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ㆍ낙태ㆍ대리모 의협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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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낙태·대리모 의협 지침
정진희
지난 11월 15일 의사협회가 안락사·뇌사, 낙태, 대리모 인정을 포함한 ‘윤리 지침’을 발표하면서, 또다시 생명윤리 논쟁이 일고 있다. 의사협회가 윤리지침을 발표하자 당장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주로 종교계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한결같이 보수주의자들은 ‘윤리지침’이 다루고 있는 내용의 일부가 생명을 경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으로 생명을 다루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대로라면 모든 의료 행위가 금지돼야 할 것이다. 죽고 사는 게 다 신의 뜻이라면, 왜 치료를 해야 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안락사, 낙태, 대리모 인정 등이 생명 경시 풍조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안락사를 1930년대 독일에서 나찌가 자행한 인종주의적 학살과 비교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다.
안락사는 무분별한 살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인도주의적 조치다. 뇌사는 큰 논란거리가 될 수조차 없다. 죽음의 시점을 심장 박동 정지가 아니라 뇌 기능 정지에서부터 찾는 견해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추세다.
대리모 역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리모는 인공수정을 통해 타인의 자궁에 착상시켜 출산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자궁 이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입양을 제외하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비난하는 것은 낙태다. 이미 한 해에 1백만 건이 넘는 낙태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이들은 한사코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들은 낙태가 태아를 죽이는 ‘살인’이라고 터무니없이 비난한다. 그러나, 아기를 낳고 말고는 임신한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근친상간, 강간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법 때문에, 낙태 시술이 은밀하게 이뤄져 의료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고 있다. 높은 의료비와 정보 부족 등은 특히 낙태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십대를 큰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공론화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안락사가 인정되면, 치료 가능한 질병인데도 높은 의료비 부담 때문에 환자를 죽이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안락사 인정이 치료 가능한 사람을 죽이는 데 악용될 가능성은 이윤 추구 위주의 현행 의료 제도 때문에 죽는 사람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턱없이 높은 비용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 가능한 병으로 이미 죽고 있다! 만약 가난한 사람이 안락사를 악용할까 봐 걱정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겐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정부는 의료비 인상에 혈안이 돼 있다. 올해 상반기에 국민이 낸 의료비 액수는 지난해에 비해 무려 40퍼센트나 증가했지만, 정부의 인상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복지부는 사회복지법인 산하 의료기관들이 60세 이상 환자를 무료진료하는 것을 금지시키려고까지 하고 있다.
낙태 합법화가 무분별한 낙태를 부추겨 여성의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도 마찬가지다. 낙태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낙태율은 6.5퍼센트로 유럽에서 가장 낮다. 만약 낙태로 인한 여성의 건강을 걱정한다면, 낙태 금지가 아니라 정확한 피임 정보를 중심으로 하는 성 교육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의료협회가 제시한 윤리지침이 안락사, 낙태, 대리모 등을 합법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적극적 안락사 대신 소극적 안락사 허용, 낙태나 대리모도 조건부로 인정하는 등 오히려 미흡하다. 그러나 비록 의료협회의 윤리지침은 미흡하긴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법보다 사람들의 필요를 인정하고 이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안락사, 낙태, 대리모 등의 합법화를 위한 대중적 토론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