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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중국의 어제와 오늘

1949년 중국혁명의 성격은?

1949년 중국혁명은 위대한 민족해방 혁명이었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1939년 당원용 ‘교과서’의 첫 문장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화민족 5천 년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1925∼27년 ‘1차’ 중국혁명의 패배 이후 도시에서 물러나면서 노동자 혁명을 포기하고 좌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신했다.
중국혁명은 심지어 ‘농민 혁명’도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이끈 홍군은 농민 출신자들이 다수였지만 그들은 더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 아니라 고도로 규율 잡힌 공산당 정규군의 일부였다. 결국 보통의 노동자와 농민은 1949년 혁명에서 수동적인 지지자로 남았다.

마오 시대 중국은 어떤 사회였는가?

마오쩌둥 시대에는 3천만 명이 굶어죽은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그리고 크고 작은 숙청운동 등 많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단지 마오의 개인적 광기 때문은 아니었다.

1950년대 초 중국에 호의적인 한 미국인은 중국 고위관료들과 대화한 후 19세기 중국이 당했던 ‘민족적 모욕’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지상 목표였다고 적었다.

“그렇다. 우리도 그것[최신 무기]을 가져야 한다. … 미사일이든, 핵폭탄이든, 수소폭탄이든 저들이 가지면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한다.”(마오쩌둥)

이를 위해 스탈린 치하 소련처럼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국내의 모든 자원을 중공업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생산력은 1930년대보다 훨씬 고도화됐기 때문에, 중국이 제국주의 국가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련보다 더 큰 희생이 필요했다.

“소련의 자본축적률은 국민소득의 2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57년 27퍼센트, 1958년 36퍼센트, 1959년 42퍼센트였다. … 30퍼센트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마오쩌둥)

따라서 공장은 노동자들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 철저하게 권위적으로 편제돼야 했고 공장장과 관료들은 다른 자본주의 나라의 기업주들처럼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또한, 농업 투자는 무시됐지만 농민들은 값싼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해야 했다. 결국 마오 시대 중국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구소련처럼 세계경제와 유리돼 있는 ‘폐쇄적 국가자본주의’였다.


1978년 ‘개방’ 정책의 진면목

1970년대에 이르렀을 때 공산당 지배자들은 기존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도 ‘세계화’ 국면의 서구 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군사적으로도 미국은커녕 그보다 한수 아래인 소련 군사력에도 맞설 수 없었다.

그러나 축적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제국주의와 타협해야 했다. 마오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제국주의와 타협은 안 된다”고 했지만, 1971년 “제국주의 괴뢰 정권의 수괴”이자 베트남인들을 학살한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환대했다.

이런 ‘데탕트’(해빙) 덕분에 공산당 지배자들은 군사비를 낮추고 세계시장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공업에 집중됐던 잉여가 풀리면서 1980년대 중반까지 특히 농촌에서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됐다.

하지만 이런 ‘개방’의 중요한 핵심은 노동자 착취를 효율화하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은 1982년 헌법에서 파업권을 조용히 삭제했고 노동자 복지를 줄이기 시작했다.

‘정치 개혁’은 진정한 민주화가 아니라 지방관료와 자본가들이 사업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미친 듯이 돈벌이에 나섰고, 과열경기가 모든 부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지배체제 이완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고무했고, 이는 텐안먼 항쟁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개방기 중국 자본주의는 대안 모델인가?

1989년 텐안먼 광장을 피로 물들이고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은 후, 덩샤오핑은 1992년부터 중국을 세계시장에 더 활짝 개방했고, 연평균 9.6퍼센트 이상의 고도 성장을 기록했다.

조슈아 라모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이 신자유주의 모델인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신할 ‘베이징 컨센서스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중국 정부가 IMF 권고를 모두 따르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 자본주의는 “평등을 추구하면서 평화롭게 성장”하는 새로운 자본축적 모델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2년 이후 호황은 주로 해외자본 유입과 세계시장 수출 덕분이었고,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후에는 국가의 엄청난 재정적자와 부동산 투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의 변동에 취약해졌고, 과열경기와 과잉생산이 경제의 안정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의 유산이 아직 일부 남아 있지만 중국 국가는 국내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이런 불안정에 대처하기 벅차다.

비록 철강·에너지 등 일부 핵심 산업에서 국영기업이 준(準)독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이 중앙 정부의 정책을 관철하는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국영 철강기업들 간 경쟁 때문에 발생한 과잉·중복 투자로 2004년에만 중국은 일본과 미국과 남한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산 철강 가격이 40퍼센트나 떨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면, 원자재 가격은 2배 이상 올랐기 때문에 커다란 이윤 압박을 받고 있다. 중국 정부의 자료를 보면 제조업 상품의 4분의 3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대부분 호황의 열매를 맛보지 못했다. 1996∼2001년 사이 도시 정규직 일자리가 약 4천1백만 개나 사라졌다.

지난 12년 동안 도시 이주노동자인 민공들의 월평균 임금은 65위안(약 10퍼센트)이 늘었지만 같은 기간 도시 생활필수품 가격은 2∼3배가 뛰었다.

농업은 1990년대 내내 침체를 겪었다. 그 결과 2004년 농촌의 평균소득은 도시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상하이와 오지 농촌인 귀조우 간의 소득차이는 10배에 달한다. 결국 2억 5천만 명이 하루 1달러를 못 벌고, 7억 명이 겨우 하루에 1∼2달러를 벌고 있다.


전망: 지배자들의 분열과 계급 투쟁

지난 25년 동안 불안정한 경제성장의 결과, 중국 지배자들은 심각하게 분열해 있고, 성장률의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깨달음이 지배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각축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이것이 후진타오 파와 장쩌민 파 사이의 권력투쟁과 연결되면서 정치 위기를 낳을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러한 지배자들 간 갈등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고무할 것이다. 이미 일부 노동자와 농민들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 갈등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투쟁은 아직까지는 산발적이고 고립돼 있다. 그러나 앞으로 세계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거나, 중국 자본주의 자체 모순으로 중국 지배자들의 위기가 심각해지면 1989년 텐안먼 항쟁처럼 공산당에 도전하는 전 국가적 투쟁이 폭발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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