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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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공포?
조승희
마약 복용이 늘고 있다. 1996년 6천1백89명이던 ‘마약류 사범’은 지난해 1만 3백4명으로 늘어났다. 검찰에 따르면, 실제 마약 복용자들의 규모는 그 20배인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최근 마약 복용 증가를 핑계로 마약 수사관에도 총기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과 언론이 조장하는 ‘마약 공포’는 황수정 씨의 경우에서 보듯이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마약마다 복용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각각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필로폰(히로뽕) 복용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단속한다. 검찰청 마약과가 그리는 필로폰 복용자들의 그림은 이렇다. 주사 바늘 자국이 가득한 팔뚝에 대용량 주사기가 꽂힌 채 죽어 가는 끔찍한 모습 …. 그러나 필로폰 복용에는 실제로 어떤 위험이 따를까? 영국 보건부 의사들은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암페타민[필로폰], 엑스터시, 코카인 등의 흥분제는 심리적 의존 현상을 유발할 수는 있으나 심각한 금단 현상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 암페타민 사용자들은 대부분 약물 치료 없이도 치료가 가능하다.”필로폰은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따라서 필로폰을 장기간 복용하면 약을 끊은 뒤에 심각한 우울증이 뒤따른다. 필로폰을 과다 복용했을 때는 헤로인 복용으로 나타나는 증세가 생겨날 수도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헤로인(아편 추출물)이 가장 ‘위험한 마약’이다. 헤로인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진통제이다. 아편보다 30∼40배 더 강력한 헤로인은 알려진 것처럼 즉시 중독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헤로인에 대한 의존성이 생겨나는 데는 몇 주가 걸린다. 그러나 복용자들은 대개 처음에는 그것이 헤로인일 줄 모르며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잘 모른다.
애초에 헤로인은 모르핀 중독 치료제로 개발됐다. 아편 추출물인 모르핀은 1800년대부터 진통제나 마취제로 생산됐다. 모르핀은 전투 중에 부상의 고통을 잊고 계속 싸울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지급됐다. 그래서 모르핀 중독을 흔히 ‘병사들의 병’이라고 불렀다.
1898년에 독일 제약 회사 바이엘 사는 모르핀보다 열 배나 강력하고 중독성이 심한 ‘상용 다이아세틸 모르핀’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12개국 언어로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제품명은 독일어‘영웅’에서 딴 헤로인이었다.
계급
중독성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중독성 마약이라도 제한된 양으로 복용할 경우 인체에 해롭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의사들의 헤로인 처방은 불법화돼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의사들은 헤로인 중독자들에게 메사돈을 처방하는데, 메사돈의 중독성이 너무 강해 의사들이 적정량을 가늠할 수 없어 종종 환자들을 죽게 만들기도 한다. 메사돈은 헤로인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
마약 문제에 대한 의학적인 접근은 배제한 채 처벌 중심이다 보니 헤로인 복용으로 인한 위험이 오히려 증가했다. 거리에서 유통되는 마약은 순도가 일정하지 않으며 순도가 갑자기 변할 경우에는 치명적인 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약에 대한 지배자들의 히스테리는 마약 치료 및 재활 센터에 대한 지원 중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중독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다른 모든 마약과 마찬가지로, 헤로인 또한 소비하는 계급에 따라 위험 정도가 다르다. 노동 계급 소비자들은 불순물이 포함되고 순도가 천차만별인 헤로인을 복용하는 반면, 부자들은 고품질 헤로인을 구입할 수 있으며 헤로인을 처방할 수 있는 소수 의사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것은 코카인 복용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상당수 부유한 사람들은 그다지 건강을 해치지 않고 코카인을 복용한다. 그러나 코카인과 수산화탄소 나트륨의 결합물인 싸구려 크랙 코카인이 미국의 노동계급 시장을 공략하면서 위험이 증폭되었다. 미국에서 크랙 복용자가 늘면서 1988년 한 해 동안 애틀란타·워싱턴·피닉스 등지에서는 코카인 관련 사망률이 갑절로 증가했다. 한편, 마약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실로도 이용됐다. 미국 지배자들은 흑인들의 크랙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또, 1993년에 코카인 가루를 흡입하는 자들은 평균 3개월 징역을 선고받은 반면 대부분 흑인인 크랙 흡연자들은 평균 3년을 선고받았다.
네덜란드
1967년 영국에서 64명의 유명인이 “마리화나[대마초]를 금지하는 법은 원칙적으로 비도덕적이며 실효성도 없다”는 내용의 광고를 〈더 타임스〉에 실었다. 그 뒤 35년이 흘렀건만 마리화나를 포함해 마약은 여전히 불법화돼 있다.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일단 대마초에서 시작해 갈수록 좀더 독한 마약에 빠져들게 된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그래서 대마초 합법화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한 마약을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심심풀이 삼아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꼭 독한 마약을 복용하는 쪽으로 가는 건 아니다.
1976년 네덜란드는 소위 아편법을 개정해 소량의 대마 소지를 사실상 용인했다. 법상으로는 제약 조항이 남아 있긴 해도 대마가 적어도 범죄로 취급받지 않았다. 1온스 정도의 대마잎 판매는 주차 위반 같은 경범죄로 취급된다. 법 개정 뒤 암스테르담에는 대마초를 파는 커피숍이 4백 군데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커피숍에서는 대마 연기에 둘러싸여 젊은이들이 수다를 떨고 늦은 저녁쯤 낄낄거리며 집에 돌아갔다. 술취한 십대들보다 덜 시끄럽고 덜 폭력적이었다.”이런 개방적인 정책의 결과 독한 마약 소비가 급증한 것은 아니었다. 1987년에 암스테르담 성인의 경우 1.7퍼센트만이 코카인을 복용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미국의 6퍼센트와 비교해도 낮은 수치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네덜란드의 헤로인 중독은 30퍼센트 가량 줄었다. 헤로인 중독자들은 무료로 주사기를 얻을 수 있어 에이즈에 감염된 주사기를 사용하는 비율이 미국에 비해 훨씬 낮다.
네덜란드의 통계는 흥미롭다. “담배로 1만 8천 명이 죽었고 알코올로 2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가장 치명적인 마약인 헤로인으로 64명이 죽었다.”(〈이코노미스트〉, 1990년 1월 21일치.)마약 복용을 범죄시하는 것은 음주를 금지하고 범죄시하는 것과 똑같은 위험을 가져온다. 술을 금지하고 범죄시하는 것은 마약과 마찬가지로 더 해로운 제품, 더 많은 부패, 폭력, 조직 범죄로 이어진다. 오늘날 술 생산과 공급을 범죄시하는 나라들에서 군대와 경찰은 엄청난 권한을 가진다.
우리는 마약 복용자들과 거리의 판매자들, 오로지 생계를 위해 마약을 재배하는 농민들을 범죄시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마약의 범죄화는 대체로 불법 마약을 제조하는 자본가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약 산업 내의 농민, 판매원, 복용자들을 범죄자로 만든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약 시장의 확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마약 거물들의 활동은 더욱 강력하게 통제돼야 한다.
대부분의 ‘강한’ 마약 복용은 길거리에서 싸움질하는 것 정도의 ‘쾌감’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여전히 복용자들의 삶은 따분하기만 하다. 그들의 자아도취와 쓸모 없고 의례적인 습관에 대한 집착은, 사람이 점점 멍청해진다는 것일 뿐이며 서글프고 가여운 것일 뿐이다.
분명 마약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삶의 절반이 술과 마약에 쩔은 채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필로폰이나 헤로인을 복용하면서 사회 변혁가가 될 수는 없다.
마약을 위한 전쟁
서방 강대국들은 모두 마약을 위한 전쟁을 벌인 추악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은 130년 동안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의 아편 시장을 개척했다.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 수입을 강요하기 위해 두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1860년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중국의 중독자는 자그마치 1천5백만 명에 이르렀다!동남아시아의 식민 당국들이 사실상 아편 공급과 아편굴 허가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다. 인도의 영국 통치자들은 총수입의 6분의 1을 아편 공급으로 충당했다. 아편은 대영 제국의 초석이었던 것이다. 1949년 중국 인민 해방군이 승리하자 세계에서 가장 큰 양귀비 농장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편 생산은 줄지 않았다. 프랑스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프랑스 비밀 정보 기관의 후원을 받아 아편 생산은 동남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됐다. 프랑스 비밀 정보 기관은 베트남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1951년에 인도 차이나의 아편 무역 - 황금 삼각 지대에서 생산된 - 을 실질적으로 통제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패배한 뒤에는 미국이 이 지역의 아편 생산을 장악했다. CIA가 소유한 항공사가 양귀비 농장에서 나온 아편을 정제소까지 실어 날랐다. 베트남에 있었던 한 CIA 요원은 나중에 자신이 “그 지역 아편 농작물을 모조리 사들이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CIA는 라오스에서 좌익 게릴라 파텟 라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메오 언덕의 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CIA는 그들에게 모든 농경지를 아편 농장으로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 대가로 충분한 식량과 공산품 공급을 약속했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CIA는 파키스탄 군대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무자헤딘은 아편 무역으로 전쟁 비용을 마련했고 그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군 장성들은 부자가 됐다.
미국 CIA가 남미에서 벌인 반공 전투는 코카인 시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요 코카인 생산 지역은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페루와 볼리비아다. 코카인 가공은 콜롬비아에서 이뤄진다.
CIA는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면서 코카인 거래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콘트라 반군의 코카인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용인했다. 마약 거래에 이용된 자금 세탁 회사와 항공사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위선이게도 ‘마약 공포’를 조장하는 서방 지배자들이 바로 마약 생산으로 막대한 수익을 챙긴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