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50만 명이 정부에 항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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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 50만 명이 정부에 항의하다
정형준
지난 3월 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50만 명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번 시위는 작년 7월 제노바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2월 15일에는 15만 명이 교육과 교통, 위생, 퇴직 및 실업 정책 등 우파 정부의 사회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바 있다.
작년 5월에 집권한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전진 이탈리아당(FI)과 이민을 반대하는 북부동맹, 파시스트인 국민동맹(NA)의 연립 정부다.
우파 정부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 5년 동안 중도좌파 올리브나무 동맹 정부가 자유 시장 정책을 계속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좌파 연립 정부는 사유화 정책으로 수많은 공기업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약속(세금 탕감, 연금 확대, 대규모 공공사업 등)을 남발했다. 그러나 그의 동맹 세력인 북부동맹은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자행했다. 국민동맹은 이탈리아사회운동(MSI)의 후신이다. MSI는 공개적으로 무솔리니의 정치적 계승자를 자처했다.
작년 제노바 시위 때 베를루스코니와 파시스트들은 시위대 한 명을 죽였다. 5백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들은 새 이민법인 보시-피니(Bossi-Fini)법을 도입했다. 그 법은 이민자가 실직하면 즉시 이탈리아에서 추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부실회계를 합법화했고, 해외 금융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을 어렵게 만들고, 해외 도피 재산을 다시 반입하면 사면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상속세도 폐지하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최고의 부자다. 6개의 민영 TV 채널을 소유한 미디어 재벌이자 억만장자다. 그는 2월 이탈리아국영방송(RAI)을 운영하는 방송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위원장과 2명의 위원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영국의 국영방송인 BBC의 보도대로 “이탈리아 TV의 90퍼센트가 그의 수중에 있다.”베를루스코니는 현재 탈세, 재산 도피, 뇌물공여 등 10여 개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는 각종 부정부패와 탈세 사건에 연루된 자신과 측근들에 대한 조사를 연기·취소시키고, 무혐의 처리해 왔다. 그는 자신의 비리에 대한 조사를 ‘좌파의 음모’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번 시위는 그가 자기 비리에 대한 조사에 개입한 것에 항의한 데서 비롯됐다.
시위 1주일 전에 밀라노에서 열린 ‘마니 풀리테’ 10주년 기념 시위에는 4만 명이 참여했다. 마니 풀리테는 ‘깨끗한 손’이라는 뜻으로 당시 밀라노의 피에트로 검사가 벌였던 대대적인 부정부패 수사 활동을 말한다. 마니 풀리테는 이탈리아 정치의 뿌리 깊은 부패를 폭로했고, 결국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의 연립 정부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물결
3월 2일에 50만 명의 시위대가 국회를 통과한 ‘해고 유연화 법안’ 반대를 외치면서 행진했다. 정부는 해고의 위협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장치인 18조(Article 18)를 폐기하려 했다.
전국에서 특별 기차와 버스 편으로 모인 시위대는 ‘악법 철회’를 외쳤다. 거짓말의 상징인 ‘피노키오의 코’를 얼굴에 쓰고 나왔고, 정부의 ‘더러운 손’에 대한 항의 표시로 흰색 장갑을 꼈다. 일부는 베를루스코니의 그림 옆에 “노동유연화에 찬성한다. 그를 해고하자”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앞세웠다.
평조합원 대중의 압력을 받은 이탈리아노동자동맹(CGIL)은 ‘해고 유연화 법안’ 철회를 위해 3월 23일에 50만 명을 동원한 대규모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4월 5일에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 총파업을 벌일 예정이다. CGIL은 모든 평조합원 조직, 지방 조직들, 반자본주의 운동 세력에게 이 투쟁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3월 2일 CGIL의 투쟁 호소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날 토리노에 있는 거대한 피아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약 80퍼센트가 파업에 참가했고, 그 중 1천5백 명은 도심까지 행진했다.
다른 노동조합연맹인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UIL)과 이탈리아 기업노동자동맹(CISL)은 정부와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이번 파업에 동참했고, 그 중 다수는 앞으로 총파업에도 참가할 것이다.
이번 시위는 민주좌파당과 올리브나무 동맹이 함께 조직했다. 민주좌파당은 영국 노동당과 흡사한 정치를 가진 옛 공산당의 후신이다. 민주좌파당이 이번 시위를 주도하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운동에 떠밀려서 마지 못해 싸우고 있다. 민주좌파당의 정치인들은 대다수에게는 여전히 환멸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이번 시위는 작년 제노바 시위 이후 더한층 거대하게 성장한 운동을 보여 주었다. 작년 제노바 반자본주의 시위 이후 볼로냐의 한 반자본주의 운동가는 “제노바는 이탈리아 정치의 표면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은 신세대 젊은이들을 좌파 정치로 끌어들이고, 수많은 베테랑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1975년 이후 지속됐던 투쟁에 대한 냉소주의가 사라졌다.
이번 시위와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파업은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이 만들어 낸 자신감의 표현이다. 지금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다. 파시스트, 인종주의자, 살인자의 정부가 의회에서는 다수일지 모르지만, 의회 밖에서는 결코 다수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노동계급이 제노바에서 배운 교훈으로 더 단결되고, 성숙하고, 결정적인 투쟁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