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추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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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아메리카나는 끝났다. 베트남과 발칸반도에서 중동과 ‘9·11 사태’에 이르기까지 도전들은 미국의 주도권에 그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배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저항하여 점차적인 몰락을 급속하고 위험천만한 하강으로 바꾸어 놓을 것인가.
미국이 몰락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주장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이를 믿는 사람들이란, 몰락을 회복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소란스럽게 주장해 대는 미국의 매파 뿐이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끝났다는 믿음은, 2001년 ‘9·11 사태’로 인해 모든 이들에게 미국의 취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상, 지난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세계적 권력은 황혼에 이르렀다. 더욱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이러한 황혼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소위 ‘팍스 아메리카나’가 쇠퇴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20세기 특히 마지막 30년 동안의 지정학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단순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바지했던 바로 그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요소들 때문에 미구에 닥쳐 올 미국의 몰락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헤게모니의 서곡
미국은, 1873년 세계 불황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과 독일은 세계 시장에서 비중 있는 두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성장의 대부분은 영국 경제의 쇠퇴를 밑천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과 독일은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방금 막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성공적으로 종결시켰고, 독일은 통일을 이뤄냈고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시켰기 때문이다. 1873년부터 1914년까지, 미국과 독일은 선도 산업에서 주요한 생산국이 되는데, 미국은 철강과 이후의 자동차 산업, 독일은 산업 화학 분야가 그것이다.
역사책은, 1차 세계대전이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이며 2차대전은 1939년 발발해서 1945년 종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을 미국과 독일 사이에서 벌어진 하나의 연속적인 ‘30년 전쟁’이라고 보는 게 더 이치에 맞다. 30년은 여러 차례의 휴전과 지역적 규모의 분쟁들로 점철되어 있다. 헤게모니 승계를 위한 경쟁은 1933년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맞게 된다. 나치는 독일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서 세계 체계를 초월하려는 갈망을 드러내는데, 당대 체계 내에서의 헤게모니 획득이 아닌 전 세계적 제국의 형태를 구축하려 시도한다. 나치의 슬로건이었던 ‘천년제국(ein tausendjahriges Reich)’을 상기해 보라. 이와 달리 미국은 중도적인 세계 자유주의의 옹호자 역할을 자임하면서―전직 미 대통령 루스벨트의 ‘네 가지 자유’(언론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빈곤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떠올려 보라―독일과 그 연합국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소련과의 전략적인 동맹을 맺게 된다.
2차 대전은,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유라시아를 통틀어 기간 시설과 사람들 모두에게 막대한 파괴를 초래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상처에서 면제받지 못하였다. 이런 피해를 입지 않고 떠오른 유일한 산업대국이 미국이었고, 더 나아가 경제적 관점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으며, 재빨리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하지만 떠오르는 패권 국가는 몇몇 실질적인 정치 장애물에 직면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국들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에 대항하는 데 연합하였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제연합’을 건설하는 데 합의했던 것이다. 이 기구의 결정적인 특징은 ‘안전 보장 이사회’였는데, 무력 사용을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다. UN 헌장에서 5개국―미국과 소련 포함―에 거부권을 부여했으므로, 안전 보장 이사회는 실질적인 위력이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 지정학의 한계를 규정했던 것은, 1945년 4월 UN의 창설이 아니라 두 달 전에 이뤄진 루즈벨트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그리고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사이에 이뤄진 얄타회담이었다.
얄타회담의 공식적 합의는 비공식적인, 즉 얘기되지 않은 합의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 얘기되지 않은 의견 일치는, 미국과 소련의 향후 수년간의 행보를 관찰한 후에라야 평가할 수 있다. 1945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이 종결되자 소련과 서구연합군(즉, 미국, 영국, 프랑스 병력은 특정 장소들, 특히 ‘오데르 나이세 선(Oder-Neisse Line)’이라 불리게 되는 유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몇 가지 사소한 조정을 제외하면 그들은 거기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얄타회담은, 양측 모두 거기에 머무를 권리를 보장하고, 더불어 상대방을 몰아내기 위해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합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암묵적 합의는 아시아에도 적용되는데, 이는 한국의 분단과, 일본을 미국이 차지한 것에서 드러났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볼 때 얄타회담은, 소련이 세계의 1/3을, 그리고 미국이 그 나머지를 지배하게 되는 현상에 대한 합의였던 것이다.
워싱턴은 더 심각한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다. 소련이 세계 최고의 지상 병력을 보유하게 된 반면, 미국 정부는 군사력을 축소하라는 국내의 압력, 특히 징병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지상 병력이 아닌 핵무기(이들을 배치할 수 있는 공군력의 증강도 포함하여)의 독점을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독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1949년에 소련 역시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이후로 미국은 또 다른 열강이 핵무기(화학무기와 생물무기 역시)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아야 했다. 결국, 이런 노력은 21세기 들어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1991년까지,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공포의 균형’ 속에 공존해 왔다. 이런 현상이 심각한 시험에 빠진 것은 단 세 번이다. 1948년에서 1949년까지 있었던 베를린 봉쇄,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벌어진 한국전쟁, 그리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것이다. 각각의 결과로 공존 현상은 다시 복원될 뿐이었다. 더욱이, 소련이 그 위성 국가들의 정치적 위기 ―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1981년 폴란드 ― 에 직면할 때마다 미국은 선전 활동 외에는 개입하지 않으면서, 소련이 마음대로 행동해도 이를 방조했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수동성이 경제적 영역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국은 대규모의 경제적 재건설을 이루기 위해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이후에는 일본(남한과 타이완도 마찬가지)에서 냉전 분위기를 이용했다. 그 근거는 분명하였다. 세계 전체에서 유효 수요가 집적되지 않았다면 미국이 그토록 압도적인 생산력의 우위를 차지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아가 경제적 재건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국가들로 하여금 후견 국가의 의무 사항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런 의무감은 군사적인 동맹으로 기꺼이 편입하거나, 더 중요하게는, 정치적인 굴종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지닌 이데올로기적이고 문화적인 구성 요소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1945년 직후의 시기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인기는 역사적으로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우리는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핀란드 같은 나라의 자유 선거에서 공산당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쉽게 잊고 있다. 남미 전역과 아시아(베트남, 인도, 그리고 일본)의 공산당 지지자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그리스, 그리고 이란과 같이 자유 선거가 부재했거나 제한됐지만 공산당이 여전히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지역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이에 답하여, 미국은 거대한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유지했다. 돌아보면, 이 공세는 대개 성공적이었다. 소련이 ‘진보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진영에서 지도자 지위를 다진 것만큼, 워싱턴은 최소한 효과적으로 ‘자유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둘, 다수의 베트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 미국은 헤게모니 쟁취에 성공하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의 헤게모니가 소멸되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은 네 가지 상징으로 이해된다. 베트남전, 1968년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2001년 9월 테러 공격이 그것이다. 각 상징은 각기 그 이전의 사건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지는데, 미국이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상황 속에서 정점에 달하게 된다. 그것은 진정한 권력이 결여된 외로운 절대 권력, 누구도 따르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세계 지도자, 그리고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지구적인 혼란의 와중에 위험하게 표류하고 있는 국가를 말한다.
베트남전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선은, 베트남인들이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고 그들 자신의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 일본인, 미국인과 싸웠고, 결국 이겼다. 이는 실제로 대단한 성취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제3세계라 이름 붙여진 민중들에 의해 행해진 ‘얄타 현상유지 체제’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이 싸움에 전체 군사력을 쏟아 붓고도 패배했을 만큼 워싱턴은 어리석었고, 그로 인해 베트남은 하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실상,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고(근시안적 우파 그룹이 오랫동안 비난했던 그 결정), 만약 사용하였더라면 얄타 합의의 기저를 흔들어놓을 뿐 아니라 핵무기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꼴이 되었을 것이며, 그런 모험적 결과를 미국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단순히 미국의 군사적 패배나 망신만은 아니었다. 이 전쟁은 세계경제에서 주도적인 힘을 유지하던 미국의 능력에 결정타를 날렸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렀고, 1945년 이후 풍부했던 금 보유고의 대다수를 써버렸다. 더욱이 미국은, 서유럽과 일본이 같은 기간 동안 엄청난 경제적 약진을 이룬 그 순간에 그런 대가를 치렀다. 이런 조건들이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독보적인 지위를 종식시켰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바로 이 3자 관계의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되었고, 특정 기간 동안은 한 국가가 다른 두 국가보다 나았으나 어느 한 나라도 나머지 국가들을 완벽하게 따돌리지는 못하였다.
1968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에서 늘 베트남인을 지지한다는 수사가 주요한 구호로 떠올랐다. ‘하나, 둘, 다수의 베트남들’, ‘호, 호, 호치민’이라는 구호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거리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68세대’들이 미국의 헤게모니만을 비난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미국과 공모한 소련을 비난했고, 얄타회담을 규탄하였으며, 세계를 두 개의 진영, 즉 두 개의 절대 권력 대 전 세계 나머지 국가들로 나누었던 중국 문화혁명의 언어를 채택하고 사용하였다.
소련의 공모에 대한 탄핵은 소련과 밀접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들의 세력에 대한 고발과 논리적으로 이어졌다. 이는 대다수 전통적 공산권에 대한 비난이었다. 68혁명 세력들은 구좌파의 다른 요소들―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뉴딜 민주당―에도 혹평을 퍼부었는데, 혁명세대가 총칭 ‘미국 제국주의’라고 명명한 것과 공모한 혐의로 비난을 던졌던 것이다.
소련과 워싱턴의 연합에 대한 공격에다 구좌파에 대한 비판은, 미국이 세계 질서를 창출한다는 데 합의했던 얄타회담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유일하고 정당한 전 세계적 이데올로기라는 중도 자유주의의 입장을 훼손시켰다. 1968년의 세계적 혁명이 가져온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는 미미했지만, 그 지정학적·지적 반향은 거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권좌를 차지했고, 보수와 급진을 담합시켰던 중도 자유주의가 위력을 잃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전 영역에서 실제적인 선택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보수주의자들로, 급진주의자들은 급진주의자들로 자리를 굳혔다. 중도 자유주의자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수가 줄었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적 입지―반파시즘, 반공산주의, 반식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보다 희미해지고 설득력을 잃어갔다.
힘 없는 초강대국
1970년대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기침체는 미국의 권력에 두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경기 침체는 당시 집권 구좌파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주장이었던 ‘개발주의’―국가가 적절한 개입을 한다면 모든 국가는 경제적으로의 성장할 것이라는 개념―를 붕괴시켰다. 구좌파 정권들은 하나 둘 내적 혼란에 직면하였고, 생활수준의 하락을 보았으며, 국제 금융 기구에 대한 채무 의존도를 증가시켰고, 신뢰성을 침식시켰다. 1960년대 미국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여겼던 제3세계 탈식민화―개발주의적이지만 혁명적이지는 않은 세력들이 거의 분열을 겪지 않고 최대한 부드럽게 정권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던―는 질서 붕괴, 끓어오르는 불만, 감당할 수 없는 급진적 정서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미국은 이에 개입하려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83년,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레바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미군은 사실상 레바논에서 쫓겨났다. 이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레이건은 군대 없는 국가인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 대통령 조지 H W 부시는 또 다른 군대 없는 국가인 파나마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부시가 소말리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한 이후, 미국은 다소 불명예스럽게 사실상 쫓겨났다. 미국 정부는 몰락해가는 헤게모니의 흐름을 복원하기 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을 무시하는 쪽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해 2001년 9월 11일까지는 퇴각하는 정책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진짜 보수주의자들이 주요 국가들과 국제 기관들의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 대처와 레이건 재임,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등장함으로 인해 1980년대는 신자유주적인 공세로 점철된다. 한때(한 세기 이상) 보수주의 세력이 스스로를 보다 현명한 자유주의자로 조명하려고 시도했던 곳에서 이제 중도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좀더 효율적인 보수주의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보수주의의 프로그램은 분명했다. 국내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노동 비용을 줄이고, 생산자들에 대한 환경 규제를 최소화하며, 국가의 복지 혜택을 삭감하는 정책을 법제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렇다할 성과가 거의 없자, 보수주의자들은 더욱 강력하게 국제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다보스에서 있었던 ‘세계경제포럼’ 회합은 엘리트와 미디어 사이에 만남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IMF는 각국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 인사들의 클럽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창립해서 국가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 무역의 흐름을 강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미국이 주목하지 않는 동안 소련은 붕괴하고 있었다. 그랬다.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에 ‘악의 제국’이라는 악명을 덧씌웠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호소하는 미사여구를 남발했지만 미국이 이를 정말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물론 소련의 붕괴에도 책임이 없다. 사실상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구좌파에 대한 대중적 환멸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얄타 체제를 청산하고 국내에서 자유화 조치(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제도화해 정권을 유지하려 애쓴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얄타 체제를 청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소련을 구하지는 못했다(거의 구할 뻔했지만 결국은 그러지 못했다).
미국은 소련의 갑작스런 붕괴에 놀라고 당황하여,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불확실한 상태였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대상이 소멸된 것이다. 겉으로는 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했던 세력도 그런 정당화 논리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당성의 상실은 즉각 이라크의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으로 이어졌다. 얄타 체제가 그대로 지속되었더라면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감히 이런 시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걸프전에서 미국이 이뤄낸 휴전은 전쟁 전과 똑같은 경계선을 짓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패권 국가가 중동 지역의 한 평범한 국가와 벌인 전쟁에서 무승부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후세인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도 무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후세인의 당돌한 도전은 베트남전의 실패보다 더한 방식으로, 특히 매파라고 알려진 미국의 우파들의 내장을 갉아먹었다. 그들이 현재까지도 이라크를 공격해 후세인 정권을 파괴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걸프전과 2001년 9월 11일 사이, 주요한 국제적인 갈등이 벌어진 두 곳은 발칸반도와 중동이었다. 미국은 두 지역에서 외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돌아보면, 미국이 완벽하게 고립주의 입장을 취하였더라면,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발칸반도에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다민족 국가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했고 결국엔 여러 국가들로 갈라졌다. 10년 넘게 이 국가들은 인종 청소(ethnification)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 끔찍한 폭력과 인권 침해, 노골적인 전쟁을 경험했다. 미국이 주도한 외부 개입으로 휴전이 성사되고 가장 끔찍한 폭력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그 개입은 인종 청소를 결코 역전시키지 못했다. 인종 청소 결과는 이제 확실히 굳어졌고 다소 정당화됐다. 만약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런 분쟁들이 다른 결말을 맞았을까? 폭력은 좀더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기본적인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동의 그림은 훨씬 더 냉혹하다. 미국이 훨씬 깊게 개입했는데도 실패는 보다 두드러졌다. 발칸에서든 중동에서든 미국은 헤게모니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는 의지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락한 매파
그리고 ‘9·11 사태’가 터졌다. 충격과 반응이 있었다. 미국 의회에게 비난 세례를 받은 중앙정보국(CIA)은 부시 행정부에 가능한 위협들을 이미 경고했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CIA가 알 카에다에 초점을 맞추고 정보기관의 전문적인 판단을 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스트의 공격 실행을 미리 예측할 수는(그리하여 방지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CD 국장 조지 테닛은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증언이 미 정부와 미국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가들이 어떤 식으로 다른 판단을 내리건 간에, 2001년 9월 11일의 공격은 미국의 권력에 중대한 도전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커다란 군사적 세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국가 군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한 약소국에서, 강력한 과단성과 약간의 돈, 헌신적인 추종자 무리, 그리고 강한 기반 정도를 지녔을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 군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땅에 대담한 공격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조지 W 부시는 클린턴 정부의 해외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부시와 그의 참모들은 클린턴의 방식이 제랄드 포드에서 시작하여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까지 포함한 모든 미국 대통령들의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려(분명 알고는 있겠지만) 들지 않았다. 그 방식은 현재 부시 행정부가 9월 11일 이전까지 택하였던 방식이기도 했다. 2001년 4월 부시가 중국에 추락한 미국 정찰기 반환 문제를 처리한 방식만 보아도 신중함이라는 것이 이 게임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의 공격 이후에 부시는 진로를 변경해서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미국민들에게 “결과는 명백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면서, 세계에 “미국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선포하였다. 가장 보수적인 미 행정부에 대해서조차 오랫동안 좌절감을 느껴 왔던 매파들이 마침내 미국 정책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매파의 입장은 분명하다.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휘두른다는 것. 수많은 외국의 지도자들이 워싱턴의 무력 사용을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미국이 그 뜻을 확고하게 세워 그들에게 강요한다면 꼼짝할 수 없을 뿐더러, 꼼짝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매파는 미국이 두 가지 이유에서 제국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첫번째는, 미국이 그렇게 해도 별 문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만약 워싱턴이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향후에 미국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매파의 입장은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맹공을 펼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교살하려는 이스라엘을 사실상 지원하며, 보도에 따르면 군사적 준비 단계에 있다는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는 것이다. 2001년 9월 테러리스트의 공격 이후 1년도 안 되어 그런 전략들이 어떤 성취를 이룰지를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지금까지 그 계획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 전복(알 카에다를 완벽하게 무장해제 시키지 못했고 지도자들을 생포하지도 못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엄청난 파괴(이스라엘의 샤론 총리의 말과 달리,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를 무력하게 만들지 못했지만), 그리고 이라크 침략 계획에 대해 유럽과 중동 지역 미국 동맹국들의 심각한 반대로 이어졌다.
매파는 최근의 사태들을 읽어내면서 미국이 취한 행동에 대한 반대가 심각하긴 하지만 대개 말로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서유럽도, 러시아도, 중국도, 사우디아라비아도 심각한 방식으로 미국과의 유대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달리 말해 매파는 워싱턴이 사실상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행동해 왔다고 믿는다. 매파는 미국 군대가 실제로 이라크를 침공해도, 그리고 그 뒤 미국이 이란, 북한, 콜롬비아, 인도네시아 등 세계 도처에서 권위를 행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매파의 판단이 주로 국제 좌파의 판단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국제 좌파는 미국의 정책들에 대해서 비명을 질러 왔다. 그 주된 이유는 미국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파의 해석은 틀린 것이고, 미국의 몰락에 이바지하게 될 뿐이며, 점진적인 하강을 훨씬 더 급속하고 격렬한 추락으로 바꿔버릴 것이다. 구체적으로, 매파의 접근방식은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인해 실패할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군사력은 미국의 가장 강력한 카드이자, 사실상 단 하나의 카드로 남아 있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공할 만한 군사 기구를 지니고 있다. 대항할 수 없을 만한 새로운 군사 기술을 개발했다는 최근의 주장이 믿을 만하다면, 현재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우세는 10년 전에 비해 월등히 낫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재빨리 정복하고는, 친미적이고 안정적인 정권을 들어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1945년 이후 미군이 치렀던 세 차례(한국, 베트남 그리고 걸프전)의 격렬했던 전쟁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하나는 패배하였고, 나머지 둘도 영광스러운 기록이라 할 수 없는 무승부로 끝났다.
사담 후세인의 군대는 탈레반의 군대가 아니다. 그의 내부 군대 장악은 훨씬 더 응집력이 있다. 미국의 침공은 반드시 심각한 지상 병력 투입을 필요로 할 것인데, 지상군은 바그다드로 진군하면서 싸워야 할 것이며 상당수의 사상자가 생길 것이다. 이러한 무력은 또한 부대 집결지를 필요로 할 텐데,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쿠웨이트나 터키가 도움을 줄 것인가? 워싱턴에서 현금을 모조리 동원하면 가능할지 모른다. 반면 사담 후세인은 모든 무기들을 총동원할 것이며, 어떤 위험하고 성가신 무기들이 동원될 지에 대해 초조해지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 정부쪽이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정권들을 강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 모든 일이 미국의 뿌리깊은 반아랍적 편견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영국 참모부는 토니 블레어 수상에게 이길 것 같지 않다고 명백하게 보고한 바 있다.
그리고 언제나 ‘두 번째 전선’이란 문제가 있다. 걸프전 이후 미국의 전군은 동시에 두 군데서 벌어지는 지역전의 가능성에 대비해 왔다. 얼마 후, 국방성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그 전략을 조용히 폐기하였다. 하지만 미군이 이라크전에 빠져있을 때, 또 다른 적군이 도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미국 국민들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을 참을 수 있는지의 문제도 고려해 보라. 미국인들은 전시에 모든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내는 애국적 열정과 뿌리깊은 고립주의 욕구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1945년 이후 애국심은 사망자 수가 늘어날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 지금의 반응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매파(대다수가 민간인 출신인)가 여론에 둔감하다 하더라도, 베트남전에서 당했던 미 육군 장성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제 전선은 또 어떤가? 1980년대 수많은 미국의 분석가들은 일본의 경제 기적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1990년대 일본 금융 부문의 어려움을 보고 진정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였는지 과장을 일삼던 미국의 권위자들도, 일본이 경제 지체로 한참 뒤쳐지자 이제 자기 만족과 자신감을 되찾은 듯 보인다. 요즘 워싱턴은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훈수하는 데 오히려 더 열 올리는 것 같다.
이런 승리주의는 별 근거가 없는 듯하다. 2002년 4월 20일, 〈뉴욕 타임스〉에 실린 다음 기사에 대해 생각 해보자. “한 일본 연구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기계는 미국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 20대의 자료 처리 능력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나고, 이전에 IBM이 만든 기종을 훨씬 앞지른다. 이번 성취는 대부분의 미국 엔지니어들이 손쉽게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술 경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분석은 다음 말로 이어진다. 두 나라는 ‘과학 기술을 응용하는 우선 순위’가 서로 다르다. 일본의 기계는 기후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미국 기계는 무기를 모의실험 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런 대조는 헤게모니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지배적 세력은 (손해가 있더라도) 군대에 힘을 쏟고,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경제에 정신을 쏟는다. 후자가 항상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미국도 그랬다. 일본도 똑같이 보상받지 말란 법이 있는가? 특히 중국과 동맹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있다. 지금 당장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매파의 전략에 들어갈 터무니없는 군사 비용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더욱이 워싱턴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매파의 입장이 합리적이라거나 지지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른 국가들은 워싱턴에 직접적으로 반기 들기를 망설이거나 꺼리고 있지만, 그들의 미온적인 태도 그 자체가 미국에는 타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거만하게 팔을 뒤트는 것에 그치고 있다. 오만은 반대 급부를 가진다. 현금을 동원한다는 것은 다음 차례에는 동원할 돈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퉁명스런 묵종은 원한만 늘릴 뿐이다.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은 상당한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신용을 획득해 왔다. 그러나 요즘 미국은 1960년대 금 보유를 탕진한 것보다 휠씬 빨리, 이런 신용마저 소진하고 있다.
미국은 향후 10년 동안 두 가지의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매파의 길을 따라서 매파를 제외한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부정성이 너무나 막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최근 〈가디언〉의 사이먼 티스덜(Simon Tisdall)은 국제적인 여론을 무시한다 해도 “미국이 혼자 이라크 전쟁을 수행한다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다. 특히, 경제적 이익과 에너지 공급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다. 부시는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힘은 못 쓰는 신세가 돼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이후 퇴각해야만 한다면, 더더욱 무력해 보일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선택은 극단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미국이 다음 10년 동안 국제적 문제들에 지니게 될 결정적인 힘은 점점 줄어들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저물고 있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미국이 품위 있게, 그리고 전 세계와 미국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권좌에서 내려오는 방식을 고안해 내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