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시민연대의 낙천 · 낙선 운동을 다시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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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그 뒤 우리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낙천·낙선 운동을 지지하고 반노동자 후보에 대해 낙선 운동을 펴기로 결정했다”던
총선연대가 민중 운동 단체들이 아닌 시민단체들에 의해 지도됐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시민단체들의 성격이 압도적으로 중간 계급적이라는 점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다음의 지적들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치 개혁과 보수 정치권 심판에도 실패했다. 또, 소극적 운동이었지, 적극적 운동은 아니었다. 민중적 의제와 보수 정당 심판을 정확히 제기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민 운동은 친자본 보수 개혁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시민 운동 일반이 아닌, 특별히 낙천·낙선 운동이 단지 중간 계급의 운동이었는가? 2월 19일 부패 정치인 추방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대회가 잘 되기를 염원한 사람들 대다수가 중간 계급 시민들이었는가, 아니면 평범한 민중과 노동자들이었는가? 그 운동이 표방한 목표가 중간 계급 시민들만의 지지를 받았는가, 아니면 노동자 계급도 지지했던 ‘국민적’ 또는 민중적 요구였던가? 부패·반인권·반민주 정치인 청산이 ‘친자본 보수 개혁’인가? 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민중적 의제’의 일부이기도 하다.
정치와 경제의 결합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려 보자. 그 운동의 핵심 요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였다. 그것은 김영삼과 김대중도 지지해 마지않던 요구들이었다. 운동의 정치적 지도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로부터 나왔다. 비록 실제 투쟁을 기층에서 조직한 것은 학생들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운동의 최대 수혜자는 나중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김영삼·김대중 두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6월 항쟁의 저 위대한 역사적 의의가 감소되는가? 항쟁이 노태우의 6·29선언에 포함되도록 만든 양보 조처들은 한낱 두 김씨를 권좌에 앉혔을 뿐인 무가치하거나 반동적인 요구들이었는가?
물론 총선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의 규모와 전투성 모두 6월 항쟁에 견줄 바는 못 됐다. 하지만 그 때와 똑같은 사회 세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때와 똑같은 교훈이 적용돼야 했다. 즉,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을 그 운동에 연루시켜, 운동을 급진화시키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도 각성시키고 조직하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7∼9월 노동자 대중 파업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일조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시너지 효과가 작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지난 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공한 교훈이다.
반면에, 노동자주의자들은 이번 총선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비정규직 노동자 급증
대중 급진화의 특수한 형태
낙천·낙선 운동이 보수 정치권 심판을 제기하지 못하고 인물론에 머물렀고 또 소극적 운동에 머물러, 정치 개혁과 보수 정치권 심판에 실패했다는 것은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낙천 운동이 처음 벌어지기 시작했을 때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당 차원에서 반대했다. 집권당인 민주당의 태도는 전형적인 위선으로 특징지울 수 있었다. 이 위선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건 그 당 총재 김대중이 대통령으로서 선거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던지라는 총선연대측의 요구를 외면했고, 따라서 이후 검찰이 총선연대측의 활동을 심각하게 제약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낙천·낙선 운동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특정 인물들만 반대했는가? TV 토론에 나온 총선연대측 인사들이 단지 특정 개인들만 비판하던가, 아니면 기성 정당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 더 주된 양상이었던가?
누구를 반대한다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누구
하지만 낙천·낙선 운동의 유력한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운동은 민주당의 음모였는가?
전술의 유연함
민주노동당으로 올 성과를 중간에서 총선연대의 운동이 ‘386‘ 쪽으로 빗나가게 한 역효과를 냈다는 주장은 우리 자신의 얼굴에 침 뱉기다. 총선연대가 부각시킨 반
‘386’ 후보
하지만 민중 운동이 시민 운동을 견인하려면 노동자 운동이 사안에 따라 시민 운동에 대해 종파적 태도를 버리고, 시민 단체들이 이끄는 대중 운동 속에 때때로 연루되는 개입주의적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유연함 없이 그저 경직된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새 세대의 급진적 청년들을 시민 단체 지도자들의 자유주의적 개혁 노선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총선연대는 눈치 보느라고, 즉 자신들의 운동이 민주당을 이롭게 하는 편파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강하게 고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식 정치에의 이러한 종속은 중간 계급의 정치적 독립성 결여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 당과 노동자 운동이 강력해지면 시민 운동의 상당 부분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는 바지만,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정당이 강력해지려면 시민 운동에 대한 불필요한 경쟁심이나 방어적 태도를 버리고, 또 지나치리만큼 좌파적이길 그만두고, 그들의 운동이 노동자·학생 대중의 지지를 받는 한 그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한다. 구경꾼처럼 그 운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에 일체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그 동안 노동조합 쟁점에만 시야가 갇혀 있던 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부패나 환경 또는 인권 문제 등 제반 정치 문제들이 자신들의 쟁점임을 절실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는 않고 계속해서 경제적 쟁점들로써 시민 운동 또는 학생 운동과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노동계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현단계 노동자 계급 의식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애써 거스르는 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