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개발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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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개발과 미국
김하영
북한이 지난해 말 핵 시설들의 봉인을 제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원들을 추방했다. 그러자 미국 권력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분열이 깊어졌다.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미국은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 승리할 수 있다”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이라크 전쟁과 동시에 북한과도 싸울 수 있으니 까불지 말라고 협박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1999년 나토 전쟁 뒤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윈윈 전략”을 폐기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에 즉시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무기사찰단을 받아들인 이라크는 치겠다고 하면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을 쫓아낸 북한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느냐며 미국의 모순을 비꼬는 목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의 미국측 협상 당사자는 갈루치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핵 폐기를 선언할 때까지 대화 않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 대해 “그것도 외교냐”고 비난했다. 일본과 한국 정부로부터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 미국 책임이 큰 거 아니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본과 한국 정부는 동아시아 지역의 불안정 심화를 원하지 않는다. 한·미·일 사이에 대북정책을 조정감독하는 회의가 있다. 티콕이라고 줄여 말하는데, 거기에서 미국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를 낸 것은 한·일 정부들의 이런 불만 때문이었다. 미국은 계속 막무가내로만 나가다가는 북한을 압박하는 일에서 일본과 한국 정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양보’는 시늉 수준을 넘지 않았다.
애초에 한국 정부는, 북한은 핵을 폐기하고 미국은 김정일 체제를 보장하는 대타협을 이루자는 이른바 중재안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를 미리 안 미국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스스로 알아서 “중재”라는 표현을 거둬들였다. 형식을 거두어들인 대신 실질적인 내용이라도 일부 관철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대화는 하되 타협은 없다”며 대화의 의제는 북한의 핵 폐기를 어떻게 검증하느냐가 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미국은 그 동안 보상 약속을 해 놓고도 지키지 않아 왔다. 그런 미국이, 이번에는 아예 어떤 보상도 없다고 못박으며 북한에 대화를 하자고 한다. 북한이 여기에 응할 턱이 있겠는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마치 학생 주임이 그가 보기에 “문제아” 학생을 불러 소지품 검사를 하겠다는 식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일방적 독주로 상황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는 비난을 슬쩍 피해 시간을 벌면서 공을 북한에 떠넘겼고, 북한은 이에 NPT 탈퇴와 미사일 실험 재개 위협으로 맞받아쳤다. 이것은 미국이 북한과 대화할 수도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입장을 밝힌 때 나온 반응이어서 미국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북한의 대응은 초강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핵을 폐기하고 핵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미국에게 당신들이 우리와 대화를 할 거면 핵문제·미사일 문제와 중유 제공·체제 보장 같은 실질적인 쟁점을 테이블에 올리시오 하고 말한 셈이다.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 문제에 매여 있는 점, 다른 강대국들과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조차 미국의 독주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점,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지배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등의 조건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
북한의 대응은 양날의 칼을 담고 있는 셈이다. 두 날 가운데 한 날인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 재개가 동아시아 지역에 끼칠 영향을 부시 정부는 우려한다. 그래서 부시 정부는 일단 다른 한 날인 ‘핵 폐기-체제 보장’ 맞바꾸기를 잡고 북한을 ‘대화’에 묶어 두며 시간을 벌기로 한 듯하다.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이 ‘그래, 어디 한번 실수해 봐라. 우리가 손을 봐줄 테다’ 하고 중동처럼 대처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북한 정권은 일본에 미사일을 날릴 수도 있고, 중국·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일단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어디까지 번질지 미국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분명한 전략이 서 있는 것 같지 않다. 부시 정부는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인 중동에서 벌일 이라크 전쟁 계획에 몰두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북한은 그렇게 급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2∼3주 동안의 상황 전개를 보면, 북한이 강수를 둘수록 부시 정부는 오히려 말랑말랑해져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 쪽으로 회귀하는 느낌마저 든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다 해도 이것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보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지금까지 북미 대화는 몇 달씩 또는 몇 년씩 질질 끌면서 결국 위기로 이어진 사례들이 있다. 1994년 전쟁 일보직전의 위기는 1993년부터 시작된 북미간 핵 협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엊그제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한 말은 대화가 시작되더라도 순탄히 진행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는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더라도 핵 생산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네바 합의 때 약속했던 경수로 2기를 북한에 지어 주는 일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미국의 세계 전략은, 비록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지라도, 동아시아 지역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몰고 가고 있다.
부시의 공격적 세계 전략
최근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야를 좀더 넓히고 좀더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북한을 위기의 원인 제공자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의 사태가 북한의 핵 시설 봉인 제거에서, 또는 북한의 핵 개발 계획 ‘시인’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한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어겼기 때문에 사태가 불거졌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대응을 지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위기의 주된 원인은 부시 정부에 있다. 부시는 이미 취임할 때부터 제네바 합의(1994년)와 북미 공동성명(2000년)을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 사실, 약속 어기기는 클린턴 정부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클린턴 정부는 북한이 핵시설을 봉인하는 데 대한 대가로 중유를 제공하고 경수로형 원자로를 지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중유 제공도 안정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데다 2003년 완공 예정이었던 경수로는 2008년이 돼도 완성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태다. 또, 클린턴은 1999년에 북한의 미사일 실험 유예에 대한 대가로 경제 제재 해제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부시는 한술 더 떴다. 약속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북한 같은 “불량 국가”에게 보상을 해줄 필요가 뭐가 있냐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남한 등 주변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도 부시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부시 정부는 남한 정부에게 북한에 전력 공급을 하지 말라고 했고, 남북 평화 협정도 체결하지 말라고 했으며, 최근에는 남북 경협도 확대하지 말라고 했다.
백악관 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2000년에 ‘국익의 증진’이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 “북한 같은 정권에 단호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정권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들에 대해 겁먹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최선의 방어는 분명하고 고전적인 억제책이어야 한다. 즉, 그들이 대량살상무기를 갖는다면 그 무기는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국가적 멸망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무시무시한 말은 북한을 협박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고 목을 졸라 약화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화는 해도 협상은 없다’는 방침은 바로 이런 의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9·11 이후 부시 정부는 한층 공격적인 세계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데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29일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 우리의 두 번째 목적은 테러 지원국들이 미국과 우리의 우방과 동맹국을 대량살상무기로 위협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 해 6월 부시는 “악의 축”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밝혔다. 이른바 “선제 공격 독트린”이다. “우리는 비확산 협정에 서명한 뒤 그것을 체계적으로 어기는 독재자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 … 테러와의 전쟁은 방어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과 전투를 택해야 하고, 적의 계획을 가로막아야 하며, 최악의 위협이 나타나기 전에 그것과 대결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선 세계에서, 안정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은 공격하는 길이다.”
선제 공격의 첫 대상은 이라크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석유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기업은 산업을 점점 더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독일·일본 등 다른 강대국들의 석유 공급이 미국의 군사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들은 미국보다 더 수입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열강이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시킴으로써 미국은 자신의 세계 패권을 천명하려 한다.
미국의 국방 예산은 미국 다음의 14개 국가의 국방 예산을 합친 것보다 크고, 미국의 경제 규모는 미국 다음의 3개 나라를 합친 것보다 크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국은 자신과 대적할 만한 경쟁자가 나타날까 봐 걱정하고 있다. 미국이 진짜로 걱정하는 것은 “불량 국가”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우리의 전략은 잠재적 경쟁국의 출현을 저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부시 정부는 지금이 경쟁국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부시 행정부는 막강한 군사력과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 이라크를 침공하려 하고, 호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부시가 단순히 미치광이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계산에 바탕한 미국 공화당내 우익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세계 질서를 더한층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는 이 불안정의 한 사례다. 미국은 북한을 핵선제공격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위협을 해 왔다. 서로 적대하지 않기로 했던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성명도 어겼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 보장을 한다”고 했던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3조 1항)도 어겼다.
이에 북한은 NPT 탈퇴로 맞섰다. 그런데, 북한 핵 문제가 부를 수 있는 한 쟁점이 일본의 핵 무장이다.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대량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 4월 일본 자유당 당수 이치로 오자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핵 발전소에 많은 플루토늄을 가지고 있으며, 3∼4천 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군사력에서 누구에게도 얻어맞지 않게 될 것이다.”
미국의 핵과 미사일 위선
상당수 NGO들은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자, 미국과 북한 모두 나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그 동안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을 해 왔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 내의 일부 단체가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면 이런 입장은 결국,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기피하거나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의 핵 개발도, 김정일 정권도 지지하지 않는다. 북한 정권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마당에 무기 개발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근본적으로,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미국의 위협과 북한의 위협을 똑같은 반열에 놓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은 북한의 굶주리는 어린이와 민주주의에 아무 관심이 없다. 미국은 자기 나라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위해 아시아·아프리카와 남미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을 만연시켰다. 또,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흉칙한 독재자를 지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선 다른 나라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미국은 남한의 군사 독재를 줄곧 지원했다. 남한의 민주주의를 진척시킨 세력은 미국이 아니라 남한 민중이었다.
미국이 북한 핵을 문제 삼는 것도 완전한 위선이다. 북한에 핵이 있는지 없는지는 북한 당국을 빼고는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은 핵 사찰을 몇 번이나 했지만 북한 핵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다. 물론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공업국이고, 흑연 감속형 핵발전소를 가동한 적이 있고, 핵 재처리 시설도 가지고 있고, 우라늄 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설사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할 데 없이 더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핵 전쟁 위험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1만6백기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실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다.
최근에 북한이 탈퇴함으로써 문제가 불거진 조약이 바로 NPT다. NPT는 핵무기를 버젓이 다량으로 보유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다른 국가가 핵무기를 갖는 것을 가로막기 위한 장치이다. ‘나는 되도 너는 안 된다’는 위선적인 조약이다. 그리고 미국은 핵무기를 가지려는 게 누구냐에 따라 이중 잣대를 사용해 왔다. 미국의 중동 지역 경비견인 이스라엘은 핵탄두를 2백기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NPT에 가입도 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이를 문제삼은 바 없다.
북한이 NPT를 탈퇴하자 미국은 “국제적 의무를 지키라”고 북한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NPT 탈퇴를 비난할 도덕적 명분이 조금도 없다. 미국은 1년여 전에 핵실험금지협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것은 지난해 카쉬미르 지역의 인도·파키스탄 갈등에서 보듯이 세계 핵무기 경쟁을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도 탈퇴했다. 생물학무기제한협정과 소형무기거래규제안도 지지하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지(1월 11일치)는 “그 자신이 군축에 대해 회의적인 미국 정부로서는 다른 나라에 군축을 강요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문제를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를 만드는 명분일 뿐이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반미를 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좌파는 모두 미국의 대북 위협에 반대한다. 반대 운동을 실제로 구축하느냐는 별개 문제이지만 말이다. 좌파 안에 여러 차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에 비추면 이 투쟁에서 그 대부분은 사소한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미 운동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약점이 있다면 이 차이를 흐릴 수는 없다.
첫째는 운동의 일각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북미 문제 중재자로 나설 것을 기대하고 촉구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이 한반도를 불안정에 빠뜨리는 데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온순한 동맹국을 잃고 싶지 않은 미국도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 정부는 한국민들의 반미 감정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불러일으키는 위기를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첫째, 노무현은 미국의 세계 전략을 근본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한미 동맹의 유지를 중요시한다. 노무현은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전쟁광으로 여기는 부시에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호감을 표시하며, “세대가 비슷해 잘 통할 것 같다”고 했다. 둘째, 한국은 이 지역을 불안정으로 몰아 넣는 한 당사자다. 한국은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무기를 증강해 왔으며, 일본이 핵무장 의도를 드러낼 경우 한국이 핵무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
둘째는 ‘북핵 문제가 터졌는데 이라크 전쟁 반대 얘기는 왜 하느냐’며 이 문제를 이라크 전쟁 반대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여러 방향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다. 한반도 문제 다루기도 급급한데 다른 나라 문제 다루게 됐냐는 생각, 또는 쟁점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 심지어는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 상대적으로 북한쪽 숨통이 트일 수 있으므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것은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견해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내 문제와 관련돼 일어나는 반미 시위들은 그 동안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컨대, 여중생 촛불 시위 범대위가 이라크 전쟁 반대를 주장할 것 같은 연사들에게 연단을 내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1986년 봄 ‘반전반핵 양키 고홈’을 외치며 김세진·이재호 열사가 몸을 불사른 일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는 훌륭한 반미 운동의 전통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반미 운동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거듭날 필요가 있다. 미국 제국주의를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로만 봐서는 안 되며, 국제적·지구적 시야에서 봐야 한다.
나는 앞서 최근의 한반도 위기 상황이 부시 정부의 공격적이고 일방주의적인 세계 전략과 그것이 일으키고 있는 세계적 불안정의 일부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부시 세계 전략의 첫 실험대가 이라크라고 말했다. 부시는 이 문제에 매달리고 있고 여기서 미국의 세계 패권을 재천명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좌파와 함께 우리의 중요한 임무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의 대북 위협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지역만 다르지, 위협의 원천은 똑같은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벌이는 짓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만약 미국이 이라크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그들은 한반도를 더욱 불안정으로 몰아넣을 것이고, 더욱 거만해져 효순이 미선이에게 저지른 일을 언제든 다시 반복할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것은 전세계 민중의 승리가 될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20여 년 동안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겁을 먹었다.
오늘날 전 세계는 전례 없는 반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보통 사람들과 미국 문화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 자유 시장 체제 도입을 강요하며 가난과 질병을 낳고 있는 미국 지배자들에게,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미국 지배자들에게,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이라크 전쟁에 혈안이 돼 있는 미국 지배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불안정에 빠뜨리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대는 이 문제들과 서로 연결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