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노동자 연대〉 구독
미사일 디펜스 - 크레이그 아이젠드래스 외, 들녘
승영
최근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심지어 중국, 러시아까지도 핵 공격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사일 디펜스는 미국 핵 정책의 핵심적인 일부다. 미국의 여러 학자들이 쓴 《미사일 디펜스》는 미사일 방어체계 정책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있다. 아이젠하워 때부터 시작된 미사일 방어체계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 계획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600억 달러를 SDI 계획에 투입했다. 클린턴은 국가미사일방어(NMD)에, 부시는 미사일방어(MD)에 막대한 돈을 지금까지 계속 쏟아 붓고 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한 데 비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사일 방어체계 자체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DI는 우주 기지에서 X선을 발사해 미사일을 파괴하는 방법이다. 외기권에서 발사된 X선은 지구 대기로 들어올 수 없다. 따라서 미드코스(탄두가 우주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미사일을 요격해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기권 밖에서는 진짜 탄두와 디코이(방어를 교란하기 위한 모의 탄두)를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기권 밖에서는 물체의 질량을 구별할 수 없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 올릴 기술을 가진 국가라면, 식별이 불가능한 디코이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 문제는 ‘기술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는 NMD도 마찬가지다. NMD에서는 X선 대신 충돌 요격체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밖에도 적의 탄두를 파악하는 지상 레이더 기지가 방어에 취약하다는 점, 실제로 핵 전쟁이 일어날 때야 진정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점 등도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렇듯 과학적으로 허황된 계획에 투입된 돈이 1천억 달러도 넘는다. 그 과정에서 방위산업체, 관련 연구소와 과학자, 보수 정치인 및 퇴역 장성들의 연계망과 로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잉, 록히드 마틴, 레이시언, TRW는 1997∼1998년에 NMD를 위해 3천4백만 달러를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다. CIA를 제외한 전체 정보기관 예산의 90퍼센트가 군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로비와 정보 독점으로 말미암아 미사일 방어망의 사업 타당성 심사는 허술하기 그지없다. 미사일 방어망을 추진하는 자들은 실험 결과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골수 반공주의 과학자 에드워드 텔러는 아무 성과도 없었던 실험 결과에 대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떠들고 다녔다. 탄도탄 미사일 방어기구(BMDO)는 이미 발표한 결론과 부합하지 않는 실험 자료는 일부러 누락시켰다.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정보 조작은 다반사였다. 레이건은 SDI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1980년대 초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미국에 앞선다고 거짓말을 했다. 클린턴과 부시는 북한 등 ‘불량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과학자연맹은 “북한의 미사일 시설은 그저 실험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일 뿐”이라고 밝혔다. 미사일 디펜스는 항상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구실을 했다. 1986년 미국은 “10년 안에 탄도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등 공격용 미사일을 제거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을 축소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 부시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 포괄핵실험금지조약,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같은 군축 협정조차 지키지 않으려고 한다. ABM 협정은 이미 파기했다. 이 책은 미사일 디펜스와 관련된 낭비, 속임수의 역사를 속속들이 보여 준다. MD 정책이 미국의 오만한 대외정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잘 말해 준다. 하지만 기본적인 관점과 정치적 결론에는 한계가 있다. 국제 외교를 강화하고 여러 군축 협정을 맺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대안이라는 주장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리고 이 책은 미국의 ‘사막의 폭풍 작전’에는 반대하지만, 이라크 핵 사찰은 지지한다. 미사일 디펜스가 낭비라는 것을 지적하지만, 그 돈을 복지 예산이 아니라 미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이런 관점에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아울러 여러 협정들의 정치적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읽으면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김정숙
5천년 역사에서 한국은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고 강간하고 그들의 시체를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그들은 아무 원한 관계도 없는 한국인들이 왜 자신들을 죽이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어갔다. 현재 베트남에는 한국인의 잔인한 학살을 입증하는 ‘증오비’가 서 있다. 전쟁은 끝났어도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은 수많은 베트남인들은 아직도 그 때의 피비린내와 잔혹함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라는 ‘바이러스’로부터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미국적 시각 아니면 경기 특수와 달러를 안겨 준 전쟁이었을 뿐이다.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에서는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각자 편리한 대로 베트남전의 기억을 덧칠하는 것을 경계한다. 저자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할 때 그 전쟁의 최대 희생자였고 아직도 그 고통이 진행형인 베트남 사람의 고통을 빠뜨린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월남 파병군인들도 선량한 개인을 ‘살인자’로 만든 국가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다.
또한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 문제나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그들의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것 만큼이나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서와 배상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호치민이 통일 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서 미국은 전 세계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대응해야 한다며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개입했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한국군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은 25개국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양심에 칼을 그은 부도덕한 전쟁에 참전한 나라는 7개국이었고, 이 중 실제 전투에 개입한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32만 명이 파병된 베트남전에서 한국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한 예로 1967년 1월 한국 해병대가 3천3백40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1천7백34세대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을 들 수 있다. 우리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믿기 어렵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원래 기억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 굴절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베트남 양민들은 부모의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슬픔, 죄 없는 자식들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차가운 금속총알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의 경제협력과 원조에 몸달아 하는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상처는 과거의 기억으로 접어두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전쟁으로 인해 과거는 말살되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도 산산이 부서졌는데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단 말인가? 허망한 ‘말 잔치’ 일 뿐이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결과가 월남의 패망이라고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월남 패망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악랄한 베트콩은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사’이다. 전쟁의 기억은 이렇게 다르다. 과거 베트남 파병과 학살에 대한 침묵의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은 10억 달러였지만, 잃은 것은 전쟁의 부도덕함과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대량 살인에 대한 저항권과 양심이다. 30년이 지나서 우리 정부가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사과하면서 해 준 일은 도로를 닦아 주고, 학교를 세워 주고, 전시관이나 위령비를 세워 준 일이다. 그것도 있는 대로 생색을 내면서 말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위령비에 있는 한국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내용을 지워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하기까지 한다.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집단은 베트남의 실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살고 싶으면 베트콩을 죽여야 한다는 학살의 광기에 동참하라고 권유한 국가 권력은 전쟁의 참혹함과 개인적 죄책감을 느끼는 개인들을 국가 유공자나 산업 발전의 주역으로 추켜세웠다. 더욱이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 ‘경제특수’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민간인을 학살한 파병 병사의 끔직한 기억은 고엽제와 폭탄으로 잘린 다리처럼 희망을 도둑맞은 그들을 평생 지배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런 기억을 철저히 외면하고 책임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첫째, 베트남전으로 인하여 삶이 해체되어 버린 사람들의 상처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민간인 학살의 책임과 배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청부살인’과 같은 월남전에 우리 젊은이를 파병한 박정희 전대통령 기념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세우는 것보다 억울하게 죽은 베트남 양민들을 위한 위령비와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셋째, 베트남전 양민 학살의 진실은 분명히 베트남전 참전 군인에게는 불편하고 지워 버리고 싶은 일이다. 그럼에도 아픈 진실을 함께 기억하고 묻어 버리지 않음으로써 과거의 비극이 미래에 재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편한 기억이 역사의 이름으로 밝혀지는 것에 대하여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참전 군인들은 분노와 욕설보다는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기’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들었던 아쉬움은 저자가 베트남 전쟁의 제국주적 성격은 깊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제국주의의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미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월남 땅에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식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렇듯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논리가 베트남에서 발생한 모든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전쟁은 계급적·정치적·경제적 손익계산과 분석을 마친 후 전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려는 집단은 미국의 제국주의였다.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기억을 왜곡하지 않고, 그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꼭두각시로 민간인을 학살했던 한국 정부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따라서 베트남전의 비극의 몸통인 미국 제국주의와 용병을 보냈던 한국 정부 양국 차원의 민간인 학살 사실 인정과 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에서 몸과 마음이 전쟁터가 되어 아직도 ‘전쟁의 기억’ 속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박은정
MBC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유명한 유시민 씨가 쓴 경제 대중서가 나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독일 유학파 경제학 전공자인 유시민 씨는 경제학 이론서라기 보다는 경제 평론서에 가까운 이 책에서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며 경제학의 여러 개념과 이에 연관된 사회 현상에 관한 자신의 “설”을 풀어나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유시민 씨의 말대로 대학에서 (주류)경제학 개론을 듣고 시험을 칠 신입생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유시민 씨가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주류 경제학의 기본 전제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변혁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의 경제학 세미나 책으로는 알맞지 않을 것이다. 유시민 씨는 좀 꺼림칙해 하면서도 결국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긍정으로 끝맺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시민 씨 나름의 재치와 날카로운 통찰력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주류 경제학(자)의 이론적 허점과 무능력을 풍자하고 있는 부분에서다. 유시민 씨는 (주류)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견해를 다룬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등장하는 인간, 즉 ‘경제인’은 모두 “자기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 인간”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보통 ‘이기적’이라는 말보다 ‘합리적’이라는 멋들어진 표현을 선호한다.” 이런 철학의 기초를 세운 벤담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자의 행복을 제약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매우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강남 부자들의 호화로운 사치와 과소비나 재벌이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주는 것도 나름의 “합리적” 선택일 뿐이다. 유시민 씨는 올바르게도 이 개인주의(=자유주의) 철학은 자본주의의 모든 부조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으며 전경련, 경총, 자유기업센터 같은 단체의 철학적 입장이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재치있는 지적은 자본주의의 투기성에 관한 것이다. “국가가 형법으로 도박을 단죄하면서 카지노와 경마장과 주식 시장을 보호해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퍽 괴상한 모순이다.”한편, 유시민 씨는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빈부격차 즉, 불평등을 동반한다고 지적한다.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영국 경제학자의 유명한 비유 ‘난쟁이의 행진’과 지니계수, 엥겔지수에 관한 그의 설명은 유용하다. 이 책 3부인 ‘시장과 세계’는 필자 자신이 추천하고 있는 책 《세계화의 덫》을 많이 참고해 쓴 인상이다. 달러 중심의 세계화나 부국과 빈국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너무나 또렷해서, 세계화를 설명할 때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다. G7회담에서도 이에 대해 입발린말이나마 논의했다지 않은가! 여기서 유시민 씨는 토빈세 얘길 하지만 그 스스로 현실성이 없다고 덧붙인다. 유시민 씨는 이 책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자. …자본가의 존재 근거는 이윤이지만 경제학자의 존재 근거는 이데올로기 생산임을.” 경제학은 본질상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어서 쉽게 이편이냐 저편이냐가 나뉘어 진다. 자본주의 경제를 옹호하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 누구의 편에 서느냐의 문제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유시민 씨의 입장은 그 둘 사이의 경계선 위에 서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태도는 유시민 씨가 100분 토론의 진행자였을 때 경총의 대변인과 노동조합의 대변인이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보였을 때 양측의 주장을 번갈아 반박하며 타협점을 찾으려 했던 태도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양쪽 모두에게 불만을 살 뿐이다.
유시민 씨는 부족하나마 계획경제보다는 시장경제가 이러한 인간의 욕구 충족에 더 잘 부응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유시민 씨는 구소련의 관료적 지령 경제와 애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추구하는 계획경제를 암암리에 동일시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대안을 국가의 “보이는 주먹“을 극대화한 경제 강령 즉, 국유화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안은 자본주의가 이미 이룩한 계획경제의 기반 ― 전세계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컴퓨터 통계 시스템 같은 ― 들을 충분하게 활용한 경제 모델이다. 문제는 경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이다. 다수의 생산 대중이 그 주도권을 공유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유시민 씨가 이런 대안으로 나아가기에는 길을 한참 잘못 든 것 같다.
한상원
이 책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다.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인 동포의 집을 운영하는 김해성 목사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1994년 봄, 한 교회의 지하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 ‘쉼터’가 만들어졌다. 한 방에 20명씩 모두 1백여 명의 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곳에 머문다. 그들은 모두 수많은 억울한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임금 체불에 항의하다가 사장에게 구타를 당하고 산재로 팔이 잘려나가도 보상해줄 곳이 없다.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상의 약점 때문이다. 일제 시대에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혹은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지역으로 피신했던 중국 동포의 후손들은 고국에 돌아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
‘중국동포 김길원 씨는 손가락은 모두 잘리고 사장에게 보상을 요구하다가 삽자루로 두들겨 맞아 허리를 다친 채 사장의 신고로 경찰에 불법 체류자로 체포가 되어 방광파열로 피오줌을 싸며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 중국동포 서문봉씨는 지난해 5월 31일 한국인의 몽둥이에 맞아 피살당했다. … 장례라도 치르려고 찾아갔지만 병원에서는 치료비 1천 3백여만원을 내지 않으면 시신을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 앞에 물러서야만 했다.’ 이윤 때문에 사장들은 안전 장비를 설치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안전 요령을 제대로 알려주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수많은 노동자의 손가락과 팔목이 잘려나간다. 외국인 산업재해자들은 한결같이 ‘산업재해로 인해 우리의 잘린 팔과 손가락이 아마 몇 십 가마니는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 사회 쟁점이 되자 정부는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일하는 연수생들은 하루에 12∼16시간을 일하고 고작 15∼20만원의 월급을 받을 뿐이다. 반면 불법 체류 노동자들은 대부분 50∼1백만 원의 월급을 받는다. 또한 산업재해 사고가 일어나 사망할 경우 산업연수생들은 보험회사로부터 1천5백만 원까지 받을 수 있지만 이조차 회사나 송출업체가 가로채는 일이 빈번하다. 반면 불법 체류자의 경우 노동부 보상과 회사측 보상을 합쳐 총 8천8백80만원을 받은 경우도 있다. 이는 산업 연수생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순에서 비롯된다. 이주 노동자의 불만이 커지자 정부는 1995년, 각종 보험을 적용하는 제도 개선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사장이 가로막는 것에 대응할 수 없으며, 최저임금은 올랐으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명시된 ‘개악’된 제도일 뿐이다.
이 책에 실린 흑백 사진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일상을 담았다. 팔목을 잃고 망연자실해하는 중국인 노동자의 사진부터 노동자들이 여가활동을 즐기며 즐거워하는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 속에서 노동자들은 외친다. ‘착취대국 大恨민국!’ 그리고 노동자들은 묻는다. ‘진짜 살색은 무엇입니까?’ ‘검은색 피부를 가진 우리의 피는 무슨 색일까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워질 것이다. 제국주의에 의해 그토록 억압을 당해온 나라에서 왜 더 약한 인종에 대한 멸시와 억압이 행해지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반문해보자.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도 싸워야 한다. 그들의 인권과 한국 노동자들의 권리는 떨어져 있지 않다. 노동자 운동의 가장 아름다운 덕목은 연대와 단결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
임미정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이 한창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노무현이 이회창을 앞질렀다. 이회창이 월세가 1천만 원이 넘는 호화빌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노무현의 평민적 이미지는 더 도드라졌다. 국민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대세론’은 한풀 꺾이는 듯하다. 이인제에 뒤지던 노무현은 노동자 지구인 울산에서 다수표를 얻었다. 노골적으로 박정희 향수를 풍기는 이인제 같은 수구 보수보다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이인제냐 노무현이냐”를 놓고 신경전이 고조될 때 ‘노무현 필승론’을 내건 책이 나왔다. 인터넷 대자보 정치팀장 장신기 씨가 쓴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이다. 이 책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모아놓은 듯하다. 장신기 씨가 말하는 ‘노무현 필승론’은 이렇다.
이인제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면 민주당의 개혁 지향적인 전통적 지지 세력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인제는 호남과 충청 지역 연합전략을 통해 대선에 도전할 것이다. 이는 영남을 뭉치게 해 민주당은 대선에서 실패할 것이다. 이인제가 1997년 대선에서 얻은 5백만 표는 반한나라당 비김대중 정서의 결과물이다. 김대중이 없는 2002년 대선에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므로 대선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다. 반면 노무현은 개혁적이며 영남 출신이므로 민주당에 비판적인 수도권과 영남의 중간층 표를 얻을 수 있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이 책의 주장은 일면 맞다. 1997년에 대선에서 사람들은 민주화와 개혁을 바라며 김대중에게 표를 던졌다. 이인제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면 이들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일부는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 후보를 찍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제 대세론이 허풍이라면 노무현 필승론은 과도한 낙관이다. 장신기 씨는 민주당 지지세력이 민주당에 등돌린 이유가 수구파의 날조된 유언비어와 일부 동교동계의 실책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김대중과 동교동계만 제거되고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되면 차기 집권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대중이 민주당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신여권도 구여권과 한결같이 노동자 계급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사유화에 맞서 싸우는 발전 노동자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정기간행물법, 국가보안법 어느 것 하나 개정조차 하지 않았다. 빈부격차와 환경파괴는 더욱 심해졌다.
저자는 지난 대선·총선 투표율 통계를 들며 노무현 필승론을 거듭 주장한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얻은 표 33.8퍼센트와 노무현이 영남에서 얻을 수 있는 5퍼센트의 표를 합치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특정 시점에서 대중의 견해만을 일면적으로 반영할 뿐이다. 반민주당 정서는 2001년 4월과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드러났다. 참신성을 강조한 허인회조차 낙방했다. 심지어 민주당의 텃밭인 군산과 임실에서도 한나라당이 당선됐다. 그런데도 1997년 민주당에게 갔던 33.8퍼센트의 표가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민주당에 대한 쓰라린 환멸의 상처가 반창고를 새 것으로 바꾼다고 쉽사리 아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웅진닷컴
이연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어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40∼50년대의 한국 사회상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다. 일제 치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해방을 맞으면서 ‘나’의 집안은 친일파로 몰려 풍비박산이 난다. 오빠가 일본인의 철공소에서 일을 하고 숙부가 동사무소의 하급관리라는 이유만으로, 집의 문패는 단숨에 패대기쳐진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친일일까? 삶에 찌든 소시민들의 어쩔 수 없는 친일은 철저하게 처벌받고, 정작 상류층의 커다란 반민족 행위는 은근슬쩍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해방 이후 학교에 다시 가보니 일본어 선생이 명찰만 바꿔 달은 채, 고스란히 국어 선생을 하고 있더라는 작가의 냉소는 비단 그녀만의 분노는 아닐 것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 붙어먹고 살았던 자들 중에는 해방 후 꿋꿋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다. 친일파들은 지금도 뻔뻔스럽게 사회 지도층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친일 반민족 인사들의 명단을 보라. ‘나’의 오빠는 이념의 혼란 속에서 공산주의에 매료된다. 그러나 ‘빨갱이 짓’을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냉전 분위기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 등으로 계속 고민한다. 이 소설은 신생 정부가 좌익을 얼마나 극심하게 탄압을 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승만 정부는 ‘나’와 오빠를 비롯해 ‘빨갱이’라고 조금만 의심되면 보도연맹에 강압적으로 가입시킨다. 사상 전향을 강요하고 운동을 포기하게 만든다. 전향의 후유증 속에서 ‘나’의 가족은 6·25 전쟁을 맞는다. 오빠는 거물급 빨갱이로 몰려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오빠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후에 ‘나’는 이곳저곳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박완서의 글에는 아마도 그 시기에 뼈저리게 느꼈을 법한 부당한 권력에 대한 고통의 흔적이 드러난다. 단편 《조그만 체험기》와 같은 소설에는 권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고발한다. 물론 박완서 씨의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 저자는 해방 후 학생 운동에 대해 보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학교에 생긴 자치회가 교사 인사권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는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걸 학생에게 무한한 권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하고 평한다. “실상 그때 우리가 날뛴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 문제일 수도, 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 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은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작가는 지금 그 배탈을 낫게 한 것이 학생들의 치열한 투쟁 때문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1940∼50년대의 첨예한 이념의 대립 속에서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던 한 개인의 고뇌를 인간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 스티븐 제이 굴드 외, 율력
김명진
히틀러나 아인슈타인이 부활하거나 누군가 나를 몰래 복제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복제’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것들이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더욱 강화된다. 이는 인간 복제라는 용어가 우리를 현혹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 복제와 관련하여 현재 논의되는 과학 기술을 정확히 지적하자면 ‘체세포 핵 이식을 통한 유전자 복제’가 적당할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특정 인간의 개성·지능·경험 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 ― 예를 들어, 영화 〈에일리언 : 부활〉에서 리플리가 몸과 함께 기억까지 재생되는 것 ― 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 복제를 규제하기 위한 법 제정 운동이 일어나고, 국가별로 이러한 법률을 도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한다. 복제양 ‘돌리’에서 시작된 인간 복제의 충격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다.
이 책은 1997년 미국의 국가생명윤리위원회의 인간 복제 보고서 발표 전후에 인간 복제 논쟁에 참여한 과학자, 철학자, 생명 윤리학자, 신학자, 법학자들의 찬반 논쟁을 묶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 복제의 주요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 복제가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은 주로 신의 뜻에 합당한 유성 생식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둘째는 인간 복제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은 복제된 배아와 태아의 신체적 불안전, 인간 개성의 침해, 가정에 미치는 악영향,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잠재적 해악, 인간의 상품화 그리고 우생학에 근거한 인간 유전자 조작 등의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주로 복제 과정의 안전과 관련하여 아이의 신체적·유전적 손상과 비현실적인 부모의 기대나 혼란스러운 정체성 문제로 인해 아이가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상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레온 카스는 극단적으로 인간 복제에 관해 인간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복제를 반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복제 반대론자들의 논리를 반박한다. 이들은 인간 복제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은 매우 과장되어 있고, 비교 기준을 결여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에 기인하고, 익숙한 것들이 가지는 더 큰 위험을 간과하고 있으며, 때로 아마추어가 안락의자에서 머릿속으로만 하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르원틴은 복제 반대론자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넌센스라고 강조한다. 즉, 인간의 개성이 복제될 수 없는데도 복제된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특별한 길을 강요하거나 유전자 공여자와 비교함으로써 아이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고, 가족들 또한 그를 자신의 아이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형제로 볼 것인지 하는 문제로 가족 정체성도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는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언론과 천박한 과학자들이 널리 선전해 온 게놈주의가, 유전자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한다는 잘못된 이해를 만들어 낸다면, 이런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복제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몰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수정관 아이가 처음 탄생할 때도 그 아이는 차가운 인간이 될 것이라는 둥 우려가 많았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수정관 아이를 대할 것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해로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사람들이 불임 부부의 체외 수정 시도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수정관 아이에게는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유전자 복제 인간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