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땀나는 위기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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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핵은 미국으로부터 존중받기 위한 기본 요소인 모양이다. 북한이 핵 무기를 갖고 있다고 밝혔지만, 미국은 5일 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만 나타낼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때는 “한두 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막상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시인하자 “공갈 협박”이라고 말을 바꿨다.
백악관 대변인 애리 플라이셔는 핵을 재처리했다는 북한측 주장이 “정확한지 확신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도 북한이 나름의 제안을 했으며 이를 검토중이라고 말함으로써 초점이 북한의 핵 보유에만 맞춰지지 않도록 했다. 이른바 “대담한 제안”의 내용이 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북한이 미국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대담한 제안을 내놓지 않고서는 미국을 테이블에 끌어다 앉힐 수 없다는 것을 북한은 잘 안다.
미국과 북한의 첫 최고위급 회담이었던 1992년 1월에 국무차관 아놀드 캔터를 만난 김용순도 대담한 제안을 갖고 회담에 임했다. 여기에는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하겠다는 제안이 포함돼 있었다.
2000년에 북한을 방문한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에게 김정일은 클린턴이 방북하면 의논할 수 있는 의제들을 귀뜸했다. 그 가운데는 사정 거리가 5백 킬로미터 이상인 모든 미사일의 개발 실험을 동결하는 문제도 포함돼 있었다. 이 제안이야말로 놀라울 만큼 대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일본과 일본 내 미군 기지에 도달할 수 있는 중거리 노동 미사일의 개량형까지 동결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담하기로 말하자면,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원들을 10년 가까이 북한 안에 두면서 핵 사찰을 허용하고, 경수로를 받는 대신 흑연 감속로 핵시설을 동결하겠다는 1994년 제네바 합의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동안 미국은 이 대담한 제안들을 일거에 박대하거나, 시간을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해 버리거나, 더한층의 대담한 양보를 강요해 판을 깨버리거나, 심지어는 서명까지 다 해 놓고는 이행하지 않아 왔다.
북한이 강한 대응을 하면 외교적 해결을 내세우고, 한반도가 너무 조용하다 싶으면 핵과 미사일과 화학 무기와 인권 등을 들이대며 헤집어 놓곤 한 게 바로 미국식이었다.
핵무기 경쟁
지금 미국의 강조점은 북한의 핵 보유 시인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는 듯하다. 이 위기가 자칫 미국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껏 미국은 한반도에서 위기를 지속시킴으로써 일본과 남한의 공포심을 부추겨 미국에 의존하게끔 만들고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위기를 잘못 다뤘다가는 일본과 남한의 핵무장을 부추길 수도 있다.
2000년 11월까지 일본이 축적해 놓은 플루토늄은 이미 32.8톤에 이른다. 이 가운데 5.2톤이 일본 내에 있고 나머지는 유럽의 재처리 시설에 있다. 5.2톤의 플루토늄은 650개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다. 또한 일본은 90톤의 풀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사용 후 핵연료를 축적해 왔다. 이를 재처리한다면 1만 1천1백25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
남한도 강력한 핵무장의 꿈을 가지고 있다. 북한 핵 보유 선언에 따라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박정희의 핵 개발이 성공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은근히 퍼질 수 있다. ‘북핵’ 위기를 맞았던 1994년,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발매돼 5백만 권 이상 팔렸다. 이 소설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미국이 1991년 남북한 비핵화공동선언을 촉구했을 때, 재처리 시설의 개발을 금지하는 합의 내용에 대한 반발이 군부와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크게 일었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1992년에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통일되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재처리 시설의 건설을 승인해 달라고 국제원자력기구에 요청하게 될 것이다. … 나는 남북이 통일되면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가 상황에 따른 이런 차이를 이해할 것으로 확신한다.”
남한의 핵 에너지 프로그램은 기술에서 북한을 앞서고 있다. 군사용으로서 잠재력도 훨씬 크다. 2001년 현재 남한은 12기의 핵 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으며 6기의 핵 발전소를 건설중이다. 이들 핵 발전소는 그 동안 모두 27톤의 사용 후 연료를 축적해 왔다. 만약 남한이 재처리 시설을 보유한다면 이것은 3천3백75개의 핵탄두를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다.
일본과 남한이 핵무장을 한다면 이 지역의 핵무기 경쟁이 격화돼 중장기적으로 한반도는 끔찍한 핵 전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이 핵 무장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북핵’ 위기를 잘 다스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 관리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미국 권력자들은 북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분열해 있다.
그러므로, 첫째,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의 다음 표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미국은 이제 핵 무기까지 보태어진 북한의 군사력을 고려해야 하고, 북한 정권이 미국의 중요한 우방이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일본에 미사일을 날리는 방식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계산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을 한 손으로 잡아 둔 채, 시리아나 이란 또는 다른 어느 국가를 다음 표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려 할 수도 있다.
둘째, 그러나 북한이 핵 억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옳지 않다. 북한을 확실히 손봐 주는 게 미국에게 더 이롭다고 판단한다면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 미국은 북한 핵 시설에 대한 정밀 공격을 계획해 왔다. 미국 상원의원 존 매케인은 1994년에 “정밀 타격으로 방사능 유출이 거의 없이 북한의 핵 능력에 효과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그 해 6월 한반도는 실제로 전쟁 초읽기 상황이었다.
셋째, 다른 한편, 미국이 북한의 대담한 제안을 받아들여 협상을 통한 평화 정착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도 옳지 않다. 협상은 자기 입장만 강변하고 시간을 끌다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미간 협상 대표였던 찰스 카트먼은 이렇게 말했다. “매번 북한과의 협상을 하기 전에 내부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토론을 통해 찾아 냈다. 비확산 체제의 모든 이론 체계들을 거기에 대입했다. 그 다음에는 남한과 협상해야 했고 그 내용 또한 거기에 반영했다. 이 두 가지 과정을 거치고 나면 더 이상 북한에 줄 당근은 남아 있지 않고 협상은 사라졌다.”
설사 특정 조건 아래서 협상이 성사됐다고 해도 이것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1994년에 제네바 합의에 대한 엄청난 기대가 있었지만 미국은 모든 약속을 간단히 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