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제국주의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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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래로 벌어진 세 번의 커다란 전쟁(1991년 1~2월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1999년 봄 미국의 대 세르비아 전쟁, 2001년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냉전 해체가 일으킨 세계적 규모의 불안정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대응이었다. 1989년 동유럽과 소련 스탈린주의 정치체제의 붕괴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로 거의 반세기 동안 유지돼 왔던 냉전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냉전의 아이러니한 효과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대 진영이 공포의 균형에 근거해 전 세계를 둘로 나누고는 서로의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해 줬다. 이 점에서 냉전기는, 비록 일부 지역에서 국지전이 존재했을지라도 제국주의 열강에게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 모두 전 세계를 여러 번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핵전쟁이라는 자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편을 위협해, 상대방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을 빼앗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련은 그리스와 터키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인정해 준 반면, 미국도 소련의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 장악을 묵인해 줬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열전을 벌이기보다는 군사력 경쟁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이 군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다 보니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생산에 투입돼 이윤율을 낮출 수도 있었을 유휴 자본들이 파괴적인 무기를 생산하는 데 투입됨으로써,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잠시 상쇄해 주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장기 호황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냉전기에 형성된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독일과 일본 경제의 급성장이었다. 패전 국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군비 증강의 부담을 지지 않았던 두 국가는 시장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미국이 상당 부문 장악하고 있던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특히 세계 무역과 금융 거래가 활발해지던 1970년대부터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빨리 줄어들었다. 그래서 1980년대쯤에 세계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양극 체제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다극화된 체제가 됐다. 그런데 소련이 군비 경쟁에서 낙오하기 시작했다. 경제 규모가 미국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던 소련으로서는 군비 경쟁을 위해 미국의 두 배의 군비 부담을 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를 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제국주의간 경쟁이었다.
지역 소열강의 등장
냉전기에 일어난 또 다른 주요한 변화는 제3세계의 일부 국가들이 자본 축적의 중추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중동 지역의 이란·이라크·시리아·이집트·이스라엘, 서남아시아의 인도·파키스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남미의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이 이런 나라들에 속한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력뿐 아니라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주변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냉전기 동안에는 여전히 미·소 양대 강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신흥 지역 소열강도 두 진영 중의 하나에 속해야 보호받을 수 있었다. 또, 미국과 소련도 자신의 우산 속에 있는 지역 소열강이 자신의 이익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해 주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소열강이 제국주의 열강의 꼭두각시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계적 열강과 지역 패권 국가의 지배자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지라도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말비나스 섬(포클랜드)을 두고 벌인 군사적 충돌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지역 소열강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누리는 자율성은 매우 제한돼 있었다.
제2차 걸프 전쟁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치체제들이 붕괴하자 전직 미국 국무부 관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제 자유주의가 최후의 승자가 됐으며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냉전의 붕괴로 인해, 전에는 같은 진영에 속해 있던 강대국들이 서로 갈등하는 사례가 잦아졌다. 또, 지역 소열강도 냉전 해체 이후의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한몫 했다. 그리스 대 터키, 인도 대 파키스탄, 이란 대 이라크처럼 지역 열강끼리 벌인 충돌과, 제2차 걸프전(이라크를 상대로 한)이나 발칸 전쟁(세르비아를 상대로 한)처럼 지역 소열강 대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이 이 점을 보여 준다.
1991년 1월에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데에는 단지 중동 석유에 대한 지배력 유지라는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불안정해진 세계에서 자신만이 세계의 헌병 노릇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미국의 우방이던 국가들(노리에가 통치 말기의 파나마, 쿠웨이트 점령 사건 이후 후세인의 이라크, 1998년 이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깡패 국가’로 바뀌었고, 그 지배자들이 “히틀러만큼 사악한” 인물로 묘사됐다. 소련이 구조조정(페레스트로이카)으로 인한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은 걸프 위기를 이용해 세계의 안정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미국의 이런 의도는 특히 일본과 독일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 군대만이 이들 나라에 석유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수단이 제2차 걸프전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4백억 달러가 들어갔던 걸프전의 전비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뿐 아니라 다른 우방국들에게 분담해 내도록 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쇠퇴한 미국 경제력과 세계의 헌병이고자 하는 미국 노력 사이의 격차를 보여 준다. 다른 한편, 독일과 일본은 걸프전의 전비를 부담하면서도 영향력이 늘지 않아 걸프전이 오히려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발칸 전쟁
소련 블록이 붕괴하자 미국은 이전에 소련이 장악했던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다. 미국 주도 하에서 나토는 동진 정책을 펴면서, 이전에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국가들을 나토의 회원국으로 편입시키려 애썼다. 1999년 발칸 전쟁이 벌어졌던 바로 그 달(4월)에 나토는 폴란드· 체코·헝가리를 새 회원국으로 맞이했다. 나토 회원국이 된 헝가리의 남쪽과 그리스의 북쪽 지역에는 바로 옛 유고 연방에 속했던 국가들이 있었다. 냉전기에 “철의 장막”이 독일을 양분했지만 이제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철의 장막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옛 유고슬리비아에 속했던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의 인접국인 루마니아·불가리아는 나토의 우산 아래 들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세르비아를 포함한 옛 유고슬라비아 소속 국가들 자체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나토의 발칸 전쟁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말했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유럽을 위해 했던 역할을 유럽연합과 미국이 동남부 유럽을 위해 할 때만, 그리고 [양자가]냉전 이후에 중부 유럽을 위해 했던 역할을 [동남부 유럽에서도]할 때만 발칸 반도에서 안정이 지속될 수 있다. 우리는 경제를 재건하고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며 그 지역 국가들이 나토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나토의 발칸 전쟁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 시도와도 관계 있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나토 출범 50주년 기념식에서 친나토 동맹이 건설됐는데, 바로 그루지야·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몰도바·우즈베키스탄을 끌어들여 GUUAM(이 국가들의 첫 글자를 딴 명칭)이 설립됐다. 이 동맹의 목적은 미국이 이 회원국들과 경제적·정치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에너지 장관 빌 리처드슨은 발칸 전쟁이 벌어지기 전인 1998년 11월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나토의 확산]은 미국의 에너지 안전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이 전략적 견지에서 침략하는 것을 막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흥 독립 국가들이 서방으로 기울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 국가가 서방의 상업적·정치적 이해관계에 의존해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카스피 해에 상당한 정치적 투자를 했다. 송유관 지도와 정치가 질서정연하게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그가 말한 송유관 지도는 카스피 해의 유전에서 시작해 터키와 그리스와 여러 발칸 국가들을 통과하는 새 송유관 건설을 의미했다. 발칸 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바로 석유와 송유관의 안전이었다.
냉전 해체 이후 이 세계가 더 불안정해지고 전쟁의 위협이 더 커졌다는 사실은 나토의 행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토는 동진 정책과 함께 “방어적 전략”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나토는 자신의 목적을 재정립하고는 “관할 지역” 밖의 군사 작전도 새로운 전략적 개념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나토군이 보스니아에 주둔한 것은 이를 보여 주는 예다. 동유럽 붕괴 이후 이런 변화가 발칸 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나토의 동진 정책으로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 심지어 나토 내에서도 주도권을 두고서 미국·독일·프랑스 등이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 발칸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는 세계 바나나 무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미국과 유럽이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발칸 전쟁 때의 중국 대사관 폭격과 같은 우발적 요인들이 강대국들 사이의 열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지금 전 세계는 불안정 상태에 있다.
전쟁과 반자본주의
미국의 군사력과 그 밖의 다른 국가들의 군사력 격차도 더 큰 불안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군비 지출은 세계 1위로, 그 다음 13개 국가의 군비지출액을 전부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무역과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냉전 때보다 크게 줄었다. 미국 지배자들이 군사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펼치는 주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의 이런 정책은 세계 곳곳에서 불안정과 갈등을 낳고 있다. 발칸 전쟁 때도 미국은 러시아 경제가 취약해진 것을 이용해 러시아가 나토의 군사적 목표에 동조하게끔 압박했지만, 제한적인 성과만을 얻었을 뿐이다. 푸틴이 나토에 가입할 의사를 내비치긴 했지만, 나토가 동진 정책을 계속 추구해 러시아의 국경선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러시아도 군사력 증강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 아시아·발칸반도 등 러시아 인접 지역에서 긴장 관계가 고조될 수 있다. 그리고 중앙 아시아에 대한 맹주권을 두고 이전의 맹주인 러시아, 그리고 인도, 중국, 최근에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미국 사이의 갈등이 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조지 W 부시의 전쟁은 이전의 걸프전이나 발칸 전쟁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죽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전쟁의 경험을 돌아보면 이번 전쟁의 주된 피해자도 민간인들임이 분명하다. 50년 전에는 전쟁 사망자의 절반이 민간인들이었다. 1960년대에는 민간인 피해는 63퍼센트였고, 1980년대에는 그 수치가 74퍼센트로 증가했다. 1990년대에는 이 수치가 가장 높았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기록을 갱신할 전망이다. 제국주의를 분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학살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바로 반자본주의 운동이 제국주의가 낳은 파괴와 공포 한가운데서 등장한 한 가닥 희망이다. 가난, 실업, 환경 파괴가 자본주의 체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이번 전쟁도 이 체제와 연관시키기 시작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나 세계화 추세는 전쟁으로 치닫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IMF, 세계은행, WTO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그 국가들이 세계에서 군사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국가 간의 갈등이 여기저기서 표출되고 있다. 이 점에서 부시의 전쟁은 세계화의 군사적 표현이다.
체제의 동역학 자체를 의문시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은 전쟁으로 치닫는 이 체제의 불가피한 경향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 체제의 경제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이 서로 연결돼 있듯이, 이 체제와 맞서 싸우는 운동도 하나의 표적을 향하도록 돼야 한다. 이 점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전 운동에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이 참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