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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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영국총파업 80주년
램지 맥도널드 노동당 정부의 개혁 실패는 보수당 정부가 등장하는 길을 열었다. 보수당 정부는 곧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1926년 메이데이에 광부들은 노동조합총평의회(TUC)에 총파업을 요구했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주저했다.
인쇄노동자들이 선제 파업에 돌입하면서 TUC의 총파업 선언을 이끌어냈다. 2백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영국의 운명은 TUC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독립적 현장조합원 운동을 이끌 위치에 있던 영국공산당은 고작 TUC 지도자들에게 급진적인 색칠만 해 주었다.
1936 프랑스 공장점거 운동 70주년
1936년 사회당의 레옹 블룸을 중심으로 한 인민(민중)전선 정부가 수립된 직후,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공장점거에 들어갔다. 6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 행동에 참가했다. 파업 물결은 경제적 요구를 뛰어넘어 직장 통제, 국유화 등 근본적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공산당은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며 자본가들과 타협하라고 종용했다. 스페인에서처럼 스탈린의 민중전선 전략은 프랑스 공산당이 배신적 타협을 하도록 만들었다.
스페인 혁명 70주년
1936년 7월 파시스트 군장성인 프랑코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민(민중)전선 정부는 프랑코에게 유화 제스처를 취했지만, 노동자들의 대응은 달랐다. 노동자들은 즉시 무장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노동자평의회가 공장을 통제하고 빈농이 토지를 점거했다. 조지 오웰은 “속물근성, 금전에 대한 집착, 상사에 대한 두려움 등 문명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 이 곳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중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의 급진화를 막았다. 주요 노동자 조직들, 특히 아나키스트인 전국노동자총연맹(CNT)은 노동자평의회가 전국 차원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정적으로서, 스탈린이 혁명을 목졸랐다. 그는 서방과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해 스페인 혁명이 부르주아 질서를 뛰어넘는 것을 막았다.
미국 GM 플린트 연좌파업(공장점거) 70주년
1933년 시작된 뉴딜 정책은 오래지 않아 공황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자 노동자들의 전투성 증대는 CIO라는 새로운 산별노조를 탄생시키는 압력이 됐다. 1936년 들어 노동자들은 연좌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직장이탈 파업에 비해 노동자들의 단결과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 줬다.
GM의 플린트 공장에서 연좌파업은 정점에 올라 2천여 명의 플린트 파업노동자들이 40여 일에 걸친 연좌파업을 진행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파괴하려는 경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동원하려 했지만 파업은 GM의 다른 공장으로 확대됐다.
결국 거대 기업 GM은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플린트 연좌파업의 승리는 1937년에만 4백77건이 일어난 다른 연좌파업을 불러일으켰고, 1937년 말까지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 무기를 사용했다. GM 플린트 파업은 경제공황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싸운다면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줬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46 조선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봉기 60주년
1946년 들어 한반도 분단은 점점 더 기정사실화돼 갔다. 1차 미소공위는 미·소 양대 제국주의가 조선의 진정한 독립에 아무런 관심도 없음을 보여 줬다. 미군정에 협조적인 노선을 취하던 조선공산당은 미국에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철도 파업을 시작으로 조선 최초의 전국적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미군정의 점령정책과 파탄난 민생에 항의하는 10월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항쟁을 이용해 미국을 소련과의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인다는 제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항쟁은 우익과 미군정의 무력탄압으로 진압됐다.
1956 헝가리 혁명 50주년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곧 심각한 모순을 자아냈다. 낡은 지배 방식은 포기해야 했지만, 스탈린 체제의 유산인 자신들의 권력 자체는 결코 훼손돼서는 안 됐다.
동유럽 지배 이데올로기의 동요는 아래로부터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폴란드에서 발생한 반란은 훨씬 더 심각한 형태로 헝가리에 확산됐다. 투쟁은 혁명으로 발전했다. 무장봉기, 대중파업과 함께 노동자평의회가 등장했다. 노동자평의회는 생산과 사회를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진정한 권력기관으로 발전했다.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의 무력진압으로 분쇄됐지만, 동·서방 두 제국주의 진영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진정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이 가능함을 보여 줬다.
1996 한국 민주노총 총력파업 10주년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켰다. 기아자동차 등 현장노동자들은 지도부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파업에 돌입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전국적으로 37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산업은 거의 마비 직전에 이르렀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파업 열기를 통제하기 위해 1월 중순부터 ‘수요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췄는데도 김영삼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업 투쟁 덕분에 결국 1997년 말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교체됐고, 민주노동당(당시 이름 국민승리21)이 탄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