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160년 — 노예제를 끝장낸 혁명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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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160년이 지난 지금, 그 전쟁의 의미를 돌아보고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짚어본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민병대가 섬터 요새의 정부군 기지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일각에서는 남북전쟁이 주(州)의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사회를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 사이의 충돌이었다.
유혈낭자한 이 전쟁의 핵심 쟁점은 노예제였다. 전쟁은 4년 동안 지속됐고, 당시 3000만 인구 중 6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남부연합으로 알려진 남부주 지배자들은 노예제를 방어하려고 싸웠다. 북부주 지배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자유 노동’ 이데올로기를 지지했다.
북부는 결국 혁명적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북부는 노예제 폐지를 약속했고, 수많은 흑인들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행동에 나섰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도 투쟁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1775~1783년 미국 혁명 전쟁으로 미국은 영국 지배자들을 미국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이 신생 독립국은 상이한 두 가지 형태로 조직됐다.
북부에서는 새롭게 확장된 공장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소농들이 땅을 경작했다.
노예 소유주들은 남부를 지배했다. 1860년까지 노예 400만 명이 잔혹한 감시인의 눈초리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세계 시장에 수출할 면화를 매년 100만 톤씩 생산했다.
남부와 북부의 지배층 사이에는 깊은 분열이 있었다. 북부 산업 자본가들은 영국 기업들에게서 자신들의 시장과 제품을 보호해 줄 관세를 원했다.
반면 남부 노예 소유주들은 자유무역을 원했다. 관세는 영국의 면직 산업으로 면화를 수출하는 데에 큰 타격을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예제폐지 운동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남부의 이해관계가 우세했다. 여기에 일조한 민주당은 노예 소유주를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하지만 노예제에 대한 분노로 노예제폐지 운동이 부상했다. 많은 “자유 노동” 지지자들은 남부의 권력을 축소시키길 원했다.
공화당은 1850년대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현했다. 그리고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승리했다.
처음에 링컨은 남부에 유화적이었다. 링컨은 “노예제가 현존하는 주에서는 노예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남부주들은 링컨의 당선을 자신들의 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남부의 7개 주(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러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미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섬터 요새 포격 이후 링컨이 정부 권력을 회복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자,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주도 연방에서 탈퇴했다.
북부에서 주들이 민병대를 결집시키고 남성들이 새로 결성된 군대에 자원하는 등 뜨거운 분위기가 일었다.
사람들은 노예제폐지 집회에 몰려와서 해방된 노예인 프레더릭 더글러스나 19세의 퀘이커교도 활동가 안나 디킨슨 같은 연설가들의 연설을 들었다.
더글러스는 이렇게 썼다. “미국 사람들과 워싱턴 중앙 정부는 한동안 외면할지도 모르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사태의 논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노예제에 맞선 전쟁이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 링컨은 “온건한” 입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링컨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북부의 민주당과 연방에 남아 있는 노예주들과 타협했다.
링컨은 남부의 노예제를 지지하는 조지 B 맥클레런에게 군을 지휘하게 했다. 1861년 8월 한 장군이 남부군에 맞선 군사적 조처로서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자 링컨은 이 조처를 뒤집었다. 심지어 링컨은 군부대에서 일하다 온 것이 아니라면 도망쳐 온 노예들은 남부연합의 노예 소유주들에게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온건한 방법들은 실패했다. 그리고 전쟁은 발발한 지 18개월이 지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노예제폐지론자들은 더 급진적인 조처를 요구했다. 이들은 링컨에게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흑인 병사들을 북부군에 입대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었다. 갈수록 더 많은 탈주 노예들이 연방군에 자진해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링컨은 처음에 망설였지만 승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확신이 서자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링컨은 1862년 맥클레런을 해임하고, 1863년 1월 1일 남부연합에 가담한 주들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다.
이제 연방군은 흑인의 입대를 받았으며, 수많은 흑인들이 입대했다.
변화
전쟁이 끝날 무렵 북부군 병력 250만 명 중 1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군대 내 흑인의 존재는 그들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미시간주의 한 부사관은 이렇게 썼다. “저주받은 노예제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것을 최종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을 더 기꺼이 인내하게 된다.
“노예제폐지는 노동을 존엄하게 만들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혁명적으로 뒤바뀔 것이다.”
변화한 북부군은 노예 소유주의 권력을 파괴할 총력전을 펼쳤다.
남부 흑인들은 남부 지배층에게 더 큰 걱정거리가 됐다. 수많은 노예들이 플랜테이션을 떠나 연합군에 가담했다. 이는 남부군의 보급 능력을 위협했다.
북부군이 노예를 해방시키고 플랜테이션을 불태우며 남쪽으로 진군하자, 노예 소유주들은 어쩔 수 없이 1865년 4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투쟁은 링컨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링컨의 행동만으로 노예가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남부에 맞선 혁명적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평범한 흑인과 백인들의 행동 덕분이었다.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세계가 거둔 가장 큰 승리는, 구세계에서는 영웅들이나 성취했을 만한 위업을 평범한 사람들이 신세계의 사회적·정치적 조직 하에서 일궈 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북부 승리의 한계
해방된 노예들은 북부의 승리를 축하했지만 평등 염원은 잔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북부가 승리하고 며칠 후 한 남부연합 요원이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했다. 링컨의 후임자인 앤드류 존슨은 노예제 폐지를 제외하고는 남부에 어떤 변화도 감행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슨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뒤이은 1868년 대선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승리했다.
그랜트는 남부에서 “재건” 정책을 관철시켰다. 남부를 점령한 북부군은 옛 남부 지배층이 주나 지방 정부를 장악하지 못하게 했다. 해방된 노예들이 투표를 했고 수많은 흑인들이 주정부와 연방의회와 상원에 선출됐다. 처음으로 가난한 흑인과 백인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가 열렸다.
옛 농장주들은 쿠 클럭스 클랜(KKK)단의 탄생을 지원했다. 이 집단은 해방된 노예와 이들을 지지하는 백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나] 북부군이 주둔하는 동안 이런 움직임은 흑인들이 쟁취한 성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소유
하지만 북부는 남부의 토지 소유권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토지는 여전히 옛 노예 소유주들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과거에 노예였던 사람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옛 노예 소유주들에게 “자유 노동”을 팔아야만 했다.
1870년대 중반에 북부 자본가들은 남부 농장주들의 힘을 제압했다고 믿었다.
군대는 철수했고 KKK단은 더 많은 테러 행위를 마음껏 벌일 수 있었다. 이런 테러와 토지 소유주들의 경제적 힘으로 옛 지배층은 다시 지배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들은 흑인과 수많은 가난한 백인들의 투표권을 폐지했다.
이에 저항하는 기층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남부의 흑인들은 1950~1960년대의 평등권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투표권을 되찾지 못했다.
산업 자본주의와 “자유 노동”이 미국을 지배하게 됐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이런 형태의 체제의 불가결한 일부였고, 흑인의 권리는 곧 짓밟혔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 행동은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