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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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민, 급진적 운동가, 노동조합 운동가 수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세계무역기구(WTO)에 맞서 싸운 시애틀 시위 이후, 자본가들과 반자본주의자들 모두 “세계화”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체제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에게 그 낱말은 주로 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 같은 선진 공업국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궁핍화시킨 경제적 과정을 우아하고 간략하게 묘사한 말이다. 이것은 WTO·IMF·세계은행(WB) 같은 세계 금융 기구들이 행사하는 엄청난 권력을 편리하고 간략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금융 기구들은 채무국들에게 가혹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강요한다. 요컨대, 세계화는 무엇보다도 경제 용어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세계화에는 우연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군사적 차원이 있다. 사실, 세계화의 성공에는 이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미국과 주요 공업국들이 정치·경제 환경을 조성하면서 세계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휘두르는 국가 권력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미국과 주요 공업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착취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최근 말했듯이, “국제 금융 기구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획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국가 기구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그 결과 “주변부 국가들보다 중심부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서 더 강력한 구실을 하게 됐다”고 카갈리츠키는 지적한다. 그래서 IMF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15퍼센트의 투표권이 필요한데 미국은 17퍼센트의 투표권을 갖는다. 최상위 7대 공업국들인 G7이 모두 합쳐 결정적인 45퍼센트의 투표권을 갖는다. 미국은 WTO에 2백50명의 상임 대표단이 있는 반면, 35개 최빈국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사용은 궁극적으로 세계 금융 기구의 활동 무대에서 경제적·정치적 완력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권력의 사용은 경우에 따라서 군사적 위협과 군사력 사용도 수반한다. 〈뉴욕 타임스〉에 국제 문제에 관한 칼럼을 쓰는 토머스 L 프리드먼은 맥도날드가 있는 두 나라는 결코 싸운 적이 없다는 기발한 말을 했다. 그런 프리드먼조차도 “실리콘 밸리의 기술 [기업]들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지키는 보이지 않는 주먹을 미국 육군·공군·해군·해병대라고 부른다.” 하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가 없다면 세계화는 결코 작동할 수 없고, NATO가 없다면 IMF와 WTO는 번창할 수 없다.
세계화라는 용어가 비교적 새로운 것이긴 하지만, 그 말이 묘사하는 과정 ― 자본주의가 세계 규모에서 점차 국제화한 ― 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화는 맨 처음부터 국가 권력이나 제국주의의 등장과 서로 뗄 수 없이 연관돼 있었다. 이러한 연관의 역사적 근원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경제 위기 때 몰락한 중소기업들의 폐허 위에서 대기업들이 형성됐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국내 경쟁업체들과 경쟁하는 데서 더 유리했고 국내 시장에서 더 많은 점유율을 차지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기업들은 독점 기업들이 됐고 자기들의 경제적 비중을 이용해 자국 국가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은 점차 통합됐고, 독점 기업들이 자국의 국가적 한계를 벗어나 전 세계에서 새로운 시장·투자·원료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 국가의 정치적·군사적 자원은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요구를 전 세계에 강요했다. 제1·2차세계대전이라는 대량 학살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군사 대국의 부상과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그들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화가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제국주의적 전쟁 몰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논평가들은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의 진정한 결과가 더 안전하고 더 평화로운 세계일 것이며 시장을 통해 서로 연결된 세계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세계에서는 국경·국적·국가가 사라질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과 군사력 사이의 관계를 달리 보았을 법한 프리드먼조차도 자신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세계화의 현대식 버전은 … 전쟁을 피하려는 의욕을 증대시키고 현대 역사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전쟁 비용을 증대시킨다.” 하고 주장했다. 1996년 당시 WTO 사무총장이던 레나토 루지에로는 이런 주장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가 “세계화냐 전쟁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견해를 현실과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1990년대에는 주요 제국주의 전쟁이 두 차례 벌어졌다. 첫번째는 1991년 걸프전이고 두번째는 1999년 발칸 반도 전쟁이다. 두 전쟁 모두 그 기원을 파악하려면 세계화와 세계화를 뒷받침하는 국가 권력의 작용이라는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전쟁의 결과는 재앙이었다.
미국이 개입한 대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발단이 돼 미국 주도의 대규모 군사력이 걸프에 집결했고 뒤이은 살육전에서 이라크인 1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라크의 군사적 패배 이후 10년 동안 미국이 주도한 경제 재제 때문에 이라크는 궁핍해졌고 그 결과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때이른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사망자 수에 관한 질문을 받은 미국의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그 대가는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그토록 경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이라크를 경제적·군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고, 그와 함께 아랍 국가가 중동산 석유에 대한 서방의 통제권을 위협하거나 쉐브론·엑손·브리티시 피트롤리엄(BP) 같은 미국과 영국의 거대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막대한 이윤을 위협한다는 발상도 파괴하는 것이었다. 사실, 미국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치 권력 및 군사력과 다국적 자본의 경제력의 통합이 우리 시대 제국주의적 전쟁의 배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동일한 방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도 소련 제국의 붕괴, 그에 따른 다국적 자본과 미국 국가 권력의 동진이라는 더 광범한 맥락에서 떼어 놓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IMF 구조조정 계획이 러시아와 동유럽의 경제를 황폐하게 만들 때, 그리고 다국적 기업들이 이들 경제에서 더 수지맞는 부문들을 우려먹고 있을 때, 러시아의 재기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을 강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체코공화국·폴란드·헝가리가 NATO에 가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칸 반도에 있는 러시아의 동맹국을 짓밟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클린턴과 그 동맹국들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들먹인 온갖 인도주의적·도덕론적 미사여구 뒤에서 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주요 다국적 석유기업들이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 자원을 이용하는 것과 전쟁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석유를 발칸 반도를 통해 서방으로 수송할 필요 때문에 어떻게 그 지역을 군사적으로 평정했는지 하는 것들이다. 1990년대에 미국과 영국의 다국적 석유 회사들은 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 같은 카스피해 연안 나라들과 그루지야 같은 주변국들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이다. 1997년 9월 〈뉴욕 타임스〉는 “뮤추얼 펀드, 상품 선물, 기업 합병은 잊어라.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유럽의 통화, 태국 증시도 잊어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대규모 부(富)가 가장 집중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카스피해 바닥과 그 연안에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 지대다. … 서방의 안보 정책 입안자들이 이런 노다지의 전략적 의미에 매료되는 것은 석유회사 중역들이 자금 조달에 눈이 뒤집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하고 보도했다. 따라서 1999년 4월 워싱턴에서 열린 NATO 정상회담에서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몰도바·우크라이나·우즈베키스탄이 동맹을 결성한 것을 두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러시아를 배제한 채 그 지역의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99년 6월에 《사회주의 평론》은 존 리즈가 쓴 “NATO와 신제국주의”라는 제목의 글에서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발칸 반도를 지나는 파이프라인 사이의 연계 가능성을 처음으로 파헤쳤다. 그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조너선 프리드랜드는 〈가디언〉에 쓴 글에서 이를 모욕적인 말로 경멸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 전쟁이 석유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코소보에는 석유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그 동지들은 …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미국의 진정한 목적은 ‘카스피해의 석유’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카스피해]은 유럽 대륙의 거의 절반만큼 멀리 떨어진,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 사이에 박혀 있다는 사실은 무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1999년 6월 2일, 프리드랜드가 쓴 기사가 〈가디언〉에 실린 바로 그 날 미국 무역진흥청(US Trade and Development Agency : TDA) ― “미국 기업들이 해외 투자 기회를 찾을 수 있게 도와 줌으로써 미국인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독립적인 연방 기관” ― 은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를 가로지르게 될 발칸 횡단 파이프라인의 타당성 조사 자금의 일부를 지원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58만 8천 달러를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TDA 청장인 J 조우섭 그랜드메이슨은 “카스피해 지역의 에너지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경쟁이 격렬하다. … 이번 자금 제공은 카스피해 지역에서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한 … 의미 있는 진전이다.” 하고 말했다. 10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되는 발칸 횡단 노선은 터키를 경유하는 노선보다 3배나 쌀 것이다. 그 날 소피아에서는 불가리아 주재 미국 대사인 아비드 볼렌이 불가리아 부총리 예브게니 바카르졔프와 자금 제공 협정서에 서명했다. 그 다음 날인 1999년 6월 3일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NATO가 코소보에 개입한 동기가 발칸 주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과 서방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정학적·경제적 이익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NATO가] 그 지역에 [개입한] 결과도 재앙으로 입증되고 있다. 결국 인종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던 전쟁 때문에 코소보에서는 소수 세르비아계가 제거되고 단일 인종만 남게 됐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던 전쟁 때문에 코소보는 서방이 임명한 자의 통치를 받고 서방 군대에 치안을 내맡긴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그리고 발칸의 평화와 안정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던 전쟁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고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코소보해방군(KLA)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알바니아 민족주의라는 유령은 1999년 폭격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불러 낸 것이다. 그 유령은 지금 미국이 시도하는 바로 그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달에 〈파이낸셜 타임스〉가 썼듯이, “지금 발칸의 깨지기 쉬운 평화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알바니아 극단주의다.” KLA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한 알바니아 반군은 코소보 국경의 완충 지대에서 세르비아 경찰과 충돌을 거듭하고 있고, 인접 마케도니아에서 군대와 훨씬 더 폭발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큰 위험은, KLA의 성공에서 분명하게 배운 소수파 알바니아계와 다수파 세르비아계 사이의 전면적인 내전이다. 그 곳의 한 알바니아인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사람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배웠다.” 한편에는 석유 파이프라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또 다른 인종 재앙의 가능성이 있는 발칸 반도의 쓰라린 아이러니는, 이제 미군이 알바니아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사실뿐 아니라 NATO가 2년 전만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유고슬라비아 군대에게 코소보의 완충 지대에서 반군 소탕을 지원하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은 NATO의 코소보 개입이 이 지역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발칸 반도의 인종 분쟁을 훨씬 더 심화시키고 확산시켰을 뿐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
이와 마찬가지로 불길한 것은 NATO의 발칸 개입이 촉발한 군사력 증강이다. 지난 달 중국이 방위비 지출을 18퍼센트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파이낸셜 타임스〉는 “중국의 국방 정책 입안자들은 NATO의 코소보 개입으로 서방의 끈질긴 간섭 의도가 밝히 드러났다고 주장하면서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고 보도했다. 부시가 레이건 시절의 스타워즈(미사일 방어) 계획을 부활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제1차세계대전 때 러시아의 볼셰비크 니콜라이 부하린이 도달한 결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부하린은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장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전쟁 없이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혼란에 빠진 [영국] 신노동당은 세계화와 전쟁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뭐라고 주장하는가? 세계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신노동당의 가장 공격적인 전향자인 국제개발부 장관 클레어 쇼트가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다국적 기업들이 문제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 다국적 자본이 아프리카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자본이 아프리카 투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전쟁에 대해서는, 신노동당이 NATO의 동진, 유고슬라비아 전쟁, 끊임없는 이라크 폭격을 열광적으로 찬성하는 것을 보면 자명해진다. 따라서 조지 로버트슨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끈덕지게 옹호한 덕분에 귀족 작위와 NATO 사무총장직을 유지했다. [이것은] 노동당의 첫번째 지도자이자 잊혀진 영웅인 케어 하디가 제1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발표한 용감한 성명서와 전혀 딴판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유럽의 전쟁 위험이 이제 우리에게 닥쳐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전쟁을 고려해 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은 자기 나라 정부가 노동자들을 전쟁터로 내몰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 막아야 합니다. 런던과 모든 공업 중심지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를 벌입시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야만적인 세력의 지배를 끝장냅시다! 전쟁을 끝장냅시다! 민중의 평화로운 지배를 쟁취합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대안은 우리 지배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세계화냐 전쟁이냐”가 아니다. 그것은 1914년 하디가 맞닥뜨린 것과 동일하다. 즉, “전쟁이냐 사회주의냐” 하는 것이다. 신노동당이 편들고 있는 것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신노동당이 국내에서는 사기업화를, 해외에서는 세계화를 끈질기게 옹호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NATO의 확장과 미국 제국주의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의 일부다. 블레어의 신노동당 안에서는 케어 하디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신노동당·세계화·전쟁과는 다른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