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투쟁 배경과 전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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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첫 해인 2000년은 김대중 정권과 대학측이 등록금을 대폭 올림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그 자녀들의 생존권을 더한층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이에 맞서 대학생들도 김대중이 집권한 이래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싸웠다. 지난 4월 20일 〈동아일보〉는 3월 중하순부터 불붙기 시작한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을 이렇게 보도했다.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지역 9개 사립대학 총학생회가 지난달 등록금 인상 저지 연대 투쟁을 선언한 데 이어 전국적으로 대학마다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집회와 점거 농성으로 캠퍼스가 어수선한 가운데 학사행정이 거의 마비상태다.”
4월 24일 현재 중대·이대·연대·인하대·경희대·동국대·성대 등 전국 12개 대학이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그 밖의 14개 대학도 집회와 시위 등을 통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도 대부분 올해 개학과 함께 한두 차례씩 시위와 농성이 벌어지는 등 등록금 인상과 관련해 학내 분규를 겪었다.”(〈동아일보〉 4월 20일치.)
올해 유달리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의 강도가 높은 것은 대학마다 IMF 체제 이후 동결하다시피 해온 등록금을 이번 학기에 큰 폭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대학들이 10% 안팎의 등록금 인상을 전격적으로 단행했지만 인상 제시 근거는 ‘물가 상승률’ 정도에 불과한데다 법인·대학의 투명한 예·결산이 이뤄지지 않”(〈한국대학신문〉 342호)아 학생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한국대학신문〉은 “제대로 된 인상률을 제시한 대학은 대한민국에서 한 대학도 없다.”고 꼬집었다.
물가 인상으로 말미암아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학교측의 주장도 사실과 맞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IMF가 몰아쳤던 1998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연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5% 내외를 유지했다. 그러나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IMF로 인해 정부가 등록금 인상을 통제했던 1997년 이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물가 인상률보다 2∼3배 이상 높았으며, 인상률도 모두 두 자리 수를 기록하고 있다.
김대중의 교육정책 ― 등록금 인상의 배경
올 들어 각 대학이 등록금을 경쟁적으로 인상한 것은 올해부터 김대중 정부가 국공립 대학의 등록금을 자율화한 데 영향받은 것이다. “실제로 올해 초 서울대가 등록금을 9% 가량 올린다는 방침을 결정하자 사립대학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고 15% 이상의 인상안을 마련했다.”(〈동아일보〉 4월 20일치.)
학생들이 “정부와 대학측이 교육재정 확보와 재정운영 개선 노력은 뒷전에 둔 채 등록금 인상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989년 대학 등록금 자율화 조치 이후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은 대폭 줄어들었다. 1999년 현재 정부의 재정 지원은 사립학교 총수입의 3.8%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소장 박거용 교수는 “시장 논리에 따른 정부의 교육정책이 오히려 사립대 등록금 인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 결국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고 옳게 지적했다.
학생들도 교육재정 확충을 통한 교육의 질 개선이 현 정부의 중요 공약임을 들어 사립대의 재정문제 개선을 위한 정부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해 각 대학에서 진행되는 등록금 투쟁은 단지 등록금 액수 문제만이 아닌 지속적인 교육재정 확보 투쟁의 일환”이라는 숭실대 총학생회장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이처럼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는 아무런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등록금을 올린 학교 당국과 정부의 교육정책에 맞서는 싸움이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돼 있다.
1989년 최초로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대학에 시장 논리를 전면 도입하는 교육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1989년 사립대학의 등록금 자율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동안 낮은 등록금 인상률을 유지하는 데 기초가 됐던 사립대학에 대한 국고보조가 축소·폐지됨에 따라 사립대학은 1992년부터 본격적인 등록금 인상에 나섰다. 그 결과 지금 등록금은 당시 등록금의 3배 이상이 됐다.
1989년부터 전국의 대학생들이 해마다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을 하게 된 데는 이처럼 정부의 시장지향적인 교육정책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
군부 정권을 대체한 민간인 김영삼 정권은 전임자의 시장 논리에 따른 교육정책을 축소하기는커녕 되레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지난 1996년에 정부의 교육재정 확충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광범한 저항에 부딪혔고, 김영삼 정부는 강경 진압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함으로써 연세대생 노수석 씨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35년만의 정권 교체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도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임자와 꼭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국가 개입을 더욱 축소하는 방향으로 내달았다. GNP 대비 교육재정은 김대중 정부 들어 해마다 줄어들었고, 심지어 국공립대학의 민영화 계획까지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전국 50여 개 대학의 총학생회들이 등록금 인상 저지를 위해 교육재정 확충 요구를 내걸고 단일한 조직을 건설한 것도, 예전에는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을 해 본적이 없는 서울시립대 학생들이 올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도 바로 김대중 정부의 이런 교육정책 때문이다.(서울시립대 학교측이 올해 그토록 강경하게 학생들을 탄압한 것도 이런 정부 정책의 맥락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부·재단·학교당국의 삼위일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의 다른 한 축에는 교육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재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배어 있다.
1980년대 초 대기업들은 경제 호황과 비약적인 경제 성장에 힘입어 숙련·반숙련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대학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지방 대학과 제2 캠퍼스 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1989년을 정점으로 경제가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하자 대기업들은 대학에 대한 투자를 급격히 줄이거나 아예 손을 떼는 곳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시장 논리에 따른 정부의 교육정책과 맞물려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을 급속히 재정 위기 상태로 몰아갔다.
이에 대한 대학측의 유일한 대처 방안은 등록금을 천정부지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지난해 전국 사립대학의 학교운영수입 총액대비 법인적립금은 5.6%로 10%도 채 되지 않는 데 반해, 등록금 의존율은 70%에 육박하는 기형적인 상황이 빚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당국이 등록금 인상에 따른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올해 초 한국대학교육연구소가 “국정감사 자료분석 결과 학생 등록금이 동결됐던 지난 1998년 한해 동안 사립대가 남긴 이월·적립금은 무려 7천428억 원”이라고 폭로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서 사립대들이 재정난을 이유로 등록금 인상을 추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 동안 대학들이 그렇게 올린 등록금을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던 탓에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해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처럼 위선적인 학교당국과 이윤에만 혈안이 된 대기업 재단 그리고 시장 논리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을 추구하는 정부 모두 등록금 인상의 주범이며, 셋 모두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의 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서울지역 학생위원회가 3월 초중순에 발행한 〈등록금 인상 반대〉 2호에서, 일부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학교당국에 맞서는 싸움과 정부에 맞서는 거리 시위를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을 비판하려다 되레 역편향으로 학교당국에 맞서는 싸움을 잘 조직해야만 정부에 맞서는 동맹휴업이나 거리시위를 할 수 있는 양 그 둘의 관계를 기계적·단계론적으로 설정하는 듯한 주장을 한 것은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판단은 실천에서 민주납부 운동을 제대로 조직하지 않는 대학의 학생회 활동가들이 김대중 정부의 교육정책에 도전하기 위한 동맹휴업과 거리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관조하도록 조장했고, 예년보다 발동이 늦게 걸린 올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의 전망을 미리부터 비관하게 만들었다.
대학 본관 점거 농성 ― 예년과는 다른 특징
올해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대학생들의 투쟁은 3월 하순부터 동맹휴업과 총장실·대학 본관 점거 농성, 거리 시위 등으로 격화됐다. 올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대중적인 점거 농성이다. 〈한국대학신문〉(342호) 보도에 따르면, “예년과는 다르게 한양대, 서울시립대, 경희대 등 일부 대학의 경우 학생들이 아예 본관 전체를 잠그고 완전 봉쇄해 학사 업무 전체가 일주일이 넘게 마비”됐다.
물론 예전에도 대학생들은 점거 농성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해 점거 농성을 조직하기보다는 소수 학생회 활동가들의 점거로 그친 경우가 많았다. 또,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위력적이고 단호한 점거 농성보다는 총장실 점거 농성 같은 상징성을 부각하는 점거 농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올해 경희대와 시립대 등에서 보여 준 대학 본관 점거 농성은 예년과 달리 대중적인 참여와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단호함을 특징으로 보여 주었다.
바로 이 점이 점거 농성을 다른 투쟁 방법들 ― 집회, 피켓 시위, 불매 운동, 로비 등 ― 과 질적으로 구분해주는 것이다. 즉 점거 농성은 대학 행정 기구 등 학교의 핵심 건물을 점거·통제함으로써 학교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점거농성은 학교 안에서 진행되고 모든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잘 조직된다면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점거농성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여러 활동이나 교육 문제 토론에 끌어들일 수 있다. 이 같은 행동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3월 22일부터 시작된 경희대 학생들의 대중적이고 성공적인 대학 본관 점거 농성은 다른 대학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경희대 학생들의 점거 농성은 싸우고자 하는 모든 대학생들의 초점 구실을 했고, 상당수의 학교에서 “우리도 경희대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3월 말부터 시립대·한양대·동국대·중앙대 등으로 이어지는 점거 농성 물결이 일었다.
4월 20일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오늘날 대학이 의사표시를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폐쇄적인 사회도 아니”라며 학생들의 점거 농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립대학들은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과 논의할 사안이 아니라며 대화조차 거부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최근에야 몇몇 대학들이 학생들과 대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학생들이 투쟁을 통해 강력한 힘을 보여 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학생들이 단호하게 싸울 때만 대화조차 가능했던 것이다.
또, 사립대학들은 학생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온 대학운영위원회 건설 요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중고등학교에도 있는데 말이다.
보수 언론들이 최근의 점거 농성을 트집잡는 또 다른 논리는 “민주적 절차”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점거 농성의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수 언론들의 비난과는 달리 많은 대학들이 대중적인 참여와 지지 속에서 점거 농성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3월 22일 경희대는 2천5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성사시킨 뒤 곧바로 본관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동국대도 3천여 명이 모인 학생총회 자리에서 찬반 투표를 통해 점거 농성을 결정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1993년 이후 학생총회가 성사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런 자리에서 투표를 통해 점거 농성을 결정한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올해 몇몇 대학의 점거 농성이 완전무결한 건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처음의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점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완되기 시작했다. 본관 점거의 의미는 행정 마비이며 이를 위해서는 단호함이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희대 총학생회는 학적과 업무 마비로 말미암은 학생들의 피해 호소와 압력에 큰 부담을 느껴 이틀 뒤 학적과 점거를 풀었다. 다행히도 학적과 업무 재개가 다른 부서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는 본관 완전 점거의 효과를 후퇴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결정이었다.
동국대의 경우는 상황이 좀더 나빴다. 경희대와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지지에 바탕을 두고 본관 완전 점거에 들어갔으나, 곧바로 “모든 행정실 공간 점거는 해제”하고 “처장실 이상의 공간들을 점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틂으로써 사실상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점거 농성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의 점거 농성으로 색이 바랬다.
점거 농성자들 속에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세우는 데 충분히 성공하지 못한 점도 지적해야 한다. 점거 농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높이고, 점거 농성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민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기존 학생회 체계보다 더 확대된 점거 농성 위원회 같은 투쟁 기구를 만드는 게 필요했다. 점거 농성 위원회는 반드시 학생회 간부들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일반 학생들 가운데서 투쟁 정서를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들을 점거 농성 위원회에 포함함으로써 오히려 농성을 창조적으로 잘 이끄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경희대 총학생회가 더 확대된 투쟁 기구 세우기의 필요성을 간과한 반면, 시립대 학생들은 올바르게도 이런 취지에 들어맞는 점거 농성 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립대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점거 농성 위원회의 실제 운영과 점거 확대를 위해 필요한 활동을 조직하는 데서 충분한 민주적 토론에 바탕을 두지 않음으로써 점거 농성 위원회가 확대된 투쟁 기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해졌다.
연대
지금도 계속 점거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대학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 점거 농성 중인 대학들은 그 동안 연대의 모범을 보여 왔다. 경희대 학생들은 시립대 학생들의 점거 농성을 보호하기 위해 2백여 명이 지지 방문을 가는 모범을 보여 줬다. 다른 대학의 학생들이 경희대 학생들의 점거 농성에 고무받아 그 뒤 점거 농성에 들어간 것도 아주 효과적인 연대 행동이었다.
더 커다란 연대의 필요성은 정부와 학교당국이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얼마 전 김대중 정부는 등록금 인상이 부당하다는 학생들의 항의에 대해 등록금 인상은 대학들의 고유 권한이며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등록금 투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3월부터 전국 대학 기획처장들과 교육부·국가정보원 등이 참여하는 ‘대책회의’를 진행중이다. 지난 4월 초 회의 때는 학생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 양보하지 않을 수 없으면 등록금 인상률을 7%선에서 타협하라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단국대 등 몇몇 대학들이 학생들의 저항에 밀려 대화에 나서면서 타협안으로 제시한 등록금 인상률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에 대해 사립대학과 정부는 합체해 단일한 대응을 하고 있다. 그런 터에, 우리 학생들이 학교별로 각개 약진한다면 승산이 적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 점거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대학들 간의 실질적인 연대 투쟁 조직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일을 잘 하기 위해 만든 교육대책위가 조직 위상에 걸맞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노총이 학생들의 투쟁에 대해 성명서 발표 이상으로 더 적극적인 연대 행동을 조직하지 못하는 것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올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에서 몇몇 대학이 대중적인 점거 농성에 들어간 것은, 최종적인 결과 여부를 떠나, 학생들의 투쟁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매김될 것임에 틀림없다.
민주납부와 점거 농성의 관계
마지막으로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에서 민주납부와 점거 농성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3월 초중순에 발행한 〈등록금 인상 반대〉 신문은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 때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으로 민주납부와 점거 농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둘 가운데 민주납부에 더 강조점을 뒀다. 즉,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 승리를 위한 핵심 고리는 대중적인 민주납부 조직에 달려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은 1989년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 경험에 바탕을 두고 끌어낸 결론이었다. 1989년 이후로 대다수 학생회 활동가들은 ‘등록금 투쟁=민주납부’라는 공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1989년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이 대체로 승리했기 때문에 그 동안 어느 누구도 민주납부의 효과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1992년 이후로 민주납부 운동이 1989년 만큼 효과를 거둔 적은 없다. 해마다 학생회 활동가들은 민주납부를 조직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 다녔지만 대중적으로 조직하지도 못했고, 학교측의 반응도 겁을 먹기보다는 되레 강경책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일까? 민주납부가 등록금 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주장은 과연 진실인가?
올해 등록금 인상 반대 싸움의 특징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올해 등록금 투쟁은 3월 22일 경희대 학생들이 대중적인 대학 본관 점거 농성에 성공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곧이어 여러 대학들에서 대중적인 점거 농성의 물결이 일었다.
교육부가 4월 11일 대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기숙사, 장애 학생 편의시설 등을 대폭 확충한다는 내용의 학생복지대책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대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무마책이었다. 물론 이 대책은 예산확보 계획조차 없이, 4·13총선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발표된 “총선용 대책”이기도 했다.
또, 경희대 학생들의 점거 농성 이후 각 학교들은 그 때까지 보였던 고압적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리고 등록금을 제외한 다른 요구는 수락하겠다며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태도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정 안 되면 7%까지 등록금 인상률을 낮출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을 사립대학들이 정한 것도 이런 대중적인 점거 농성에 압력받은 바 컸다.
이처럼 올해 경희대 학생들은 민주납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중적인 점거 농성으로 가장 전투적인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대학들도 상황은 엇비슷했다.
이것이 민주납부가 의미 없는 투쟁 방법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등록금 인상 반대〉 신문에서 민주납부를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장하고, 대중적인 점거 농성보다 더 효과적인 투쟁 방법인 양 부풀린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납부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상황에서 효과를 내는가? 민주납부는 학생들이 학교측이 감행할지도 모를 불이익을 감수할 태세가 돼 있다는 점에서 전투적인 저항의 표시이긴 하지만 그것이 저절로 집단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등록금 인상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개인들이 등록금 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 반면, 점거 농성은 집단적인 투쟁 방법이기 때문에 훨씬 더 커다란 효과를 낼 수 있다.
민주납부에만 의존하면 자칫 민주납부를 하지 못한, 그렇지만 등록금 투쟁에 참여할 열의가 있는 학생들을 방관자로 남겨둘 위험이 있다. 만약 대중적인 민주납부 조직이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가들이 민주납부에 배타적 강조점을 둔다면 이런 위험은 더 커질지 모른다.
그러나, 점거 농성은 신입생이든 재학생이든, 등록금을 냈든 안 냈든 간에 등록금 인상에 불만을 갖고 있는 모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고무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물론 민주납부를 대중적으로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면 학생들의 협상력을 높여 등록금 투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보탬이 된다. 민주납부는 사회 세력 관계가 충분히 우리에게 유리할 때 대중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만 적절히 조성된다면 민주납부는 어렵지 않게 조직할 수 있는 투쟁 방법이다. 1989년에 많은 학생들은 학생회 활동가들의 각별한 노력 없이도 쉽게 민주납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도 민주납부가 점거 농성 같은 대중 행동의 효과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때조차 민주납부를 점거 농성과 결합하려 노력할 때만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학교측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등록금 인상 반대〉 신문은 점거 농성과 민주납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동당 서울지역 학생위원회 회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했다.
즉,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은 점거 농성보다 민주납부를 우위에 두는 혼란으로 말미암아 3월 초중순 대부분의 대학에서 민주납부 운동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암암리에 올해 등록금 투쟁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비관적 전망을 갖게 됐다. 그럼으로써 다른 학생회 활동가들의 동맹휴업 조직 노력에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물론 이런 오류는 오래지 않아 교정돼 대부분의 당원들은 점거 농성에 적극 참여하고 점거 농성의 확대·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말끔히 정리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글이 지난 3∼4월 동안 우리 자신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필요한 물음을 던져주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촉발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소기의 성과는 달성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