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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는 달리는가

철마는 달리는가

이정원

영국 철도 사기업화(민영화)의 상징이었던 레일트랙이 설립 5년 만인 지난 10월 7일 파산해 정부 관리로 넘어갔다. 한국 정부가 모델로 삼아 온 영국의 사기업화 정책이 파탄난 것이다.

영국에서 실시된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퍼센트가 철도를 재국유화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철도 사기업화가 요금 인상과 잇따른 대형 사고만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뉴질랜드도 최근 사영 철도인 트랜즈레일을 재국유화하려 하고 있다. 사기업화 과정에서 무려 75퍼센트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트렌즈레일은 수익성이 나지 않는 노선들을 폐지했다. 사고도 빈발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정부는 11월 말에 ‘철도산업구조개혁기본법(안)’을 국회에 상정할 계획이다.

정부와 사기업화론자들은 철도에 현대적 시설을 투자하지 못한 이유를 공기업의 경직된 조직과 공무원들의 비효율성 탓으로 돌린다. 이를 내세워 철도에서만 1995년부터 지금까지 7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잘랐다. 그러나 철도 시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사람은 월 2백93시간을 일하며 산재로 죽어 가는 평범한 철도 노동자들이 아니다. 정부는 내년 철도 건설 예산을 32퍼센트나 삭감했다. 줄인 예산은 신규 철도 건설, 복선화·전철화 사업에 쓰일 돈이었다. 또, 신규 사업 중에는 열차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연구(틸팅 시스템) 용역 사업도 있다.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등에서 실용화된 ‘틸팅 시스템’이 도입되면 열차 속도가 20∼30퍼센트까지 빨라져 새마을호 최고 속도를 시속 140km에서 시속 200km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 반면, ‘역사 이래 최악의 국책 사업’이라 불리는 경부 고속 철도 사업에는 수조 원의 돈을 아끼지 않는다. 고속 철도는 1997년까지만 51차례의 설계 변경을 했고 그 때문에 추가 공사비만 4천5백억 원이 더 들어갔다. 이 돈이면 ‘틸팅 시스템’ 연구 용역 사업을 열 번은 족히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고속 철도 기종 선정을 둘러싼 초대형 비리 사건은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매일 출퇴근하는 시민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열차의 기관사와 승무원을 줄이는 것은 일사천리로 밀어붙이고 있다. 진정으로 낭비를 일삼고 비효율을 만들어 낸 자들은 바로 비리 인사들이다. 철도 노조는 사기업화 저지를 위해 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이제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때이다. 국회 일정 자체에 행동이 종속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국회 일정은 국회 바깥에서 벌어지는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철도 노조는 11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11월 28일 조합원 파업 찬반 투표를 한다. 현재 철도 노조는 사기업화 관련 입법 저지, 노동 기본권 쟁취, 해고자 복직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있다. 또, 인력 감축 중단, 하루 8시간 노동과 그에 따른 부족 인력 확보, 근로기준법 적용, 3조 2교대 근무 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들에 대한 철도 노동자들의 염원은 매우 높다. 최근 철도 노조에서 실시한 조합원 설문 조사에서 “협상이 결렬돼 노조에서 파업을 선언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는 질문에 91.9 퍼센트가 참가할 뜻을 밝혔다. 지난 11월 11일 노동자 대회 때 약 1천5백여 철도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이 규모는 작년 민영화 저지 투쟁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11월 25일 전국 집회 대열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파업은 가능하다

지금껏 철도 노동자들의 저항은 중요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맞물려 진행돼 왔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부산 기관차 공장에서 시작된 철도의 전면 파업은 역사적인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 항쟁으로 발전하는 물꼬를 텄다. 이후 미군정의 폭압으로 전평이 와해되면서 철도의 어용 노조가 시작됐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던 해에 기관사 노조가 결성돼 저항을 조직했다. 5·16 쿠데타가 기관사들의 저항을 분쇄했고 철도는 1988년 기관사 파업 때까지 숨죽여야 했다. 1987년의 거대한 투쟁 물결은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생적인 대중 파업으로 꽃피웠다. 1988년 올림픽을 50여 일 앞두고 철도 기관차 승무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경찰력 투입으로 파업은 10시간 만에 종결됐다.

1994년 6월 전기협(전국기관사노동자협의회)은 지하철 노조의 파업에 대한 경찰력 투입에 항의해 연대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이 파업은 ‘문민 정권’이라는 김영삼 정권의 가면을 벗겨 내고, 김영삼의 반노동자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지금은 싸우기에 좋은 때다. 지금은 기관사들만이 아닌 철도 노동자들 모두가 투쟁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 노동자들의 열망으로 막 건설된 민주노조가 있다. 김대중은 집권 말기 레임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집권 여당 내의 분열은 전의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실패로 끝난 영국 철도 사기업화 실험

10월 7일 영국 노동당 정부는 민간 철도시설관리회사인 레일트랙에 최종 부도를 선언하고 정부가 직접 통제하겠다고 밝혔다. 스티븐 바이어스 교통장관은 10월 15일 하원에 출석해 “지난 5년 동안 이뤄진 철로 민영화 실험은 명백히 실패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그 동안 철도 운영 업체인 레일트랙이 어려울 때마다 수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지원했으나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토로했다. 영국 정부가 영국 철도를 매각해 조성한 40억 파운드(8조 원)의 자금은 사기업화 이후 두 배로 늘어난 정부 보조금을 충당하는 데 들어갔다. 레일트랙은 1997∼1998년 회계년도에 3억 7천2백만 파운드, 이듬 해에는 4억 2천5백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이윤을 올렸다. 하지만 레일트랙은 시설 투자 요구를 무시했고 철도 요금을 인상했다.

철도 요금은 사기업화가 시작된 1995년과 1999년 두 해를 비교해 봐도 14퍼센트가 올랐다. 같은 시기 물가 인상률은 11퍼센트였다. 시장 경쟁을 통한 가격 결정이 철도 요금 인상을 막을 거라는 애초 기대는 정부가 쏟아부은 막대한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빗나갔다. 레일트랙의 인색한 투자는 지난 1999년 10월 31명이 사망한 런던 패딩턴 역 열차 충돌 사고를 낳았다. 당시 사고는 위험 신호를 그냥 지나칠 경우에 자동으로 열차를 멈추게 하는 자동열차보호장치가 설치돼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 2000년 10월 선로 균열을 방치해 생긴 해트필드 탈선 사고 이후 레일트랙은 여론의 압력에 떠밀려 전국적인 선로보수작업과 시설개선을 추진했다. 철로·차량 보수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면서 레일트랙의 경영 수지는 급속히 악화돼 올해 들어 5월까지 5억 3천4백만 파운드(약 1조 6백8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는 공적 자금 15억 파운드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레일트랙은 납세자들이 낸 공적 지원금의 조기 지급분인 1억 4천만 파운드를 주주들의 배당금 지급에 사용했다. 또, 지난 6월에 사임한 제랄드 코베트 사장은 이미 적자 상태에 들어선 회사를 떠나면서 자그마치 86만 파운드의 퇴직금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