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스포츠,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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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스포츠, 자본주의
이수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또 그 때문에 스포츠는 거대한 사업이 됐다. 1995년에 미국의 스포츠 관련 산업의 규모는 연간 1천5백20억 달러였다.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
제국주의
고대 중국과 일본, 그리스, 로마에도 축구와 비슷한 공놀이가 있었다. 각각 츄슈, 케마리, 하르파스톤, 하르파스툼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축구와는 달랐다. 그런 운동들은 전혀 경쟁적이지 않았고, 스포츠의 어원인 ‘유희’에 가까웠다.
독재 정권 치하의 스포츠는 그 사회적 역할이나 민족주의와의 연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TV로 중계된 최초의 올림픽인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서 나찌의 대규모 선전 공세는 절정에 달했다.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이 서둘러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포츠 게임이 인류의 평화와 우애 증진에 기여하는 비정치적인 행사라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에 영국은 국제축구연맹
1968년에 멕시코 정부는 올림픽이 돈 낭비라고 생각하는 젊은이 수백 명을 학살한 뒤에야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다. 1980년에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면서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코트했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그 반대로 소련이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항의해 보이코트했다. 1996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은 뇌물 상납 스캔들로 얼룩진 대회였다.
소외
오늘날 수백만 명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과정과 소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력이 사고 팔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공장·광산·사무실·병원, 어디서든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에는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거나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이 끝난 뒤, 오직 “자유 시간”에만 노동자들은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또 느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압도 다수 사람들은 지루한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바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경기장에서, 또는 TV를 통해 게임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본다.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9회 말 2사 후 만루 홈런의 짜릿한 묘미를 스포츠에서는 맛볼 수 있다. 공장·광산·사무실·병원에서는 좀처럼 뒤집히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에서는 몇 번씩 무너지곤 한다. 사람들은 또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나 팀, 국가와의 일체감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박찬호에 관한 것이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외우고 다니면서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야구 팀이나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승패에 일희일비하면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라. 하지만 스포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데 불러모음으로써 저항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리비아 경찰은 축구 경기장에 모인 군중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자 그들에게 발포했다. 프랑코 치하 스페인에서는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 야유를 보내고 바르셀로나 팀을 응원하는 것이 정부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운동 선수들의 정치적 저항도 있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경기
그러나 이것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축구 경기장에 모인 관중의 분노는 상대팀 선수나 응원단을 겨냥하기 십상이고, 욕설에 이어 폭력 사태로 비화하는 경우도 많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합리성”은 우리의 노동뿐 아니라 여가도 지배하고 계획함으로써, 우리의 개성을 보잘것없게 만든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처럼,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락은 노동의 확장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여가 생활은 스포츠·레저 산업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결국 현대의 스포츠는 국가간 경쟁, 자본주의적 생산, 계급 관계라는 틀 속에 완전히 통합돼 있다. 언론 매체는 스포츠를 이용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