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다르푸르 사태:
다르푸르 위기의 원인과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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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푸르 분쟁의 기원은 1970년대 이후 경제 위기와 오랜 가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 세계 경제 위기가 수단을 강타했다. 외채가 엄청나게 늘어 정부 지출의 절반이 외채 상환에 쓰일 정도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978~88년에 수단의 파운드 화를 무려 여섯 번이나 평가 절하했다. 수단의 1인당 GDP는 1978년 4백68달러에서 1984년 2백88달러로 급락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르푸르에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그 전까지 다르푸르의 아랍계 유목민들과 푸르족 흑인 농민들은 상호보완적인 경제를 이룬 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아랍계 유목민들은 사하라 사막 남쪽 초원 지대를 주기적으로 이동하며 푸르족 농민들의 곡식을 사고, 푸르족이 만든 제품들을 사서 시장에 내다팔고, 추수가 끝난 그루터기의 풀을 낙타에게 먹일 수 있었다. (다르푸르는 ‘푸르족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뭄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가뭄과 사막화 때문에 물과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푸르족 농민들은 유목민들의 이동로를 폐쇄했고, 유목민들은 초원 지대를 찾아 더 멀리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유목민들과 농민들의 충돌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데도 수단 정부가 다르푸르의 절박한 위기를 외면하고 무시하자 대중의 분노가 쌓였다.
하지만 수단의 중앙 정부가 처음부터 아랍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989년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시르와 투라비는 처음에는 다르푸르의 아랍인들을 편들지 않았다. 일부 언론의 보도와 달리, 다르푸르 주민들은 아랍계 유목민이든 흑인 농민들이든 모두 무슬림이다.
수단 중앙 정부에서 아랍 우월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게 된 것은 1999년에 아랍계인 바시르가 이슬람주의자인 투라비를 축출한 뒤였다. 투라비가 쫓겨났을 때 다르푸르의 많은 비(非)아랍계 무슬림들은 투라비를 편들며 정의평등운동(JEM)을 결성했다.
무슬림
더 큰 반군 단체인 수단해방군(SLA)은 아랍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투쟁을 남부의 기독교도-다신교도의 투쟁과 연결시키기 위해 아프리카 정체성 노선(모종의 흑인 민족주의)을 채택했다. SLA의 핵심 세력은 남부의 수단인민해방군(SPLA) ― 미국의 지원을 받는 ― 에게 군사 훈련을 받은 다르푸르인 1천5백 명이다.
이들은 케냐와 우간다뿐 아니라 차드와 에리트레아의 원조도 받는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동맹이다.
이 반군들이 2003년 2월 정부 시설들을 공격하며 다르푸르 분쟁의 포문을 열었다. 정부는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를 앞세워 반군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 인종 청소를 저질렀다.
다르푸르의 평화와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수단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들을 모두 지지하면서, 미국이나 유엔의 개입이 아니라 수단의 외채 탕감, 수단 난민의 미국이나 유럽 이주 허용 등을 요구해야 한다. 또, 수단에 폭탄이 아니라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조처들이 실행되게 만들려면 제국주의와 동맹이 아니라 대결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