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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987년 6월 항쟁 35주년:
당시 청소년 참가자가 전하는 투쟁 참가 경험

1987년 6월 당시 저는 계성여자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계성여자고등학교는 2016년에 서울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명동성당 옆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은 구한말 개화기 때 세워졌으며, 대한민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입니다.

저는 친구들과 틈만 나만 재잘거리고 웃고 떠드는 철부지 여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측이 갑작스레 수업을 단축해 4교시를 마치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명동성당과 이어지는 학교 후문을 임시 폐쇄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당분간 정문만 이용해야 했습니다. 후문 폐쇄의 이유가 6월 항쟁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후문 폐쇄가 시작된 날, 수업 중 명동성당 방향에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외치는 듯한 웅장한 외침들이 들렸고, 이어 매캐한 가스와 연기가 닫힌 창틀을 뚫고 들어와 교실에 가득 찼습니다. 여기저기서 기침이 쏟아졌고 눈과 목이 따가웠습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어리둥절 했죠. 제가 기다리고 집중했던 수업이 역사 수업이었는데 심성보 선생님이라고 아직도 성함이 생생합니다. 선생님은 당시 시위대가 모인 이유 즉, ‘전두환 군부 독재에 항의하는 투쟁이고, 군부 독재에 항의하다 두 명의 대학생이 고문과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그에 대한 분노가 모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정부가 폭력으로 진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들려주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친구 다섯이 은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4교시 마치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학교가 임시 폐쇄한 후문 쪽 나뭇가지들로 메워진 담벼락을 용케 넘었습니다.

은밀한 탈출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호기심이었습니다. 옥죄는 규범에서 벗어나고픈 똘끼 어린 반항심 같은 정도에 더 가까웠죠.

이 날이 바로 6월 10일 (이 또한 나중에 안 것이지만)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된 날이었습니다.

학교 담벼락을 뛰어넘고 너무도 다른 세상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상이었습니다.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딸려 가는데, 약 백 걸음 정도의 명동성당 정문 앞에 다다르자 인도와 차도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한 손은 옆 사람의 어깨에 걸치고 서서 한 손으로 연신 팔뚝질을 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또 애국가 등의 노래가 이어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길 양쪽 끝 건물 앞에서는 양복 차림과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 상점의 상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박수를 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마어마한 군중을 보고 또 우렁차게 울리는 구호들을 듣고 발이 얼어 땅에 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벌린 채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뭉클해졌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35년 전에 지켜본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요? 친구가 선생님께 들킬 것 같다고 무섭다며 집에 얼른 돌아가자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그 많은 군중을 지나 돌아 돌아 전철역을 찾아갔습니다. 시위 군중 넘어 끝에 헬멧을 쓰고 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줄 맞춰 있었고,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친구들 각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뭔가 큰 것을 보고야 말았구나!’를 느꼈고, 친구들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다음 날도 우리는 담벼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갇혀 있던 곳에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우린 굳이 탈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학교가 엄혹한 입시경쟁 틈바구니라고 생각했고, 담벼락을 넘는다는 것을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얻는 것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느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마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들을 따라 롯데백화점으로 갔다가, 충무로역으로 갔다가 정신 없이 달렸습니다. 순간 두두둑 소리가 들리며 최루탄이 터지면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면서 앞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와아!”하는 탄성이 울렸습니다. 뭘까 머리를 들어 주변을 보니 명동 하늘에서 두루마리 휴지와 휴대용 휴지가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빌딩 위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창문을 열어 시위대에 휴지를 던져준 것입니다. 눈물, 콧물을 닦으라는 것이었죠.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 모습은 너무나 장관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이 하도 따가워 눈이라도 씻으려고 인근 건물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씻고 나오는데 셔터 문이 닫혀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됐습니다. 무슨 일일까 급히 3층 창문에 매달려 바깥을 내려다 봤습니다. 시위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쳤던 곳에 어느새 전경들이 달려 들어오고, 군중이 명동성당 쪽으로 밀리고 골목 골목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복 차림의 어른들도 대학생들과 섞여 골목으로 달아났습니다. 우리가 있던 건물 맞은 편 골목은 비좁아 보였습니다. 어느새 뒤따라 들어간 곤봉을 든 전경들이 시위대를 향해 마구 내리치고 발길질하고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악 소리를 마구 지르며 발을 동동거렸고,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쫓긴 시위대 속에 여학생을 온몸으로 막으며 폭력을 저지하려는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아저씨 얼굴이 피범벅이 돼버렸습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시위 군중은 명동성당 안쪽으로 밀렸습니다. 우리가 있던 건물에서 성당 안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군인들이 정문 앞에 열 맞춰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 여쭤보니 당시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라 군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성당 안쪽으로 피신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음 날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처럼 시위 장면을 지켜본 아이도 몇몇 있었는지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 점심시간에 2학년 선배들이 교실로 들어와 “여럿이 부상을 입었고, 정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 때문에 먹을 것도 부족해 굶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힘을 보태줬으면 좋겠다. 간식 빵도 괜찮으니 걷어서 보내드렸으면 한다. 자발적으로 보태자”라며 빈 라면 상자를 돌렸고, 곧 빵과 자신의 도시락, 옷가지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렇게 모인 것과 “오빠 언니들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명동성당의 시위대에 보내자 많은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간고사로 옥죄는 학교와 가족의 걱정과 잔소리... 저와 친구들은 한동안 학교 집, 학교 집을 오갔습니다. 간간이 선생님께 찾아가 시위 소식을 들었고, 우리 걱정에 전부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이 투옥당하고 정부가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해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는 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6월 말, 수업 도중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상기되신 표정으로 선생님께서 “역사가 이겼다고, 드디어 전두환이 지고, 국민이 이겼다”는 소식을 들려주셨고, 저는 만세를 외쳤습니다. 아이들도 따라 만세를 외쳤습니다. 제가 직접 시위를 동참하고 함께 뛰어다니고, 구호를 외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벅차 오르는 감동에 흘렀던 눈물은 참 뜨거웠습니다.

6월 항쟁을 지켜본 경험이 절 많이 바꿔놨습니다.

진실과 위선이 뒤바뀔 수 있고, 투쟁은 위선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 즉, 투쟁의 중요성을 알게 됐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입시경쟁’에 시달리고, 권위적인 학교 운영에 항의하는 조직체를 결성하는 데 고등학생들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고운’ 또는 ‘고등학생 운동’이라고 들어보셨거나 함께한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6월 항쟁을 계기로 학내 민주화와 교육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벌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운’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활동하다 노태우 정권에 해직된 교사들을 방어하고, 그 투쟁을 지지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전교조 교사들의 대규모 해고가 일어난 후 고등학생들이 전국에서 집단행동을 일으켰는데 전국 250여 개 학교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참가한 고등학생이 무려 47만 명이나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자치 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학교 학생회는 학교 측에서 소위 부모님이 재력가인 자녀들을 선정하는 식의 간선제로 구성했는데, 그 학생회를 학생들이 자발적인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6월 항쟁을 계기로 저는 2학년 때부터 학교 밖에서 조직된 수많은 학생 모임 중 한 곳에 가입해 대학생들과 함께 토론하고 ‘사상교육’을 받고, 지금은 명맥이 끊겼지만 11월 1일 ‘학생의 날’을 조직하는 데 열의를 갖고 동참했습니다.

전교조를 설립하기 위한 교사들도 6월 항쟁 이후 더 활발해졌다는 소식도 심성보 선생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교사 소모임을 암암리에 운영하고 계셨는데, 학교 측으로부터 적잖이 제재와 탄압을 받았고 해고되셨습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접하며 저는 사회운동에 함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진정한 주체가 교과서에서 달달 외우는 왕이나 소수 영웅이 아니라 다수 대중, 대중 운동임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대중 운동은 폭도들에 의한 무질서가 아닌, 그 안에 진정한 박애와 민주주의가 있음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6월 항쟁을 겪으며 경찰과 군대, 국가 기구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경찰이나 군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개인과 집단을 억누르는 역할을 했고, 폭력으로 무참히 억눌렀습니다. 당시 그들의 만행을 보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같은 국민이 국민에게 고문을 하고, 그들을 무참하게 죽여야만 했는가, 1980년 광주에서 왜 군대가 나서 국민을 진압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국가 기구, 경찰과 군대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질문을 던지게 됐고, 국가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어마무시해 보였던 군부독재를 물러가게 했던 6월 항쟁 이후 등장한 수많은 운동이 있었습니다. 물론 부침도 있었고, 운동들의 성과와 과제 등을 둘러싸고 많은 쟁점이 남아 있습니다. 저 개인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고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들을 함께할 수 있어 전 행운아였다고 생각합니다. 6월 항쟁을 계기로 대중 투쟁이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대중 투쟁으로 사람들의 의식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제 마음속 깊게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또 단 몇 시간 전에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투쟁을 겪으며 연대를 형성하고, 남녀 성별, 경험의 차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다는 믿음도 갖게 됐습니다.

저의 경험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싸운 분들의 경험과 결코 비할 수 없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다만 저의 작고 작은 경험이 6월 항쟁의 의미를 떠올리고 되새기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