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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론주의를 넘어

페론주의를 넘어

이정구

아르헨티나는 천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1백 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육류와 곡식을 유럽과 미국에 수출했다.

아르헨티나는 노동자 계급 투쟁의 전통 또한 풍부한 나라다. 1930년까지 노동조합 운동은 허약했고, 수많은 직업별 노조로 나뉘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이 1930년에 최초의 노동조합 연맹인 노동조합총연맹(CGT)을 결성했다. 1930년대부터 1948년까지 아르헨티나 산업은 발전했고, 그 결과 산업 노동자 계급이 창출됐다. 1935년∼1943년에 파업이 급증했고, 노동조합 조직률도 높아졌다. 그 덕분에 노동운동 내에서 직업별 노조가 산별 노조로 바뀌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늘어나면서 노동 운동이 지닌 “비정치적” 태도가 바뀌었다.

1943∼1945년에 후안 페론은 권력 장악을 위해 토착 지주들과 외국 자본가들에 대항해 도시 계급들(특히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지닌 강한 민족주의 성격 때문에 파시스트를 포함한 극우에서 무장 게릴라 조직을 포함한 극좌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 세력들이 페론주의에 이끌렸다. 그래서 페론주의는 매우 모순되고 모호하며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페론은 1943년에 민족주의 장교들의 쿠데타로 등장한 정부에서 노동복지장관이 됐다. 그는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임금을 인상해, CGT 조합원들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페론은 노조 내 공산당원과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자신의 “사회 정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노조와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회 정의”는 노동조합에 사회·경제적 양보를 제공하는 대신 노조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것을 뜻했다. “사회 정의”라는 표현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모호한 의미를 지닌 데다, 개인 숭배와 모든 시민 사회의 국가 종속을 강조했기 때문에 파시즘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사회 정의”의 본질은 계급 화해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이었다.

기업주들은 페론의 친노동 개혁을 싫어했다. 1945년 10월 17일 사장들이 친노동 개혁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전국의 노조들이 즉각 개혁을 옹호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다. 페론은 노동자들의 광범한 지지 덕분에 1946년 대선에서 압승할 수 있었다. 그는 대선 기구를 정의당으로 개편했으며, CGT의 요직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다. 또, 군 지도부를 숙정하는 한편, 장교들의 봉급을 인상해 군대 내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페론의 권력 기반은 노동조합과 군대의 특권 기구들이었다.

폐론주의의 모순

1946∼48년은 페론에게 ‘황금기’였다. 식료품 수출로 경제가 성장했으며, 국가 재정도 늘어났다. 이 시기에 정부는 중앙은행·전화국·철도·항만을 국유화했다. 1947년에 외채를 모두 상환했으며, 경제 자립을 선포했다.

페론은 경제 호황 덕분에 복지 국가(사회보장제도)를 실현할 수 있었다. 페론의 집권 기간에 노조는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을 절반 가까이 조직했다. 노동자 임금은 인상됐다. 페론의 처인 에바 페론의 노력 덕분에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1947년에 선거권을 얻을 수 있었다. 페론주의가 비록 권위주의적이고 친자본주의적 정책임에도 이런 성과 때문에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그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수출을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국내 산업을 육성시킨다는 전략은 1948년 이후 차질을 빚었다. 위기의 주된 이유는 해외 시장 경쟁으로 인한 수입 감소였다. 전후의 유럽 농업은 회복됐고, 미국 농산물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아르헨티나의 수출이 감소했다. 더욱이 1948년의 심각한 가뭄은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페론은 노동자 임금을 동결하는 긴축 정책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1952년에는 외국인 자본가들에게 시장을 개방했다. 페론은 시장 개방이 일자리와 수출 증대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

이 정책의 효과는 일시적이었고, 경제의 근본 문제들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농산물 수출은 감소했고, 국유 산업 부문은 정체했으며, 물가는 치솟았다. 1950년부터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자 페론은 인권, 정치적 자유, 시민 사회의 제도들을 공격했다. 반정부적 노동조합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급진당(당명과 달리 자유주의적 중간계급 사람들의 정당이다) 지도자조차 탄압받았다. 광적인 선동과 정치적 위협이 국가의 페론주의화와 함께 진행됐다. 1952년 에바 페론이 33세로 죽자 페론주의는 신화가 됐다.

가톨릭 교회를 포함해 페론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군부 내에서도 페론에 대한 불만 세력이 형성됐다.

1955년 군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페론을 축출함과 동시에, 노동조합 운동 내 페론주의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성과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투쟁의 절정은 1969년 “코르도바소”(봉기라는 의미)였다. 이 봉기에서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군부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일부 급진적 학생들은 도시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이런 투쟁 덕분에 페론은 망명지인 파나마에서 돌아와 197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 때의 페론주의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분파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념도 변했다. 페론주의 운동의 오른쪽 극단은 1940년대에 파시스트 민족주의에 이끌렸고, 중도파는 사회민주주의 비슷하게 바뀌었다. 좌파 쪽에서는 주로 학생들이 1960년대에 체 게바라의 영향을 받아 도시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페론주의의 영향을 받은 게릴라 청년들은 몬테네로스의 토대가 됐다.

제2차 집권기 동안의 후안 페론과, 그가 죽은 뒤 권력을 물려받은 그의 처 이사벨 페론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좌파를 공격하고 노조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1975년 페론 정부 하에서 처음으로 총파업을 벌이며 투쟁을 벌였다. CGT는 현장 조합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투쟁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이 파업을 지도했다.

노동자들의 전투성에 두려움을 느낀 군부는 좌파와 노동자 계급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1976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뒤 군부가 벌인 7년 간의 “더러운 전쟁”으로 수만 명의 노조 활동가들과 좌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3만 명 이상이 “실종”됐다.

1980년대 초반 군부는 다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 운동에 직면했다. 군부는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령 말비나스(포클랜드) 섬을 점령했지만, 영국에 패배한 뒤 군부 지배는 무너졌다.

여파

1983년 10월 선거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인 급진당의 라울 알폰신이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대세였지만, 알폰신이 자유 시장 정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노조는 반발했다.

1989년 대통령에 당선된 페론주의자 카를로스 메넴은 부패 종식과 노동자 생활수준 향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 일을 했다. 그는 정설적 자유 시장 정책을 추진해 IMF의 신뢰를 받았다. 메넴의 두번째 집권기였던 1990년대 후반에 아르헨티나 경제는 심각한 침체에 빠졌다.

사민당과 급진당의 선거 동맹이 배출한 후보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메넴에 대한 환멸을 이용해 1999년 대선에서 이겼다. 그러나 데 라 루아도 메넴의 주요 정책을 고스란이 이어받았다. 심지어 그는 메넴의 경제 정책을 입안했던 도밍고 까바요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데 라 루아 집권 2년 동안 일곱 번의 총파업이 있었고, 실업자 운동이 급성장했다. 이 운동은 지난 달 데 라 루아와 그 후임자 로드리게스 사아를 물러나게 만든 투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는 김대중을 페론주의에 빗대면서, 마치 페론주의가 노동자들에 대한 “퍼주기식” 정책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하지만 페론주의는 언제나 노동자 운동의 자주적인 발전을 가로막았다. 더욱이 메넴이나 로드리게스 사아나 두알데 모두가 노동자들에게 “퍼주기”는커녕 생활수준을 공격하기에 바빴다. 페론주의는 노동자 운동에서 등장했지만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우파 이데올로기다. 아르헨티나 노동자 운동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페론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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