 대해서는 보지 않는 약점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너무나 생소한 이슬람과 그 문화를 독자들이 알기 쉽게 생생한 사례들을 전해주고 있어 대중서로 손색이 없다. 이슬람에 관한 간단한 소개부터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실체, 이슬람권의 일부다처제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쿠르드족의 비애·코소보·보스니아 사태·체첸 반군 문제·카슈미르 분쟁·아프가니스탄 등 참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내용들이 실려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이슬람 세계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이 책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더욱 깊은 탐구를 자극하는 훌륭한 입문서이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투쟁》 - 막심 로뎅송, 두레

정병호

중동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충돌하고 있는지, 테러는 왜 일어나는지, 아랍인들은 왜 미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 모든 의문들이 한꺼번에 제기되고 있다.

독자들이 이러한 의문들 중 핵심적인 몇 가지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막심 로댕송의 저작 《아랍과 이스라엘의 투쟁》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시온주의

로댕송에 따르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기원은 “[아랍]국가 영토의 일부를 외국인들[유대인]이 점령”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유대인들이 억압받던 민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1879년 개인적으로는 유대인에 대해 어떤 편견도 갖지 않았던 비스마르크가 반유대주의 운동을 펼친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희생양이 되었다. 반동 세력은 ‘자유주의’, ‘산업주의’, ‘정교분리주의’ 등 당시 점증하던 부르주아 질서를 적으로 삼고 이러한 것들이 유대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유대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런 억압은 나찌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러시아 제정에 의한 박해(Pogrom)에 와서는 극심한 물리적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유대사회주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박해에서 해방되려면 “하나의 고국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시온주의(Zionism)가 등장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힘을 쏟기로 했다.

애초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자연스레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곤 했다. 그런데 이 움직임이 시온주의의 외피를 쓰게 되자 아랍인들은 이를 “점령”으로 받아들였다. 아랍인들은 당시 막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로댕송은 유대인이 아무리 박해받던 민족이라 하더라도, 점령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점령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917년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조국을 수립해 주기로 약속하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아랍인들은 “파업, 가두시위, 그리고 수많은 폭동”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저항은 혼란된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것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받아들여지는 한편, 아랍 동부 지역에서는 파시즘도 상당한 기세로 파급되었다. 독일 나찌즘이, 영국·프랑스와 대립하고 있다는 점과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상이라는 인상 때문이었다. 또 한편 서방 제국주의에 의한 국경 분할이 아랍 각국의 상이한 이해 관계를 형성시킨 탓에 아랍은 분열되었다.

결국 저항은 효과적이지 못했고, 1947년 미국과 소련의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한다는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때부터 아랍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 간의 분열 때문에 번번이 패배했다. 결국 이스라엘 국가 성립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점령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끔 B급 국민으로 차별대우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이 지정한 영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고수했다.

아랍 사회주의

아랍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그들의 불만은 사회주의의 외피를 쓰기도 했다. 군벌 출신인 이집트의 낫세르는 수에즈 운하와 대형 은행, 기간 산업 등을 국유화했다. 이에 놀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수에즈 원정이라는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 군사 행동은 오히려 낫세르가 ‘반제국주의 투사’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그러나 로댕송에 따르면 낫세르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낫세르는 ‘노동자, 농민을 위한 혁명’은 인정해도 ‘노동자, 농민에 의한 혁명’은 아주 질색했다. “계급투쟁은 그가 싫어하는 말”로서, “분열과 증오 그리고 이기주의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에게는 계급해방이 “민족해방이라는 제1의 목표에 종속”돼 있다. 실제로 낫세르는 “대지주, 대부호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 지배력을 약화시키려”고 할 뿐이었다.

이는 시리아의 바트당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들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 민족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들은 사회 혁명보다는 민족적 단결을 우선했다. 그러나 아랍 민족이 항상 단결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해서 창건됐던 통일아랍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반이스라엘에는 단결했지만 단결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종종 다퉜다.

패배

로댕송은 이러한 분열이 결국 1967년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이스라엘 내의 강경파 득세도 원인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낫세르나 바트당이 반제국주의적 언사를 즐겨 쓸 정도로 당시 아랍인들에게는 반이스라엘 감정이 격화되고 있었고, 반대로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의 반이스라엘 정서가 높아지는 게 두려웠다. 그 결과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됐다.

1967년 전쟁이 시작된 지 엿새 만에 아랍은 패배했다. 로댕송의 지적처럼 아랍이 분열돼 있었던 것은 패배의 한 요인이다. 낫세르나 바트당 모두 자신들이 말했던 반제국주의적 언사에 걸맞게 대중을 조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난 대중이 언젠가는 자신을 타도할까 봐 두려워했다. 전쟁의 결과 자신의 권력이 붕괴될까 봐 조바심을 느꼈던 아랍의 지배계급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분오열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이것은 아랍이 이스라엘 식민주의에 패배한 원인이다. 로댕송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기원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제시했지만 대안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접근했다.

아랍 민족의 진정한 단결은 민족주의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제국주의 투쟁과 사회 변혁을 결합시킬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 행동에 의해 가능하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공습으로 중동 지역은 격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정권의 친미적 태도에 분개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대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노동자들의 투쟁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사회 변혁의 연관성을 일관되게 제시할 정치와 결합한다면, 중동에서 이스라엘 식민주의를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레닌》 - 로버트 서비스, 시학사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좌파 역사가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게다가 보수적 역사가들이 레닌의 혁명 정부와 스탈린주의 정권 사이의 직접적인 연계를 ‘입증하는’ 저작들을 출판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옥스퍼드의 세인트 안토니 칼리지의 러시아사 교수인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다. 한때 그가 이 책에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논쟁에 사회역사가로서 기여한 게 있다면 레닌에 관한 보수주의 역사가들의 황당한 헛소리를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서비스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체계가 레닌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레닌에 의해 창조된 국가는 70년 이상 손상되지 않고 생존했다. 그 건축물은 비록 최소한의 설계도를 따랐지만 이례적으로 급속하게 지어졌다. 1917∼9년 레닌의 지도하에 이미 주요한 작업들은 끝이 났다. 기반이 닦였고 기둥이 세워졌으며 지붕이 올라갔다. 정치는 독점되고 중앙집권화되었다. 억압적 기구들은 확고하게 당의 통제를 받았다. 국유화와 국가 규제가 경제를 관통했다. 종교는 조직적으로 박해받았다.”(870∼871쪽)이 글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서비스는 오래 전부터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책은 지적 일관성이 결여돼 있고, 억측·사변·대중 심리·신랄한 풍자로 가득차 있다. 서비스는 이 책에서 사악한 개인 사관까지 담고 있다. 권력욕에 눈이 먼 레닌이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을 조정해 자신의 지배욕을 채웠다는 식이다. 그는 1991년 러시아공산당의 문서보관소 개방으로 입수한 레닌에 관한 정치적·개인적 기록들 덕분에 가장 사실적인 전기를 쓸 수 있었으며, 자신의 오래된 의심이 사실로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비스의 책에는 그 자료들이 충분히 반영돼 있지 않다. 이 책의 대부분은 신변잡기적인 내용들이다. 네 명의 여인(어머니, 누이, 부인 크룹스카야, 동지이자 연인인 이네사 아르망)에게서 보살핌을 받은 레닌은 죽을 때까지 ‘응석받이’로 살았다는 것이다. 또 책의 많은 부분은 레닌의 유아기와 개인적 삶에 할애돼 있다. 서비스는 레닌이 정치적 논쟁에서 보인 행동에서 더 거슬러가 그의 사생활과 유아기뿐 아니라 심지어 가계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서비스는 레닌을 잔인한 독재자로 묘사하면서 몇 가지 독특한 주장을 펴고 있다. 1891∼1892년 볼가 지역의 기근 동안 레닌은 “소작농들에 대한 연민이 전혀 없을” 정도로 “냉혹했다.”(169쪽) 또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샤라방(대형 마차) 4대면 모두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서비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참가한 대표자들의 수가 적다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반면 레닌은 기뻐했다.”(452쪽) 레닌은 참여자 수가 적을수록 자신의 견해에 동조해 줄 사람의 비율이 커질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는 분노를 자아내는 주장도 편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1919년에 살해됐을 때 “이 사건은 국제 공산주의의 재앙이었지만 레닌은 개의치 않았다.”(684쪽)고 왜곡한다. 이것은 레닌이 독일 사민당에서 룩셈부르크를 험담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웠으며, 레닌 자신이 “그녀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10월 혁명

서비스는 레닌 사상의 발전과 사회 변화의 동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서비스는 1905년 혁명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이렇게 정리했다. “레닌의 해결책은 노동자 및 학생의 광범위한 분견대가 혁명 활동에 참여하게끔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견대는 첩자를 살해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며 은행을 털어 무장봉기에 필요한 자원을 징발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과격한 상상력은 계속되었다.”(327쪽) 서비스는 대중의 혁명적 분출과 이에 대한 레닌의 입장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또 레닌이 혁명적 자발성의 분출로부터 배운 바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가 인용하지 않은 레닌의 글 들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대중 행동이 혁명적 과정의 주된 특징으로 부각돼 있다. 서비스는 1917년 혁명이 레닌의 창조물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1917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몇 달 동안 수백만의 대중이 혁명적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볼셰비키의 조종 때문이 아니었다. 동부전선의 유혈낭자한 전쟁이 계속됐고, 식량 부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지주와 사장들의 특권은 계속 유지됐던 물질적 조건이 대중을 급진화시켰던 것이다.

임시정부에 번번히 속았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병사들 다수는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볼셰비키의 혁명적 전략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서비스는 혁명을 수행하는 세력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언급은 서비스의 책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서비스에게는 노동자 계급 권력에 대한 레닌의 강조가 개인적 권력욕을 가리는 변명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스탈린의 등장

러시아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상황을 분석하지 않으면 스탈린의 등장을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뒤 몇 년 동안 러시아는 내전에 돌입했다. 혁명 러시아를 침략했던 제국주의 열강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반혁명 세력들과도 싸워야 했다. 내전의 결과 러시아의 경제적·사회적 처지는 위기 그 자체였다. 노동자 계급은 거의 붕괴하다시피 했다. 볼셰비키는 무너진 계급의 이름으로 지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 믿기 어려운 결정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의 국유화, 곡물의 강제 징발 등은 결코 사회주의적 조처들도 아니었으며,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원칙도 아니었다. 혁명이 서유럽으로 확산된다면 볼셰비키가 이런 조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압력이 사라질 터였다.

서비스도 “빈곤, 기아, 질병이 일상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완전히 중앙집중적 명령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일혁명과 중국혁명이 패배하자 혁명의 국제적 확산은 더욱 현실에서 멀어졌고, 러시아는 고립됐다. 이런 국내외적 위기가 결합된 과정 덕분에 러시아 혁명의 핵심을 파괴했던 스탈린이 등장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핵심들을 파괴했다. 1925년말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당대회에서 통과시켜 레닌의 국제주의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또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농업 집산화와 강제 공업화가 시행됐다.

이러한 조치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료주의적 통치가 필요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인 게페우(GPU)가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고, 노동수용소가 세워졌으며, 10만 명이 숙청으로 죽었다.(주로 볼셰비키 활동가들이었다.)물론 1920년대의 국제 정세나 러시아 상황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데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익 반대파가 의미 있는 숫자의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실질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비스는 경제가 중세적 상태에 빠진 점이나 볼셰비키의 노동자 계급 기반의 붕괴보다는 레닌의 개성과 믿음의 힘이 스탈린주의를 등장하게 한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1917년에서 1980년 말까지의 소비에트는 틀림 없는 레닌의 창조물이었다. 10월 혁명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USSR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보다도 레닌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872-873쪽) 물론 볼셰비키당도 실수를 했고, 레닌도 실수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들은 독재로 나아가는 레닌의 성향이 아니라 매우 열악한 객관적 상황에서 비롯했다. 정말이지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비중이 증대하는 것과 혁명이 러시아 밖으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은 타락과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비스는 이 책의 말미에 “격하될 수 없는 레닌의 이미지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러시아인들의 마음 속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극심한 사회적 빈곤을 세계의 곳곳에서 … 레닌에 대한 기억을 간절히 염원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876쪽) 하고 염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 서비스는 이런 전망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전쟁과 경제 침체로 위기에 빠진 세계를 바꾸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1917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이 보여 준 위대한 행동과, 그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활동했던 볼셰비키 그리고 그 지도자였던 레닌에게서 배울 바가 많이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은 그런 장점들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가자, 아메리카로!》 - 리오 휴버만, 비봉

정진희

최근 미국이 자행하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을 보면, 지구를 지배하는 이 괴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진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줄 책이 때마침 재출판됐다. 미국의 탁월한 사회주의 저널리스트 리오 휴버만이 쓴 《가자, 아메리카로!》라는 책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미국이 ‘무일푼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비교적 긴 시기(17세기 초∼1929년)를 다룬다. 제2부는 ‘백만장자에서 무일푼’이 되는 대공황 이후의 미국을 다룬다. 원제(〈우리, 민중의 역사: 미국의 드라마〉)가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이 책은 몇몇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일구어 온 미국의 역사를 다룬다.

민중의 역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 미국은 거대한 이민의 물결 속에서 탄생했다.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강제로 끌려 온 노예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미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이었다.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림과 억압과 ‘압박을 피해 부와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건너와 황무지를 개척했다. 이 약속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 휴버만은 초기 개척 시대부터 1947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여기에 답한다. “오직 정상의 사람들에게만 실현되었다.” 풍요와 자유의 꿈은 모든 미국인의 꿈이었으나, 그것은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면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결코 실현되지 못한 꿈이 됐다. 휴버만은 많은 미국인들이 풍요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과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미국인들만이 부유해지는 과정을 모두 그려내고 있다. 그는 영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미국 혁명 때 꽃폈던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어떻게 짓밟혔는지 잘 묘사한다. 또, 미국 민주주의가 갖는 기만성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3권 분립은 민중이 너무 많은 힘을 갖지 않도록 제한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왔다. 독립 후 부자들은 정부를 중요한 3개 부분으로 나눠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그 중 하원만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게 했다(129∼130쪽).

이 외에도 독점금지법이 기업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도리어 주로 노조 파괴에 이용됐던 점, 스페인 내전과 일본의 중국 침략 당시 불개입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프랑코와 일본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했던 것 등은 미국이 국내외에서 보인 이중성과 위선의 예들이다. 휴버만은 특유의 재치있고 명쾌한 문장으로 수백 년에 이르는 미국 역사를 생생하게 서술해 나간다. 게다가 청소년들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쉽기 때문에, 독자들은 몇 개의 장을 제외한다면 소설처럼 단번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휴버만이 그려내는 역사 서술의 생동감은 단지 문체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역사를 단순히 사건이나 지배자들의 업적을 나열하는 것으로 보는 기성 역사관을 거부했다. 그는 사건 자체보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관심을 가졌고, 특정 사건이 벌어지게 된 사회적 힘에 주목했다. 그는 역사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계급들 간의 갈등과 투쟁이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산업 혁명, 식민지 팽창, 노조 파괴, 대공황과 전쟁이 각각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엄청난 빈부 격차와 전쟁과 침략을 달고 다니는 오늘날의 미국 자본주의가 성장해 온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