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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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폭발
이정구
지난해 12월 20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데 라 루아가 분노에 찬 실업자들의 식량 폭동에 직면해 사임했다. 이 반란은 적어도 3년 전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에서 비롯한 투쟁의 결과였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 실업자들, 심지어 중간계급조차 지난 몇 해 동안 심각한 경제 위기로 고통을 겪었다. 최근 실업률은 거의 20퍼센트에 이른다. 심지어 정부는 연금 생활자 1백40만 명에게 연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날마다 2천 명이 빈곤선 이하로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데 라 루아와 재무장관 도밍고 까바요가 서방 은행에서 빌린 외채를 갚기 위해 복지 재정을 삭감하고, 신규 대출을 받기 위해 IMF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려 한 것이 투쟁을 촉발시켰다.
폭동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휩쓸자 데 라 루아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를 지배했던 군사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계엄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대가 ‘5월 광장’으로 모여들자 데 라 루아는 투쟁을 진압하려 했다.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수십 명이 죽었다. 하지만 이런 탄압으로도 투쟁을 잠재울 수 없었다. 결국 데 라 루아와 도밍고 까바요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재앙
IMF와 미국 관료들은 데 라 루아와 까바요가 아르헨티나의 위기를 해결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까바요가 미국과 IMF의 요구에 충실한 예스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까바요가 1990년대 초에 도입한 페그제(아르헨티나 페소화와 미국 달러화를 1 대 1로 연동시키는 것)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더한층 위기에 빠뜨렸다. 아르헨티나는 IMF가 강요한 자유 시장 정책들 ―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공기업의 사기업화, “유연한” 노동정책 등 ― 을 충실히 따랐다. 중남미에서 가장 발전한 사회 가운데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는 빈곤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데 라 루아 정부는 긴축 정책을 더 강경하게 밀어붙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서방 언론들은 파산한 중간계급이 항의 행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번 봉기는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여러 해 동안 투쟁을 벌인 결과였다.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AS)이라는 단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번 반란의 동력은 평범한 노동자들을 비참하게 만든 기아였다. 탄압은 가혹했다. TV에 비친 모습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다. 몇 시간 만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실업자 단체들도 동참했다.”데 라 루아가 도망가기 직전에 노동조합총연맹(CGT)의 지도자 로돌포 다에르가 총파업을 호소한 데 이어 아르헨티나노동운동(MTA : CGT에서 갈라져 나온 반대파 노조) 지도자 우고 모야노도 정권 퇴진을 위한 총파업을 선포했다.
페론주의 정당은 지난해 12월 시위를 이용해 데 라 루아를 제거하고 주도권을 잡았다. 페론주의 정당은 데 라 루아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해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려 했다. 이 당은 재빨리 이 투쟁의 선두에 서서는,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를 임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로드리게스 사아는 외채 상환 중단을 선언하고 1백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투쟁을 기성 정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지난해 12월 26일 로드리게스 사아는 로돌포 다에르와 우고 모야노를 만나 총파업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월 2백 달러인 최저 임금을 두 배로 올리고 기업이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3일 뒤에 또 다른 대중 시위가 수도를 휩쓸었다. 로드리게스 사아가 공무원 고용 인원을 동결시켰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을 점령한 시위대는 로드리게스 사아 정부에 포함된 부패 정치인을 비난했다.
시위대는 또한 아르헨티나 법원이 예금 인출을 금지시켜 페소화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분노를 터뜨렸다. 사아의 계획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페소화보다 가치가 작은 아르헨티노로 임금을 지급받게 될 터였다.
평가절하가 핵심인 새 화폐 계획은 투쟁의 불씨 구실을 했다. 실업자와 ‘피켓팅 시위대’의 투쟁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도로를 봉쇄하고 직접적 행동을 주도해, 지방 공무원들로 하여금 식량 원조나 비상 일자리 프로그램을 제공하도록 했다. 피켓팅 시위대에 의해 자극을 받은 노조 지도자들도 지난 2년 동안 총파업을 일곱 번 단행했다.
그러는 동안 정부는 달러화로 표기된 외국인 투자와 채권은 보호해 주기로 했다. 한 시위 참가자는 팻말에 “나는 내 돈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 달라고 은행에 맡긴 것이다”라는 글을 써 놓았다.
페론주의 정당 지도부와의 갈등 때문에 로드리게스 사아는 사임하고 두알데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두알데도 아르헨티나가 겪고 있는 위기를 해결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줄타기
페론주의 정당은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양보조처를 얻어 내는 것과 아르헨티나 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인기 없는 정부를 무너뜨린 대중 봉기가 일어났던 나라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1989년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정부들,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이후의 정부, 2000년 필리핀의 사례 등이 이를 보여 준다. 페론주의 정당은 데 라 루아와는 다른 정책들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데 라 루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알데는 IMF와 은행가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국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다. 아르헨티나는 파괴됐다. 아르헨티나 모델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는 페론주의 정당이 1990년대 초반에 카를로스 메넴 정부 하에서 자유 시장 모델을 세웠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두알데의 평가절하 계획은 노동자와 빈민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할 것이다.
두알데가 평가절하 계획을 발표하자 또다시 분노가 폭발했다. 게다가 두알데 정부에 부패한 각료가 포함돼 있는 것 때문에 저항 세력 내에서는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항의 시위자들은 새로 선거를 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국회를 구성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데 라 루아를 몰아냈던 대중 봉기 때처럼 사람들은 빈 냄비를 들고 다니며 기아에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전망
아르헨티나 노동자와 실업자들의 투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면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데 라 루아를 몰아낸 민중의 거리 시위는 중간계급까지 포함된 다계급적 성격을 불가피하게 띄고 있다. 그래서 ‘5월 광장’에 모인 항의 시위대의 구호에는 계급적 요구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한편, 노동자들은 생활 수준 하락에 저항하는 파업을 벌이고 있다. 세라믹을 만드는 사논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면서 지역 단체들과 사회단체를 끌어들여 투쟁의 과제와 진로를 토론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힘은 노동자 대중의 투쟁에 있다. 거리 투쟁은 공장 점거와 같은 생산 현장 투쟁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두번째는 페론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페론주의는 노동자 운동에서 생겨난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다. 후안 페론이 집권한 이후로 노조 관료들은 페론주의 정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노동조합총연맹이 국가에 종속돼 있는 것에 반대해 갈라져 나온 아르헨티나노동운동조차 페론주의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도시 무장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도 페론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사아나 두알데가 보여 주었듯이, 페론주의 정당은 아르헨티나의 위기를 노동자와 민중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현재 아르헨티나 노동자 투쟁은 페론주의가 아닌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