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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불가능한 몽상인가?

실현 불가능한 몽상인가?

정병호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자, 기성 언론들이 검증에 나섰다. 1997년 대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1997년 당시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여타 군소 후보들과 함께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물론, 여전히 민주노동당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강력하다. 권영길 후보는 주요 언론사 토론에 기껏해야 세 번 참석할 수 있었다. 언론 보도는 여전히 인색하다. 또, 얼마 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민주노동당을 겨냥한 선거법 개악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성 언론들도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1백34만 표를 얻으며 일약 제3당이 된 민주노동당을 완전히 외면하기는 어렵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민주노동당의 선거 강령을 공격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거의 모든 토론에서 패널들은 노무현과 권영길 후보가 연대할 것인지 아닌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사실상 이들은 은근히 중도 사퇴를 종용하는 듯하다.

물론,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 중 일부가 노무현과 연대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집권해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로 복귀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우익 정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회창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 해도 그 시도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회창의 냉전·수구 정치는 대중 투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

권영길 후보도 이 점을 잘 주장했다. “이회창이 대통령 돼서 공안 정국 온다고 해도 우리 시민들이 거기에 굴복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회창 씨가 그렇게 나가면 정권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6개월은 봐주겠지만 그 다음은 용서 없지요.”(《말》 10월호.)

노무현에게 기대서는 이회창을 제압할 수 없다. 노무현은 김대중이 그랬듯이 우익에 일관되게 맞서지 못하고 흔히 타협한다. 특히, “시장주의자” 노무현은 시장 개혁 과정에서 노동 계급을 공격할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도 “시장 개혁이 불철저한 게 문제”라고 거듭 강조했다(10월 12일 KBS 심야토론). 이 때문에 노무현과의 연대는 우익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 ― 노동계급 ― 을 무장 해제시킨다.

권영길 후보는 옳게도 노무현과의 연대를 거부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한 민주당의 후보인 노무현 후보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권영길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9월 26일 MBC 100분 토론.)

부자 세상에 대한 도전

노무현과 민주노동당이 함께할 수 없다는 점은 최근 발표한 민주노동당의 선거 강령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무상교육, 무상의료, 공공주택 확대 등을 요구하는 강령을 내걸었다. 이 공약은 지난 50년 동안 노동자·서민들이 품어 온 열망을 압축해 표현한 것이다. 또한 권영길 후보는 이 공약을 실현할 방안으로 재산이 30억 원 이상인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유세 강령에 대해 토론회 패널들은 하나같이 “성장을 생각하지 않는 분배 위주의 정책”이라며 비난했다. 이들은 마치 노동자들의 분배 요구 때문에 경제 위기가 도래하는 것처럼 매도했다. 그러나 기업들 간의 경쟁 격화로 인한 과잉 축적이야말로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다.

지금껏 IMF 경제 위기의 책임을 져야 할 기업주들은 전혀 “고통 분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자·민중이 희생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빈부격차는 더욱 커져, 도시가구 소득의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20퍼센트의 소득 격차는 1996년 3.3배에서 2001년에는 5.4배로 증가했다.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강령은 정당하다. 항상 기업주들은 경제가 잘 되면 분배가 보장될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거짓 약속에 불과하다.

토론회 패널들은 “조세 저항” 때문에 부유세 강령이 “현실성”이 없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노무현도 “[부유세를] 인정하지 않는 국민들이 많은 것으로 예상돼 저항이 매우 클 것으로 본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부유세 도입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결코 다수가 아니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국민의 72.1퍼센트가 부유세 도입을 찬성한다. 부유세 도입에 저항할 세력들은 소수의 부자들이다. 결국 노무현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무서워 부유세를 반대하는 셈이다.

물론 기득권 세력은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경제적 부와 물리적 힘 그리고 이데올로기 유포 수단을 독점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권력을 자신들이 소유한 막대한 부를 지키는 데 쓰려 한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조직적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선 강력한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권영길 후보는 대중 투쟁을 강조하기보다는 부자들도 “[부유세를] 받아들일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는 식으로 부자들의 도덕에 호소하는 인상을 주었다(9월 26일 MBC 100분 토론).

한편, 권영길 후보는 “미국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두 여중생이 살해됐을 때, 기성 정당의 어느 후보도 미국에 항의하지 않았다.

반면에,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동당이 왜 미국에 반대하는지 분명히 주장했다. “저희들이 미국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미국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경제를 IMF를 내세워 예속경제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10월 4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권영길 후보는 노무현과 달리 주한 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 투쟁

이밖에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군병력 20만 명 감축, 복무 기간 18개월로 단축, 모병제 실시 그리고 남북한 상호 군축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 넉달이 넘게 싸우고 있는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옹호하고, 공무원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촉구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내건 선거 강령은 기성 정당의 후보들이 도무지 대변하려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실현 불가능한 몽상이 아니다. 이 사회에는 이미 모든 국민이 적절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가 존재한다. 문제는 극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너무나 많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선 기업주들의 이윤과 부자들의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주들의 이윤 추구, 부자들의 탐욕, 초강대국 미국의 패권 때문에 체제 내의 진지한 개혁 시도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들은 조그만 개혁 조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개혁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의회적 방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개혁을 쟁취하기 위한 변혁적 대중 투쟁.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선거 강령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길이다. 김영삼을 꼬꾸라트린 1997년 1월 파업과 같은 대중 투쟁만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좌절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