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운동의 성공을 위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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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운동의 성공을 위한 주장
이수현
지금 전 세계 반전 운동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 9월 28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는 40만 명이 참가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15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미국에서도 10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이런 반전 시위와 운동은 더욱 확산될 것 같다.
그러나 운동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운동 내부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종파주의는 당연히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정치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를 흐려 버리거나 회피해서도 안 된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반자본주의 운동을 건설한 프랑스 좌파들은 작년 9·11 사태 뒤에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생각의 혼란 때문에 대중적인 반전 운동을 건설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반동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양비론적 태도를 취했다.
〈한겨레 21〉 425호에서 “9·11 테러는 이익과 권력의 독점을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제국 중심부의 가학성과 그 대항 과정에서 제국에 의해 정신적으로 유린당한 주변부의 피해망상증이 충돌한 결과”라고 주장한 〈당대비평〉 편집위원 권혁범 교수의 태도도 마찬가지 양비론이다.
이런 양비론적 태도로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동적 요소가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지만, 2백여 년 동안 중동을 억압하고 지배해 온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 저항 운동의 표출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억압자의 폭력과 피억압자의 해방을 향한 몸부림을 똑같이 비난할 수는 없다. 이 점을 강조한 영국의 전쟁중지연합은 유력한 이슬람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반전 운동에 끌어들였고 이번에 4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다.
양비론
또, 평화주의 문제도 있다. 물론 우리는 위선과 기만에 불과한 지배자들의 ‘평화주의’와 보통 사람들의 평화 애호 정신을 구분한다. 지배자들은 “테러”나 “폭력 시위”를 비난하면서 늘 평화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국가라는 억압 기구를 통해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 또, 그들 자신이 폭력을 사용할 때는 태도가 돌변한다. 그래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도 서해 교전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확고한 안보 태세”를 위해 북한 병사들을 많이 죽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지배자들도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그들의 목표를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장 강도가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남의 물건을 강탈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보통 사람들의 “평화주의”는 그 열망이나 이상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들의 염원과 소망을 십분 공감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공통의 기초 위에서 아주 우호적이지만 날카롭게 그들의 비현실성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과 함께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에서 평화주의는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이라며 일체의 폭력을 거부한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 같은 추상적·절대적 도덕에 호소하고, 계급 투쟁이 아니라 인류에 호소한다. 예컨대, 1980년대 영국 반핵군축운동(CND)을 주도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E P 톰슨은 핵무기가 계급 이익과 무관하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핵무기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을 낳는 체제를 없애기 위한 계급 투쟁을 고무할 것이 아니라 사회 최상층부터 밑바닥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합리적 대안”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류 자체가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 집단, 즉 계급으로 분열해 있다. 따라서 추상적인 인류에 호소하는 것은 결국 양대 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집단, 즉 중간 계급에게 호소하게 된다. 이 때문에 중간 계급이야말로 평화주의의 진정한 계급적 기반이다.
또, 합리성이 판단의 기준이라면, 자본주의는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자동차가 너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해고되는 반면, 정작 차가 필요한 사람들은 남아도는 차를 보면서 한숨을 짓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평화주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수단이 노동자 연대를 해치지 않는 한은 목적 ― 계급 억압·전쟁·불의가 없는 사회 ― 이 수단 ― 피착취·피억압 계급의 대중 행동(어쩔 수 없이 폭력의 사용이 포함되곤 하는) ― 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폭력이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예컨대 미국의 남북 전쟁, 베트남 전쟁).
또, 일부 평화주의자들은 폭력이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우리 안의 파시즘”). 그러나 도망친 노예를 잡기 위한 노예 주인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오히려 정당하다. 끊임없는 억압에 맞서서 끈질기게 저항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피억압 대중에게 도덕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다.
반자본주의와 반전
작년에 9·11 테러가 터지자 미국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조합원 수만 명을 시애틀 시위에 동원한 노동총연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AFL-CIO)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비정부기구(NGO)들도 대개 부시가 벌이는 전쟁에 침묵했다. NGO와 노조 지도자들은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이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의 이면에는 전쟁이 이 체제의 정상적인 작동 방식에서 약간 일탈한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위대한 군사 전략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은 다른[폭력적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그리고 “정치는 응축된 경제”다. 오늘날의 전쟁은 국가와 결합된 자본의 경쟁이 격화돼 국민국가 간 군사적 충돌로 폭발한 것이다. 부시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군사적 표현”인 셈이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전 “평화 시기”를 그리워하며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평화적’ 시기도 주요 국가의 국민 대다수, 식민지와 후진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착취·억압·고통·공포로 점철된 시기였다.
당시 소수 열강이 전 세계를 분할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오늘날 IMF는 그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이런 경제적 무기는 군사적 무기와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
반전 운동
작년 9·11 이후 우리는 한국에서도 반전 운동을 건설했다. 그러나 대규모 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 주된 이유는 프랑스의 반전 운동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요인, 즉 좌파의 정치적 약점 때문이다. 남한 내 최대 좌파인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시야가 좀체 한반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반미 투쟁을 통일 운동에 종속시키려는 전략이 커다란 문제다.
대학생 총궐기 대회 준비 과정에서 한총련은 “이라크” 전쟁을 쟁점에서 제외하려 했다. 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는 대화 국면에서 대중적인 반미 투쟁은 화해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다며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 항의 투쟁에 소극적이었다. 민족주의 시각으로는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을 일관되게 수행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전쟁반대·평화실현 공동실천’에 속한 일부 좌파나 시민사회단체 들의 평화주의적 또는 양비론적 태도 역시 대규모 반전 운동 건설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모든 국가간 폭력에 반대한다”거나 “전쟁도 나쁘지만 테러도 나쁘다”는 식의 “공평 무사한” 태도로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적극 나설 수 없다. 일부 단체들은 지난 10월 8일 반전 행동도 “테러리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행사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반전 행동 사전 준비 모임에 줄곧 참석하다가 행사 전날 돌연 독자적인 기자 회견을 감행한 민중연대의 엘리트주의 같은 행태 역시 우리 운동 내의 정치적 신의를 깨뜨려 반전 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힘들게 한다.
시민 단체들 사이의 최대 쟁점은 반전 운동에 “반미”를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다. 그러나 지금 남한의 반미 감정이 드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전 운동에 반미를 결합시키는 것이 분명히 운동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반전 운동 내부의 이런 토론과 논쟁은 궁극적으로 노동자 대중 운동과 만나야 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베트남 반전 운동의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1963∼64년에 시작됐다. 그러나 10만 명씩 참가한 대규모 시위는 1967∼68년에야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반전 운동이 다른 쟁점들과 연결된 게 계기였다.
예컨대 1968년 프랑스 학생 운동은 1천만 노동자 총파업과 만났고, 이탈리아에서 1967∼1968년의 학생 운동은 1969년의 노동자 투쟁(“뜨거운 가을”)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은 각국에서 되풀이됐고 1974∼1975년의 포르투갈 혁명까지 지속됐다. 미국의 베트남 반전 운동은 인종 차별에 맞선 흑인들의 저항과 결합됐다. 반전 운동과 흑인 항쟁의 결합이야말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미국 지배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요인이었다.
지금 영국의 반전 운동은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것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노동조합 지도부에 좌파들이 진출하고 있고, 영국 노총(TUC) 총회에서는 반전 결의안이 통과됐으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10월 31일 또 한 번 대규모 반전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물론 우리 나라 노동계급 의식의 전반적인 수준이 의회나 선거 또는 기성 정당들의 부패 등 협소한 정치 쟁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전 운동과 조직 노동자 운동이 단기간에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위한 부단한 노력, “현실의 한 스텝, 한 스텝”(엥겔스) 밟기를 포기한다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아예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의 집을 지금 지을 수는 없지만 미래의 집을 위해 벽돌을 쌓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