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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 60주년:
민족해방 혁명이 어떻게 시장경제로 향하게 됐는가

2009년 10월 1일 중국 혁명 60주년 기념식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빛이 바랬다. 그날 TV에서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를 소개할 때 내 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메아리치고 있을 것이다.

‘2008년 경제 위기 발생 후 전 세계 해고 노동자 중 절반(약 4천만 명)이 중국 노동자이고, 행여나 이들이 기념식장 앞에서 시위를 벌일까 봐 공산당 정부가 탱크까지 배치한 마당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에서 인민을 구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감동을 줄까? 티베트와 신장이 사실상 계엄 상황인데, 중국의 해방이 전 세계 피억압자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등불이었다는 주장은 또 어떤 의미일까? 더구나, 마오쩌둥 시대에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대중의 큰 희생을 낳은 정치·사회적 재앙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이 이런 의문의 일부, 혹은 전부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답하는 과정에서 1949년 중국 혁명의 의의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혁명?

우익뿐 아니라 일부 좌파는 모든 혁명을 폄하하고 싶어 하는데, 중국 혁명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쓴 ‘새로운’ 중국사를 보면, 19~20세기 중반 중국은 서구 ‘선진국’의 ‘진출’로 역동적 세계시장에 편입되고, ‘중도’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정당들의 탄생으로 점점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지저분한 폭력 문화에 사로잡힌” ─ 몇 년 전 출판된 영향력 있는 중국혁명사 책의 표현 ─ 공산당이 농민과 함께 혁명이라는 ‘깽판’을 쳐서 애초의 올바른 길에서 이탈했고, 1979년 시장개방을 통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주의 경제학에 바탕을 둔 이들의 상상 속 역사와 달리, 당대를 살아간 중국인들에게 세계시장 편입과 서구 국가의 진출은 점진적 진보와는 거리가 먼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청나라에 IMF식 부채 상환 압력을 가해 청나라가 자연재해에 대응을 못 하면서 농민 1천5백만 명이 수해로 떼죽음을 당했고 ─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사건을 제국주의 체제가 낳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 홀로코스트’ 중 하나로 꼽았다 ─ 민중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초착취로 “한 끼 먹고 한 끼 굶는” 고통을 받았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의 군사 침략은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서만 약 30만 명이 살해당했다). 중국 자본가 정당인 국민당은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민중과 손을 잡기는커녕, 그들을 두려워해 탄압했다.

따라서 중국 민중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여 승리한 것은 대단히 환영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중국 혁명은 1950년대 폭발한 베트남 민족해방 운동을 비롯해서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열강에 큰 타격을 입힌 많은 반식민지 투쟁을 고무한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

민족주의 혁명의 한계

그럼 왜 이 위대한 혁명이 60년이 지난 오늘 그토록 퇴색하게 됐는가? 그것은 혁명이 애초부터 가진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앞에는 두 가지 다른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국제적 착취·경쟁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당연히 이것은 국제적 혁명 과정의 일부가 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구세력을 척결한 후 중국 스스로 근대 자본주의 산업을 건설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중국 혁명은 급진적 민족주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1920년대 중국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결과였다. 1920년대 중국에는 비록 아직 소수였지만 연안 공업 단지에 집중되고(상하이에는 노동자 1천 명 이상이 고용된 공장이 50여 개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계급이 있었다. 보통 당시 노동자들의 다수가 농촌 출신이었던 점을 근거로 삼아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다고 폄하한다. 그러나 노동자 탄압에 앞장선 국민당 장교조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인정했다.

그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초기 중국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와 레닌의 ‘연속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국 혁명을 러시아 혁명을 포함하는 세계 혁명의 일부로 생각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공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 조계에서 영국군이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하는 참사(이른바 ‘5·30사건’)가 발생한 뒤 노동자 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급진화했고 노동자 권력 탄생은 시간문제인 듯이 보였다. 당시 공산당의 국공합작 파트너였던 국민당은 제국주의 열강보다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공산당에게 국공합작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당에 모든 것을 양보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국민당이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 4계급 연합당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스탈린의 명령을 따라 공산당이 국민당에 발목이 잡힌 결과 1927년 국민당은 상하이·광둥에서 노동자를 대량학살하고 독립적 노동자 조직을 철저히 파괴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농촌으로 근거지를 옮겨 게릴라전을 벌이게 된 것은 이런 패배의 결과였지 농민의 힘을 새삼스레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도시 노동계급과 유리되고 국제적 노동자 혁명을 포기하면서 중국 공산당은 전 민족적 반제 항쟁을 부르짖는 좌파민족주의 정당으로 변모했다. 1939년 당원용 ‘교과서’의 첫 문장은 “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화민족 5천 년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국가의 ‘통일성’을 해칠 소수민족 자결권 지지 정책은 사문화했고, 1949년 이후 공산당 정부는 변경 소수민족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이것은 1921년에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중국의 국부(國父)’인 쑨원과 대립해 몽고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용감한 활동을 벌인 것에 대비되는 엄청난 변화다.

동시에, 게릴라전이 주된 활동이 되면서 당의 결정에서 정치적 고려보다 군사적 고려가 더 중요해졌고, 지도자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당원에게 ‘반혁명 분자’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하는 각종 ‘정풍 운동’과 지도자 숭배 캠페인이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이런 변화는 공산당과 대중 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은 여전히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기층의 압력에 밀려 ─ 1946년 이후 토지 개혁의 급진화가 대표적 사례 ─ 중국 민중의 요구를 대변했다. 그래서 국민당과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에게는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주요 동원 기반이었던 농민조차 상명하달식 지도의 대상이었지 스스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1949년 이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막상 인민이 민주적 권리가 없는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오부터 시장 개혁까지

흔한 평가와는 달리 1949~76년의 이른바 마오 시대 중국은 정체된 사회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연평균 6퍼센트 성장했는데 ─ 당시 세계평균 성장률은 4.5퍼센트였다 ─ 이것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진정한 문제는 정체가 아니라 사회의 부가 군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중공업으로 편중되고 보통 사람들의 필요가 무시됐다는 것이다. 한때 전체 공업생산에서 중공업 대 소비재 산업의 비율이 75 대 25에 이르기도 했다. 또, 중국 혁명이 ‘농민 혁명’이었다는 흔한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농업 투자가 철저히 무시돼 농업 성장률은 매년 겨우 1.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정권 초기에는 상황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공산당 정부는 혁명을 성공시킨 대중의 지지와 열망에 일정 정도 부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임금·노동조건·보건·교육·농업 지원 모두 상당히 진보했다. 그러나 냉전 시대 제국주의 열강과의 경쟁이 격해지자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민족주의적 방식, 즉, 부국강병으로 맞서기로 결정하면서 체제의 우선순위를 명백히 중공업 축적으로 돌렸다. 마오는 이 전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다. 우리도 그것[최신 무기]을 가져야 한다. … 미사일이든, 핵폭탄이든, 수소폭탄이든 저들이 그것을 가지면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결국 중국 사회는 다른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 압력에 종속된 사회가 됐다. 다시 말해 당시 중국은 자본주의였다. 다만, 주된 경쟁 형태는 세계시장에서 상품가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열강의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공업 축적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을 포함해 공산당 관료들은 사회의 필요를 축적에 종속시키는 구실을 하는 존재, 즉 관료적 자본가 계급이었다.

그들은 선진 제국주의 열강과 군사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고 희생을 강요했다. 예컨대, 노동자들을 정규직·반(半)정규직·비정규직 ─ 정식 용어는 이와는 달랐다 ─ 으로 나누고 복지와 임금을 차등 지급해, 시장자본주의에서 보통 노동시장과 기업 간 경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경쟁 압력을 넣었다. 이런 일상적 고통뿐 아니라 때로는 희생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컨대, 3천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대약진 운동이나 수백만 명이 정치적 핍박을 받은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그러나 이런 마오주의적 경쟁 전략은 부분적 성공을 거뒀을 뿐이다. 중국은 1960년대 이후로는 미국뿐 아니라 소련과도 대결해야만 했는데, 아무리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도 냉전의 양대 초강대국과 겨룰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중국의 경쟁력은 이 초강대국들의 ‘위성국’들과 비교해도 별로 낫지가 않았다. 예컨대, 당시 일본·한국·대만의 연평균 성장률은 7~8퍼센트로 중국보다 높았고, 197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베트남군과 캄보디아에서 짧은 전쟁을 벌였을 때도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1971년 한때 민족해방 운동의 상징이던 마오가 베트남 전쟁의 학살자인 미국 대통령 닉슨과 손을 잡고, 덩샤오핑이 세계시장 개방 정책을 편 것은 갑작스런 일탈이 아니라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덩샤오핑 개혁의 본래 목표는 중국 보통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시장의 힘을 이용해 중국 국가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점에서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대기업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1980년대 초의 ‘허니문’ 기간 이후 계급적 불평등이 깊어지고 정치적 갈등이 격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는 헌법에서 파업권을 조용히 삭제했고 노동자 복지를 줄이기 시작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은 그 갈등이 거리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톈안먼 광장을 피로 물들인 후 국영기업 노동자 4천만 명을 해고하고 농촌 복지를 삭감하면서 중국을 세계시장에 밀접히 통합된 수출 주도형 경제로 바꿔 나갔다.

새로운 혁명을 향하여

개방 이후 지니계수로 표현된 중국의 불평등 정도는 1980년 0.3에서 2007년 0.5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속도로 심각해졌다. 시장형 경제 성장으로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이 ‘먹고살 만하게’ 될 것이란 공산당 관료의 약속과는 달리 약 2억 1천만 명이 여전히 국제 빈곤선(하루 1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다. 반면에 공산당 고위 관료 ─ 민간 자본가인 경우가 많다 ─ 와 민간 자본가들 ─ 공산당 당원인 경우가 많다 ─ 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당보다는 상공회의소에 가깝다”든가, “세계 최대의 지주회사”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톈안먼 항쟁이 패배한 기억을 뒤로 하고 1990년대 말부터 이런 모순에 항의하는 행동이 사방에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어떤 중국 사회 연구자는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보고된 ‘집단행동’ 사례를 수집한 후, 주요 집단과 원인을 이렇게 분류했다.

1.민영화 과정에서 해고되거나 적절한 퇴직금을 받지 못하거나 임금이 깎이고 노동조건이 불안정해진 국영기업과 집체소유 기업 노동자들.

2.고위 관료와 결탁한 개발업자들에 의해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적절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도시 거주민들.

3.등록금 폭등과 정부와 대학 당국의 약속과는 달리 빚을 내고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에 분노한 대학생들.

4.부동산업자의 약속과 달리 입주 주택이 부실 공사이거나 공공서비스가 적절히 공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주택 소유자들.

5.특정 업종의 종사자들, 특히 택시 운전사·교사·세발자전거 운전사·상인 등 자신의 특정한 노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투쟁하거나,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하는 특정한 법규들에 항의하는 사람들.

6.임금 체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농민공’[농촌 이주 노동자].

7.중국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파룬궁 회원과 기타 정치적 반대파들.

8.관료들과 기업가들이 토지를 강탈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에 항의하는 농민들.

여기에 티베트와 신장 등 소수민족 밀집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투쟁들을 포함하면, 이것이 2000년대를 묘사한 것인지 국민당 정부 말기를 묘사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의 모든 피억압·피착취 집단이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산당 정부는 옛 국민당 정부와 다르다. 제국주의에서 중국을 해방시켰다는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또, 모순은 있지만 고도성장으로 일자리 확대와 최소한의 생활수준 향상이 지속해 왔고, 경제 성장으로 많은 혜택을 입은 집단(민간 자본가, 중간 계급의 일부 등)을 정치적으로 포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명백하다.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 최근 한족들의 위구르족 공격은 이 점을 명백히 보여 줬다 ― , 1990년대 이후 공산당 정부가 민족주의 카드를 툭하면 꺼냈음에도 집단시위의 폭발적 증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1993년 8천7백 건에서 2008년 18만 건으로). 체제의 안전성에 기여하는 듯이 보였던 상층 계급 포섭은 잇단 부패 스캔들로 짐이 되고 있다. 또, 아마도 통치 정당성의 가장 강력한 근거인 고도성장 신화가 끝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칼럼니스트는 얼마 전에 중국 정부가 엄청난 규모로 경기 부양 정책을 폈음에도 “더블딥이 발생하면 진원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예측이 정말로 실현될지, 혹은 언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양책의 일차적 혜택이 자본집약적 산업과 건설업으로 가기 때문에 설사 중국 정부가 목표로 한 7~8퍼센트의 성장률을 당분간 유지하더라도 ─ 이조차도 지난 20년간 평균성장률에 비해 1~2퍼센트, 2007년에 비해 2~3퍼센트 낮은 수준이다 ─ 충분한 수의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을 것이고 중국 정부는 경제 위기의 정치적 파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 중국의 주요 공업 단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일손 부족은 (정부의 압력을 받은) 중국 언론의 호들갑, 계절적 수요와 아직 상당수의 실업 농민공이 공업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은 상황이 결합된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든,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이미 중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이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중국 노동계급은 농민공을 포함할 경우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할 뿐 아니라 중국 지배자들을 세계적으로 막강한 지배자 집단으로 만들어 준 부의 거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2005년 농업의 GDP 부가가치 구성비는 12.5퍼센트밖에 안된다). 그 중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전투성이 상승해 왔고 경제 위기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1억 5천만~2억 2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공들은 연안의 수출 공업 단지에 밀집해 있다. 그들의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은 192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한 상하이와 광둥의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지속하고 중국 지배자들이 국내 모순의 폭발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이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1920년대 수준으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직 희망 섞인 전망일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는 새로운 혁명을 향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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