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면제 무전현역”
〈노동자 연대〉 구독
“유전면제 무전현역”
황재민
키 179센티미터·몸무게 45킬로그램, 키 165센티미터·몸무게 41킬로그램.
잡지에서나 볼 법한 여자 모델의 몸매가 아니다. 몇 달 쫄딱 굶은 사람의 신체도 아니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옛 대법관인 이회창의 아들로 태어나, 초호화 빌라에서 자라 온 이정연·이수연 두 명이 스무 살쯤에 잰 신체 치수다.
이 둘은 ‘체중 미달’로 ‘병역 의무’를 피해 갔다. 1997년 대선 때 이회창은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거듭 부인하며, 면제받은 아들에게 소록도 봉사 활동을 시키는 쇼까지 부렸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시사저널〉 여론조사를 보면, 이회창의 아들이 “정당하게 면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채 안 된다(9.5퍼센트).
심지어 이회창 지지자들도 안 믿는다. 이회창 지지자 가운데 “정당했을 것”(18.5퍼센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부정이 있었을 것”(36.3퍼센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두 배 가까이 된다.
이회창은 신이다?
이회창의 처 한인옥은 병무청 직원의 소개로 전 국군수도병원 부사관 김도술에게 2천만 원을 건네며 아들 이정연의 병역 면제를 청탁했고, 국군 춘천병원 관계자를 통해 면제받았다. 그리고 1997년 대선 때 의혹이 불거지자 청와대, 국방부, 병무청, 국군 춘천병원 등 병역 비리 관련 기관이 모두 개입해 은폐 회의를 하고, 두 아들 병적기록부 등 공문서를 없애 버리거나 변조했다.
1997년 당시 야당과 언론의 주장에 따르면, 이회창의 친인척 병역 비리는 여럿 더 있다. 사위 최명석, 처조카를 포함해 처가 쪽 4명, 사돈 이봉서의 조카 등 모두 8명이다. 이 가운데 7명이 면제고, 한인옥 사촌 한 명은 호적상 1대 독자인데 2대 독자로 둔갑해 6개월 방위 소집을 받았다. 이른바 ‘호적세탁’이다.
당시 친인척 병역 대상자 20명 가운데 5명이 “아직 어리거나 연기중”이라고 했으니까 이회창 친인척 병역 면제율은 50퍼센트 가까이 되는 셈이다(일반인의 면제율은 2.5퍼센트). 군대 안 가고 면제받은 사람을 대개 ‘신의 아들’이라 부르는데, 이회창은 가히 ‘신’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지난 5월 〈오마이뉴스〉가 의혹을 제기해 새롭게 이회창 병역 비리가 불거졌다. 과거와 다른 점은 ‘병역비리업’에 여러 해 종사한 김대업이 폭로를 주도한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모든 힘을 ‘이회창 구하기’에 쏟고 있다. 김대업 씨에게 협박 전화를 거는 것은 물론, 전두환 군사정권의 후예답게 방송사에 병역 비리 보도를 “자제”하라는 ‘신보도지침’까지 서슴지 않는다.
유전면제 무전현역
이회창의 아들 병역비리는 거대한 실타래의 실마리일 뿐이다. 그래서 그 실타래를 풀고자 끝까지 잡아당기면 모두가 엮여 나온다.
의정하사관 출신으로 그 자신이 병역 비리를 알선하기도 한 김대업은 “(1999년 병무비리 민간수사팀 활동 때) 병역 비리에 연루된 고위층 인사 70∼80명의 명단을 작성”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12명, 민주당 1명, 자민련 2명 등 전·현직 의원 15명과 〈조선일보〉 등 언론사 사주 가족 3명이 포함됐고, 곧 증거(녹취 테이프)와 함께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니, “안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웬일인가? 사실 김대업의 말이 새로운 건 아니다. 지난해 반부패국민연대가 전·현직 의원 54명의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했고, 〈시사저널〉도 지난해 5월 면제받은 “고위층 아들 85명”의 명단을 밝힌 적이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당선한 광역단체장 16명 가운데 5명도 군대에 안 갔고, 2명은 아들이 군대에 안 갔다. 언론사주들도 이에 못지 않다. 언론사주 일가의 병역 면제율은 무려 50퍼센트다.
고위층들의 면제 사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생계곤란형 질병’들이 많다. 그 가운데 허리 디스크(수핵탈출증)는 병역 비리의 대표 질병으로 불린다. 필름 바꿔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병역 비리의 ‘몸통’으로 통하던 박노항도 이 수법을 많이 써먹었다. 현 전남도지사 박태영이 면제된 사유는 ‘야맹증’이다!(〈시사저널〉 2002년 9월 5일자.)지난 1998년 5월 전 육군본부 원용수 준위 사건 뒤로 여러 차례 검찰이 병역 비리 사건을 수사했지만 모두 용두사미로 끝났다.
1998년 원 준위 사건은 주범 박노항이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질질 끌었다. 그런데 박노항이 기무사·헌병대의 도움으로 3년 동안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박노항은 2001년 4월에 검거됐지만, 10월 군·검 합동 수사반은 ‘대어’는 모두 그대로 둔 채 ‘송사리들’만 잡아들였다.
얼마 전 김대업은 “(1999년 9월 당시) 군 내부 병무비리 특별 수사팀(3차)의 총사령탑 김인종 중장이 아들의 병역 비리를 감추기 위해 발족 2개월 만에 수사팀을 해체”한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또, 2차(1999년 5∼7월) 수사팀장이었고, 3차 수사팀에서 일반팀장을 맡은 대령 고석도 수사 기간 중 한인옥에게 돈을 받은 김도술의 진술서까지 받았지만 수사 결과를 은폐했다.
지금 검찰의 이회창 병역 비리 수사도 마찬가지 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야, 언론사주, 재벌 등 모든 지배자들이 얽혀 있는 비리의 실타래를 현 정권의 검찰이 풀 리가 없다.
지배자들의 ‘병역 의무’에 비해, 노동자·서민이 짊어진 ‘병역 의무’는 어떠한가. 하루에 한 명 꼴로 자살 또는 타살로 죽고, 해마다 6천여 명이 정신질환을 앓는다.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인 이유로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철창’행이다. 지금 감옥에 수감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1천6백여 명에 이른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밝혀 낸 허원근 일병 자살 조작 사건은 ‘무전현역’의 가장 처참한 비극을 보여 준다.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사건은 우리 사회의 계급 불평등을 밝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걸핏하면 ‘신성한 국방 의무’를 외치면서도 자신들은 빠져나가는 이 위선자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병역 사기꾼들이 사회의 지도층 행세를 하는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