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윤리강령에 붙여
〈노동자 연대〉 구독
회원윤리강령은 회원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사례들을 포함시키겠다는 결의론(決疑論) 방식을 처음부터 배격하고 주요 차별 형태들(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신체적·정신적 조건 등에 따른)과 관련된 부적절한 언행들에 집중했다.
돌아보건대 지금까지 우리 단체는 그저 외향하며 앞만 보고 달려 온 정치적 삶을 사는 경향이 있었다. 바깥의 사회적 갈등에 관여하고 특히 노동계급 투쟁에 동참하는 일에 전념하느라, 뒤를 돌아보거나 회원 개인 간의 관계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은 다소 부차화된 면이 있었다.
지난 몇 년 간의 경험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좀 더 민감해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성폭력 (2차가해) 단체’라는 모함을 겪었다. 게다가 성폭력에 초점을 맞춰 남성 개인들을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레닌주의적 정치와 조직을 혐오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극도로 파편화돼 개개인들이 서로 소외돼 있고, 개인주의적·이기적이고,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상대주의와 실용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우리가 새삼 절감한 또 다른 점은 우리도 우리 주변 세계로부터 면역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혁명적 조직의 회원들도 계급 전체의 불균등성을 다소 내면화한다. 그래서 대중 다수의 다소 낙후된 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지난 몇 년 간의 경험 때문에 체감 정도가 갑자기 올라가서 새삼 통감한 일일 것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인내력이라는 덕(德)뿐 아니라 개인들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도 필요하다. 개인들 간에 껄끄러운 반목이나 갈등투성이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특히, 거의 전적으로 성폭력 문제에 집중하다시피 하며 남성 개인들 탓하기 바쁜 종류의 급진 페미니즘과 논쟁하다 보면 일부 회원들이 개인적 성인지감수성을 무시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개인적 성인지감수성에 몰두하는 그런 페미니즘이 개인주의적이라면, 개인적 성인지감수성을 무시하는 태도는 둔감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둔감한 자들은 여성이 사회에서 받는 차별 때문에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한 뒤에도, 특정 남성들에 의한 개인적 천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 회원들이 가족(가정)이나 학교 또는 직장 등에서 가끔 또는 자주 느끼는 차별(받는다는) 감정을 단체 안에서 동료 회원이나 지도부에게서도 느끼게 돼서는 안 된다.
또한 좋은 사회주의자는 개인주의는 배격해도 개인 자립(자주성)과 개성은 결코 배격하지 않는다. 개인주의가 제멋대로 행동하기와 이기주의를 뜻한다면, 자주성과 개성은 사회주의 정치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회원윤리강령이 작성됐다. 회원윤리강령을 형식적으로 지킨다고 해서 회원 간 반목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령 전체와 그 개별 규정에 담긴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의 요체는 회원 간 정치적 신뢰이다. 레닌은 민주집중(민주적 중앙집권)주의에 관한 백 마디 말도 당원 간 정치적 신뢰를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물론 특히 문제가 되는 경우는 능력 부족인 조직자의 존재다. 이 경우에 바람직한 개선 방안은, 그람시가 말했듯이, “지도는 지배[통제]가 아니다”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지도’를 ‘지배’(통제)로 오해하면, 지도하는 처지에서는 직장 상사처럼 굴기 십상일 것이다. 진정한 지도는 (토니 클리프가 비유했듯이) 파업위원회에 속한 동료 파업위원들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거기서의 리더십은 무오류라고 상정하지 말아야 하고,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상명하복 관계와 비슷할 수도 없다. 서로 건설적으로 토의하고 논쟁하며 협력하면 되는 것이다. 논쟁 때문에 협력을 안 하고, 협력을 위한다며 논쟁을 피하는 것은 둘 다 건설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인 결과와 관계를 낳을 것이다.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다면 회원윤리강령은 당신의 훌륭한 조언자가 돼 줄 것이다.
2020년 2월 10일
노동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