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시험
〈노동자 연대〉 구독
자본주의와 시험
수능시험 도입 이후 처음으로 올해 수능시험에서 복수 정답이 나와 큰 소란이 벌어졌다. 유명 학원강사가 수능 출제위원으로 참여했고, 수능 문제 지문의 일부가 그가 지은 참고서에 나온 것과 비슷해, 이번 수능시험은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됐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학생들의 순위가 결정되고 1~2점 차이로 대학 입학 당락이 바뀌는 상황에서 복수 정답 문제는 학생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이런 경쟁 압력 때문에 올해도 성적을 비관한 수험생이 수능시험 당일에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보수 언론들이 집값 상승과 사교육비 증가를 평준화 정책 탓으로 돌리면서 교육 제도에 대한 해묵은 논란이 터져나오고 있다.
특히,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평준화 해제로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다는 일부 학자들과 언론들의 주장에 솔깃하기도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교수는 “학교 정책과 과외의 경제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오히려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이 과외를 줄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에 고교 평준화 제도를 도입한 취지가 당시의 ‘과외 열풍’을 잠재우겠다는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68년에 도입된 중학교 평준화로 중학교 입시 문제는 해소됐지만, ‘명문고’에 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 문제가 발생하자 그 대안으로 고교 평준화가 도입된 것이다.
결국 초등학교 때부터 존재하던 입시 경쟁이 평준화 정책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로 점차 미뤄졌을 뿐, 대학이 서열화돼 있고 명문대 출신들만이 우대받는 현실에서 명문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경쟁은 사라질 수 없었다.
따라서 고교 평준화를 해제할 경우 이른바 ‘명문고’에 가려는 중학생들의 사교육 수요가 크게 늘고 대학 입시가 고교 입시로 앞당겨질 뿐, 사교육비 규모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경기도 교육청이 평준화 전과 후를 조사한 결과는 “사교육이 평준화 여부와는 크게 관련이 없고, 인구와 경제적 수준 등 다른 요인과 관련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한겨레21〉 484호 2003년 11월 13일치).
명문
사교육 열풍은 자본주의 교육 제도의 한 단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목적은 생산을 조직하고 운영할 소수와 위에서 결정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을 수행할 다수를 분리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구실을 한다. 비록 공공연하게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교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계급 사회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데 이바지한다. 교육 제도를 통해 학생들은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주의 질서의 ‘정당성’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리하여 시험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여겨진다. 지배계급은 학생들이 경쟁에서 이기면 자신들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교육을 통해 주입시킨다.
따라서 이 나라 지배자들이 현재 교육 제도의 최대 문제인 대학 입시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인 대학 서열 철폐를 시행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경쟁의 전도사들인 이들은, 시장 경제 논리를 훼손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인 대학 평준화보다는 ‘학원 신도시’ 건설이나 ‘학교내 과외’ 등의 미봉책만을 남발하거나, 부자들의 선택권을 늘려 줄 ‘자립형 사립고’에만 관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교조와 진보적 교육 단체들이 주장하듯이, 대학 서열을 없애고 수능을 자격시험으로 대체하는 방법은 분명 진일보이다. 이것은 학생들의 경쟁을 완화시킬 것이고, 그들이 좀더 자유롭게 활동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경쟁의 논리에 빠져 있고 교육이 경쟁적인 노동시장의 영향을 직접 받는 한, 학생들의 경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시험이나 평가를 통해 학생들을 등급 매기지 않고,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교육은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강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