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의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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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논쟁
정병호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개혁파’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선량하고 양심적인 보통 시민들”은 수구 보수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개혁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의 이런 주장은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씨는 《이론과 실천》 8월 호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경계하라”에서 “비판적 지지론”이 “노동자 계급에게 자신의 노예 상태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무기력한 환각제” 같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판적 지지론”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쟁은 줄곧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논쟁이 핵심을 비켜가는 이유는 강준만 교수의 “극우 헤게모니 타파 우선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나라는 아직 극우 헤게모니가 강력하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강정구 교수가 빨갱이로 몰려 구속됐다. 심지어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의 보잘것없는 개혁조차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우익들의 권위주의 통치와 연결돼 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물적·인적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치와 경제는 긴밀히 융합됐다. 군사 정권들은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노동을 강요했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한나라당은 민주화를 염원했던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여 학살, 고문, 투옥했던 군사 독재 정권의 후신이다. 대자본가들의 재정 후원을 받는 이 당은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과 초보적 개혁조차 “사회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며 전형적인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한다.
반한나라당 공동 노선
이러한 수구세력의 추악한 본질 때문에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개혁 세력이 연대하여 수구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생각한다. 강준만 교수는 극우 헤게모니를 타파하기 위해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연대하여 “반(反)한나라당 공동 노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당과 연합하는 “반(反)한나라당 공동 노선”으로는 수구세력을 제압할 수가 없다.
수많은 패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1930년대 스페인 공산당과 사회당은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즘에 맞서 계급적 기반이 다른 공화파와 민중전선을 건설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앙이었다. 겉으로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듯이 보이던 공화파는 결정적인 순간에 파시즘과 한 편이 돼 노동자 계급을 공격했다. 함께 민중전선 정부를 구성하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독립적인 행동이 제약되면서 반동적 공격에 동조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도 파시스트 조직들의 폭동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과 선거 동맹을 맺어 민중전선 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 갑자기 불어닥친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공격해야만 했다. 부르주아 정당에 예속된 민중전선 정부는 공격의 도구가 됐다. 최후에는 민중전선 정부 자신의 손으로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극우파 정권을 세웠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염두에 둔다면, 한나라당을 공격하기 위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연대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둘 중 하나가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민주당은 말로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는 이상 항상 기업주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던 김대중은 부패에 연루된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거짓 눈물만 닦아 주고, 생존권 보장을 피눈물로 호소하던 노동자들은 경찰력으로 짓밟았다. 강준만 교수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정당의 계급적 기반 문제다. 강 교수에 대한 박용진 씨의 비판도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비판적 지지’ 쪽으로 기운 사람들의 [개혁을 바라는] 심리”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주대환 씨는 이회창과 김대중이 모두 “[신]자유주의자”이므로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은 마치 계급 분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강준만 교수의 글이 반파시즘 투쟁에 있어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연대를 제안하는 매우 신중한 글”이라고 추켜세웠다( 《이론과 실천》 11월 호, “‘비판적 지지’는 없다”). 물론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파시스트들과 결별하고 지역 정당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 정책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연대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구상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정당의 계급적 기반을 무시한 채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단순히 “자유주의자” 그룹 정도로 여기다 보니, 두 당이 계급적 기반을 초월해서 행동할 수도 있다는 순진한 가정을 했던 것이다.
반이회창인가 반김대중인가
그렇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와는 다른 독립적 대안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반이회창 정서와 반김대중 정서 중에서 어떤 정서를 활용해야 할까? 물론 일반적인 차원의 답을 대라면, 강준만 교수 말대로 “두 가지 정서를 다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전술적 차원에서는 지난 수년 간 대중이 몸으로 경험했던 현실에 바탕해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다.
지난 4년 간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백만의 노동자가 정리해고, 임금삭감, 공공요금 인상 등에 시달렸다.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은 이미 1천만 명을 넘어섰다.
반면, 기업주와 정치인들은 서로 끈끈하게 유착돼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김대중 정부는 김우중이 분식회계로 23조 원을 빼돌린 것을 눈감아 주고 있다. 옷로비부터 몸로비,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 등에는 박지원, 김홍일, 김태정, 권노갑 등 정권의 핵심 인사들에서 국정원, 검찰 등 핵심 권력 기관까지 약방의 감초마냥 빠지지 않고 연루돼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 부패방지법 제정, 정기간행물 등록법 개정, 사립학교법 개정 등과 같은 민주 개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 자체가 의지가 없거나, 한나라당의 반동적 선동에 언제나 타협하기 일쑤였다.
바로 이 때문에 올해 초부터 김대중 정권의 지지도가 급락했고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정권 퇴진” 구호가 부상했다.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정치는 일차적으로 “반사 정치”, “반감 정치”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망가뜨려 쉴 틈 없이 생존 문제로 고뇌하게 만들고 민주 개혁을 헌신짝 취급하는 김대중을 증오한다. 강 교수의 생각과는 달리 이것은 “지역감정”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만약 지역감정 문제라면, 작년 4·13 총선에서 울산 지역에서 출마한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전라도 광주에서 김대중 캐릭터 사업이 문닫거나, 1997년 대선 때 김대중을 지지했던 광주지역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지금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반(反)김대중 정서는 바로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불철저한 민주 개혁에 반대하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 물론 강준만 교수가 주장하듯이, “‘극우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김대중과 신자유주의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게다가 문제는 지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장본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김대중 자신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탄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폐기하고 진정한 민주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반(反)김대중 정서를 실질적인 김대중 퇴진 투쟁으로 조직해야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기성 정당 바깥에 강력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반김대중 정서가 한나라당 지지로 옮아갈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김대중 퇴진 투쟁이 성공적으로 조직돼 김대중이 휘청거린다면, 그 결과 차기 대선에서 이회창이 당선된다 하더라도 그는 집권 내내 김대중 꼴이 되는 것이 두려워 좌충우돌할 것이다. 만약 이회창이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반하는 정책을 고수한다면, 그는 바로 직전까지 김대중을 괴롭혔던 사람들의 퇴진 압력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을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 세력이 주도하고 일관되게 대안을 제시한다면, 이 투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2002년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해야 할까?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회창이 대세인 지금 상황에 불안해하고 있는 듯하다. 수구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이회창이 당선되면, 김대중 정권에서 시도됐던 개혁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는 개혁일랑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다. 그래서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하려면, 민주노동당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노무현이나 김근태 등의 민주당 내 개혁파를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민주당 내 개혁파가 당선되더라도 진정으로 개혁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민주당의 김대중은 집권 3년 5개월 만에 전임자 김영삼이 집권 5년 동안 구속한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구속했다. 김대중 정부의 부정부패는 김영삼 때보다 더 자주, 더 크게 터졌다. 미국의 경험을 살펴보자. 우리 나라의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출신 클린턴은 공화당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수십 년 간 공화당·민주당 양당 정치체제가 굳어진 미국에서 지난 대선 때 녹색당의 랠프 네이더가 부상했다. 네이더를 지지한 영화배우 팀 로빈스는 〈네이션〉에서 지지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수잔[수잔 서랜던: 부인이자 동료 배우]과 함께 IMF-세계은행 반대 시위차 워싱턴에 가서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스웨트숍[Sweatshops: 제3세계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에 반대하는 팸플릿을 나눠 주는 열세 살짜리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클린턴 시기 민주당의 결정적 우경화를 목도하고 나서, 전략적으로 투표하기보다는 나의 양심에 따라 투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한겨레 21〉, 2001년 9월 6일치.)그런데, 아이러니이게도,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하던 강준만 교수 자신이 팀 로빈스의 글을 보고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의 논리를 제공했다. 그는 “녹색당이 만만치 않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야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변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 했다.(《이론과 실천》 10월 호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결국 개혁 리트머스는 선거에 누가 당선되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세력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지배계급 정당들은 하나같이 철저한 개혁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들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독립적인 대안을 건설하는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을 성취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진정한 개혁을 열망하는 광범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러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을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리 ‘당선 가능성’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누가 당선되느냐와 상관 없이, 진보 진영을 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