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 실업과 전쟁에 대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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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 - 실업과 전쟁에 대한 저항이
이수현
지난 12월 13일과 14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이틀 벌어졌다.
유럽의 25개국 이상 전국 단위 노조 44개가 주도한 13일 시위에는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그 중에는 폴란드,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에서 버스를 타고 온 노동자들도 있었다. 벨기에 국내에서만 6백 대의 버스가 동원됐다. 그 외에도 350대의 버스, 6대의 프랑스 고속열차 떼제베(TGV)를 비롯한 많은 기차, 4대의 전세 비행기를 비롯한 많은 항공편이 외국인 시위대를 실어 날랐다. 시위대는 실업에 반대하여 완전 고용을 요구했다. 또, 사회적 연대를 통해 차별과 배제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억제하고 개발, 사회 정의, 평화를 촉진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정상회담 개최국이자 올 연말까지 EU 의장국이기도 한 벨기에의 총리는 일부 시위대를 면담한 뒤 그들의 뜻을 “분명히 알아들었다”고 말했다.
지금 세계는 20여 년 만에 선진 산업국이 모두 경기 침체에 빠져든 세계 동시 불황의 위기에 처했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실업 문제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10월 파산한 벨기에의 국영 항공사 사베나에서 쫓겨난 노동자들만 1만 2천 명이 넘었다. 분노한 그들은 그 동안 전투적인 항의 집회를 잇따라 열었는데, 1만 명이 모여 행진을 벌인 적도 있었다.
사베나 노동자 미셸 롱에의 말은 대량 해고 뒤에 벨기에를 휩쓴 분노의 일단을 보여 준다. “우리 부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그래서 우리의 꿈도 사라졌다. 우리 애가 다섯인데, 돈이 없는 집에는 산타 클로스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애들한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프랑스에서도 다농이나 마크스 앤 스펜서 같은 다국적기업들의 대량 해고는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다. 노르망디에 있는 코르넬-르-로얄의 물랭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이 폐쇄될 것이라는 말을 듣자 곧바로 점거에 들어갔다. 프랑스 북서부 알랑송의 물랭 노동자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그런 저항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사장들이 노동자들에게 양보하도록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노동자들도 대량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신뢰성이 의심스런 정부 공식 통계로도 실업률이 상승하고 있다. 이미 고용주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수만 명의 노동자가 실업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그 동안 국내의 일자리 ‘학살’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던 영국의 노조 지도자들도 바뀌고 있다. 작년 12월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EU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는 영국의 지역 노조 활동가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과 계속 연계를 맺어 온 영국노동조합회의(TUC)도 이번 시위를 지지하면서 대표단을 파견했다.
14일에 벌어진 시위에는 3만여 명이 참여했다. 시위를 주도한 세력은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 저항의 세계화(Globalise Resistance), 제4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등 우리에게 낯익은 반세계화·반자본주의 운동 조직들이었다.
그 날 세 개의 각기 다른 시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평화를 위한 행진”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유럽의 군사적 개입을 비난하면서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반면에 화염병이 등장한 폭력 시위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39명이 체포됐고, 경찰은 그 중 10명을 기소했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시위대에게 물대포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고, 이에 맞서 시위대는 차량과 건물 들을 파괴했다. 영국의 공영 방송 BBC 기자에 따르면, 벨기에 경찰도 두 명이나 다쳤다. 그런데 그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새총에서 날아온 돌이었다!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중·동부 유럽의 10개 회원국을 새로 받아들여 EU를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2003년까지 6만 명 규모의 유럽 신속대응군(RDF)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또 아프가니스탄에 3∼4천 명의 평화유지군 파견도 결정했다.
하지만 세계 지배자들 사이의 분열상도 드러났다. EU 정상들은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려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고, 영국·프랑스·독일 등 열강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평화유지군은 EU 공동 차원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번 브뤼셀 시위는 경기 침체의 와중에서 점차 늘어나는 실업, 사기업화, 빈곤과 전쟁에 맞서 싸우는 저항 운동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