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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장관 블링컨: “미국은 중동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의 중동 딜레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아랍·중국 비지니스 컨퍼런스’ 이런 대규모 투자 계약은 확대되는 아랍·중국 협력을 보여준다 ⓒ출처 Arab - China Business Conference

6월 초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미국 국무부 장관 앤터니 블링컨은 미국이 “중동을 떠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바이든도 작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미국 지배자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은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에 군사 안보를 지원하며 정권의 유지를 보장해 줬고, 그 대가로 걸프 지역의 막대한 석유 자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중국의 대중동 영향력 증대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듯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블링컨의 방문 직후 아랍·중국 비즈니스 컨퍼런스를 열고 중국과 13조 원 규모의 투자에 합의했다. 양국 간 경제 교류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 교역국이고 사우디아라비아산 석유의 최대 수입국이다.

중국의 영향력은 경제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 3월 중국은 적대적 경쟁 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외교 정상화 합의를 주선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 교역국이며, 이란의 (10년 연속) 최대 교역국이다.

지난 4월 〈월스트리트 저널〉은 중국이 걸프 지역의 또 다른 친미 왕정 아랍에미리트에서 군사 시설 건설을 재개했다고 보도했다. 수도 아부다비 인근 항만에 건설되는 이 시설은 2021년 바이든이 두 차례나 아랍에미리트의 지배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해 건설이 중단됐었다.

중동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 증대는 미국 힘의 상대적 약화라는 맥락에서 봐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가 결국 패배해 철군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하면서 중동에서 이전보다 힘을 빼기 시작했다.

미국이 중동의 적성국 이란과 2015년에 핵 협상을 타결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란 문제를 어느 정도 매듭짓고 중국에 집중하고자 했다.

후임 대통령 트럼프는 오바마와 이란의 핵 협정을 일방으로 파기했지만, 그도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축소하려 했다. 그리고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동맹 강화를 통해 그 공백을 메우려 했다.

또한, 지난 20년간 미국의 중동산 석유 의존도는 더욱 감소했다. 미국 내 셰일 가스 개발도 이런 변화 과정을 촉진했다.

전략적 가치

미국의 대중동 전략의 이동과 지정학적 변화는 걸프 왕정들을 비롯한 친미 아랍 국가들의 안보 불안을 야기했다. 이 국가들은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국·러시아와의 정치·군사·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동 지배자들이 오랫동안 미국에 의지했던 것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런 군사력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중동 지역 지배자들을 적극 후원하고, 반대로 미국에 개기는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억눌렀다.

1953년 당시만 해도 친미였던 이란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모사데크 총리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려 하자, CIA는 쿠데타를 사주해 정부를 전복시켰다.

미국은 때로는 직접적인 군사 개입도 했는데, 1991년과 2003년 두 차례의 이라크 침공, 시리아 내전 개입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1991년 1차 걸프 전쟁을 계기로 사우디라아비라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전략적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제2차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 지대가 지닌 전략적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막대한 전략적 힘의 원천이자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물질적 보고 중 하나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절대적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걸프 왕정들이 미국 패권의 상대적 쇠락과 중동 전략의 변화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자들이 품고 있던 의구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2019년 6월 이란이 미국의 감시용 드론을 격추하고, 9월에는 이란의 후원을 받는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회사 아람코의 시설을 공격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자들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국을 바라보게 됐다.

자본 축적

지난 20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왕정들은 나름 자본 축적의 중심을 마련했다. 이를 발판 삼아 선진 경제 국가들과 중동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 국가들은 막대한 자본과 천연자원을 무기로 힘을 키워 왔다.

걸프 왕정들은 2011년 중동·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반란의 물결을 막고자 반혁명 세력을 적극 후원하는 데 이런 경제력을 사용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지역 지배자들은 미국이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혁명에 의해 전복되는데도 개입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날까 두려움에 떨었다. 이들은 혁명의 물결이 자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2011년 3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위기에 처한 바레인 왕가를 지원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병력을 투입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2013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이집트의 장군 엘시시가 감행한 군사 쿠데타에 80억 달러를 후원했다.

또, 반혁명을 확산하고 동시에 경쟁자인 이란의 영향력을 제약하고자 시리아와 예멘의 내전에도 개입했다.

중동 국가들의 셈법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지난해 7월 직접 사우디를 방문해 세계적 에너지 위기를 완화할 석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러시아 제재 압력도 거스르며 오히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러시아와 보조를 맞췄다.

걸프 국가들이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과의 경쟁에 몰두하는 사이,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지역 강국의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물론 중동은 막대한 천연 자원의 보고이고 지정학적으로도 미국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중동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않을 것이며, 억압적인 중동 정권들에 대한 군사 지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국 지배자들은 걸프 국가들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에 초조해하고 있다. 걸프 지역 지배자들은 미국의 이런 딜레마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자들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을 구실로 자국에 핵발전소를 짓겠다며 바이든을 압박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이스라엘, 튀르키예, 이란 등 중동 지배계급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동에서 군사적 개입을 해 왔다. 이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시리아·리비아·예멘·수단 등에서 벌어진 분쟁과 내전에 개입했다. 그리고 각자의 셈법에 따라 미국·중국·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렇듯 중동에서의 미국 헤게모니의 상대적 약화와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중동에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