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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과 선전

던컨 핼러스가 1984년에 쓴 글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선동은 “흥분시키는 또는 분발시키는 것”인 데 반해, 선전은 “어떤 원칙이나 신념을 전파하려는 체계적 계획 또는 일치된 운동”이다. 이 정의는 출발점으로서 그럭저럭 괜찮다. 선동은 당면 쟁점에 초점을 맞춰 그 쟁점을 중심으로 행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선전은 더 체계적으로 사상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 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플레하노프는 이 구별의 중요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선전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사상을 전달한다. 선동가는 몇몇 사상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일반화된 모든 것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유리한 정세에서는 선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선동의 영향을 받는 “다수의 사람”이라는 것도 그 수는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플레하노프의 대체적 요점은 옳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 인식을 다음과 같이 발전시킨다.

선전가는 예컨대 실업 문제를 다루면서 경제 위기의 자본주의적 본질, 현대사회에서 경제 위기가 불가피한 이유, 이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변혁할 필요 등을 설명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많은 사상’, 정말로 수많은 사상을 전달해야 하므로, 이를 완결적 전체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선동가는 [실업이라는] 같은 주제를 이야기할 때, 해고된 노동자의 가족이 굶어 죽은 사건,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등을 예로 들 것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이용해 단 하나의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려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선전가의 주된 활동 수단은 글이고, 선동가의 수단은 말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레닌은 틀렸는데, 너무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이 위 글을 쓰기 전과 후에 주장했듯이, 혁명적 신문은 대단히 효과적인 선동가일 수 있고 또 그런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선동의 수단]은 부차적 문제다. 중요한 것은 선동이 (말로든 글로든)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파업 중인] 전국광원노조(NUM)에 반대해 자본주의 [국가기구인] 법원에 호소하는 광원들을 파업 파괴자, 배신자라고 비판해야 한다1. 또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오늘날 투쟁의 맥락을 고려해 그들을 비판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국가기관에 대한 일반적 주장도 펴지만,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이 법원에 맞서 “불만과 분노를 키우거나 흥분하고 분발하게끔” 해야 한다. (대개) 이 노동자들은 어떤 국가든 어떤 법원이든 간에 그것이 필연적으로 계급 지배의 도구라는 사실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레닌은 “불의를 좌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깊이 있게 이해한 레닌은 계급 이익과 관계 없는 ‘정의’나 ‘불의’ 따위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는 ‘정의’나 ‘공정’의 개념과 계급투쟁 과정에서 폭로되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고 부각한다. 이것은 선동의 관점에서 볼 때 전적으로 옳다.

물론 선전가는 더 깊이 조사해야 한다. 또 정의의 개념이 무엇인지, 그 개념이 상이한 계급사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바뀌고 발전했는지, 그 개념에 어떤 계급적 내용이 담길 수밖에 없는지도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선동의 주된 취지는 이것이 아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즉 이상화된 계급사회를 반영하는 초역사적 일반화의 제물이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노동계급의 태도가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험(예컨대 광원 파업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행태를 목격한 것)의 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선동과 선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선동과 선전은 둘 다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지만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선동에는 더 큰 세력이 필요하다. 물론 개인이 특정 불만 사항, 예컨대 작업장에 비누나 제대로 된 휴지가 없는 것 등에 대해 때때로 효과적으로 선동할 수 있지만, 일반적 초점을 형성하는 광범한 선동은 그것을 수행할 적합한 위치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없다면, 곧 당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선동과 선전을 구별하는 것이 오늘날 왜 중요한가? 대체로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청중은 수천 명도 수만 명도 못 된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고, 대개 대중 선동을 펼치기보다는 일반적 사회주의 정치를 내세우며 그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선전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혼란이 생긴다. 하나의 선전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추상적 선전도 있고 (잘만 되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체적·현실적 선전도 있는데, 이것은 서로 다르다.

추상적 선전은, 형식적으로는 옳지만 청중의 의식 수준이나 현실의 투쟁을 고려하지 않은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예컨대, 사회주의 사회에서 임금 체제가 폐지될 것이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지만, [임금 인상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제 폐지 요구를 내놓는 것은 선동이 아니라 가장 추상적인 형태의 선전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가능성을 따져 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총파업을 요구하는 것은 선동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기권하는 것이다.

반면 현실적 선전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이 현 상황에서는 대체로 노동자 대중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쟁점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효과적으로] 주장하면서 성장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공장에서 활동하는 현실적 선전가는 임금 체제 폐지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요구들을 제시할 것이고, 이는 노조 관료의 이름뿐인 요구들을 틀림없이 능가할 것이다. 예컨대, 사회주의자들은 고정급 인상, [보험료나 보상금 등의] 전액 지불, (부분파업보다는) 전면파업 등을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말한 의미의 선동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투쟁이 승리할지를 두고 소수의 사회주의자가 의견들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 선전도 아니다. 현실 투쟁과 연결돼 있고, 따라서 적잖은 노동자들과 관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적 선전이 사회주의 사상에 완전히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넘어 훨씬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아주 적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상에는 충분히 개방적이지 않지만, 왜 노조 지도자들을 신뢰하면 안 되는지, 왜 현장조합원 조직이 필요한지 등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에는 상당한 지지를 보낼 수 있다.

선동과 선전의 구별은 두 측면에서 중요하다. 소규모 토론 모임 활동을 선전으로 여기고 작업장 활동을 선동으로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기 쉽고, 그 결과 소수의 [단단한] 지지자를 획득할 기회를 놓친다. 다른 사회주의자와 토론하면서, 자신의 작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저 추상적 선전만 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은 실제로 투쟁이 일어날 때 기권하는 태도를 취하기 십상이다.

대중적 선동이 대체로 가능하지 않은 시기에 현실적 선전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두 함정을 모두 피할 수 있게끔 해 줄 것이다.


  1. 1984~1985년 영국 광원 파업 때 전국광원노조 각 지부는 탄전별 인센티브 제도 때문에 분열돼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던 광원들이 파업 파괴자 구실을 했고, 법원이 나서서 노조 기금을 압류하기도 했다.↩︎

출처: Duncan Hallas, “Agitation and propaganda”, Socialist Worker Review 68, September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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