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촘스키》,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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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9-11》, 노엄 촘스키, 김영사
미국의 대중 매체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이 공격받았다는 말을 텔레토비처럼 지겹게 반복한다. 미국이 공격받은 사실을 반복 재생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소말리아, 예멘, 북한 같은 ‘불량국가’들을 공격하는 좋은 구실이 된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들먹이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매국이고, 전쟁을 지지하면 애국이라며, 모든 이에게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라고 윽박지른다. 수많은 양심의 소리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종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 9-11》 은 미국의 억압적 패권주의를 폭로해 왔던 행동하는 지식인 노엄 촘스키가 9·11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유감 없이 보여 준다. 첫째, 촘스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인도주의적 전쟁’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1980년대의 니카라과에서 테러를 저지른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판한다. 둘째, 테러방지법 제정에서 볼 수 있듯이 9·11 테러는 군국주의화, 부의 편중, 대중 운동의 억압 등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데 이용되고 있으며, 그 일에는 반드시 큰 저항이 따를 것이라고 촘스키는 지적한다. 셋째, 촘스키는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을 벌이는 국가들이 진정으로 테러리스트 국가라고 주장한다. 소련은 체첸에서, 중국은 위구르에서, 인도는 카슈미르에서, 인도네시아는 아체에서 저지른 박해에 대해 미국의 양해를 얻고, 자국의 추악한 이익을 위해 미국의 전쟁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넷째, 어떤 범죄가 낳은 사상자의 수를 추정할 때는 현장에서 살해당한 자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사망한 사람도 헤아려야 한다. 그 예로 1998년의 수단 알시파 의약 공장 폭격은 죄 없는 아이들을 현재까지 의약품 부족으로 죽게 했으므로 9·11테러의 희생자와 맞먹으며, 이라크 경제제재는 지금까지 백만 명이 넘는 어린이를 희생자로 요구했다. 촘스키는 이런 미국의 범죄는 셀 수 없는 사상자를 낳은 인간성에 대한 가장 잔인한 범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촘스키는 9·11 테러보다 더 비극적이었던 니카라과가 미국에 자살 테러를 하는 극단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후원 하에 유엔헌장의 기본 틀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폭력의 악순환을 막는 모범 답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 니카라과의 민주 정부 수립을 박살낸 미국에게 UN이 니카라과에서 손을 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것은 고양이에게 쥐 생각해 달라는 것과 같다. UN이나 국제재판소가 미국에 가할 수 있는 법적 제재는 교통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주차 위반 벌금을 부과하는 정도로 미약할 뿐이다. 게다가 베트남전, 동티모르 학살, 천안문 사태, 미국의 수단 의약 공장 폭격에 대해 UN은 형식상의 진상 조사만을 하는 뒷북을 쳤다. 이런 기관을 통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막자고 주장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촘스키는 9·11 테러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덴은 미국의 중동 정책에 분노하는 것이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중동의 개입과 세계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세계 자본의 잉크 역할을 한 석유 이권을 보장받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노동시장의 유연화, 민영화, 규제 철폐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미국의 세계화는 이번 9·11 테러와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뗄 수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이익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아랍의 석유가 아랍인들을 위해 쓰이지 못하는 것과 석유 이권을 위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똑같이 아랍인을 분노케 했다. 결국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에 대한 자살 테러는 미국의 극렬한 이익추구 방식인 세계화에 대한 반발의 표현인 것이다. 한편 촘스키는 이번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전쟁이 중앙아시아 자원 통제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촘스키는 이번 전쟁이 석유와 천연가스를 위해 벌이는 추잡한 경제 전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부시는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해 전 세계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 법, 조약을 따르지 않으면 가혹한 전망이 예상되므로, 빈 라덴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UN 주도 하의 노력”이 대안이라는 촘스키의 결론에 나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라덴이 테러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대라는 이슬람권의 요구와 탈레반 정권이 제안한 라덴의 제3국 인도조차 일축하며 전쟁을 계속했고, 이에 대해 UN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부시의 전쟁에서 우리는 이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평화시에도 기대하기 어려운 법과 조약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대안은 미국이 9·11 테러를 자초하게 된 원인에 동감하는 사람들과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벌이는 노동자 해고, 부의 소수 집중 강화, 미사일 방어 체제 강행, 반테러법 제정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