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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상헌 교사의 스쿨미투 토론회 발표문:
지속가능한 스쿨미투, 성평등문화를 향한 학교의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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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스쿨미투, 성평등문화를 향한 학교의 역할은?
- 관료적인 스쿨미투 교육행정을 극복하는 학교민주주의의 길은?
(2019.05.13.전교조 광주지부 토론회 발표글)
배이상헌(광주교육연구소. 도덕윤리 교사)
1.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한 미투의 의미) 2018년 한국사회는 ‘미투’의 장엄한 드라마였다. 미투는 촛불항쟁의 연장선에서 촛불정부가 제공하는 한국사회 혁신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기준이 되었다. 법조계, 정치계, 문화·예술계는 성평등의 문화를 얼마나 실체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일과성 위선의 세일폭탄이 아니라 성평등한 삶을 향한 실질적 가격인하의 의지가 있는가를 따졌다. 미투의 화살은 한국의 공교육을 향해서도 ‘스쿨미투’의 이름으로 날아왔다.
2.(미투와 스쿨미투의 관계) 스쿨미투는 미투의 지속성과 보편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특정 영역이나 직장문화가 아닌 대한민국 차세대의 전체가 속해있는 공교육 현장에서 성평등이 미래가 아닌 현실세계의 작동원리로 체험된다면 얼마나 멋지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공교육 행정의 선물일 수 없다. 공교육 스스로 변화·혁신하는 갈등체험을 통해 이를 극복해낸 학생·교사·학부모·지역사회의 변화발전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3. (학교의 과제) 일거에 모든 것의 변화는 어려울지나 스쿨미투는 교사의 일상 언어나 학생과의 만남이 구태의연한 젠더체계에서 벗어나 평등세상을 향해 더욱 엄격해질 것을 요구한다. 학교교육과 교사집단은 학생들이 성차별의 젠더체계와 왜곡된 성문화 속에서 살아갈 고통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교육활동의 목표와 전개, 그 모든 영역의 일반적 과제로 반영해야 할 것이며 구체적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학교폭력 관련한 학교의 교육활동체계와 비교해보자) 스쿨미투를 모호한 일과성 교훈이 아닌 학교사회의 작동원리의 무게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학교사회와 교육활동을 설계해야 한다. 비단 학생만의 문제가 아닌 교사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스쿨미투 전수조사설문으로 다수 교사가 직위해제된 인천 모 학교의 여선생은 ‘여자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수업 중 발언이 여성 혐오 발언으로 고발된 사례이다. 광주 D여고에서 직위해제 된 수학교사가 ‘통계’를 가르치며 ‘한국사회의 합계 출산율이 2.1이 되기 위해 여러분들이 2명의 아이를 낳고 몇 명은 3명을 낳아야 한다.’라고 예를 든 것 또한 혐오발언으로 고발된 사례이다. 그것은 공공의 자리에서 진행된 발언이고 충분히 오해의 여지가 있으나 교사 또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민감해진 학생과 우리 사회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함에서 초래된 문제였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위의 관련 교사들은 오랜 직위해제로 물심양면 많은 상처를 입었고 다행히 경찰에서 무혐의처리 되었지만 교육청은 이들을 다시 공무원 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성비위로 징계를 집행하고 있다. 과잉행정이나 탈선행정은 아닌지 충분히 우려스럽다. 그럼에도 다중을 접하는 교사의 성역할 언행이 갖는 영향력에 대한 엄중한 단속과 자기 검열, 교단문화의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스쿨미투의 화살이 겨누는 메시지는 더욱 폭넓게 새기고 긍정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물론 스쿨미투가 지지·확산되는 배경은 학교현장에 잠재된 해묵은 성추행과 성희롱 문화이며 이를 용인하고 침묵했던 학교문화와 교육행정의 쇄신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염려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스쿨미투의 과정에서 개인의 성비위는 마땅히 심판되어야 하며, 왜곡된 성문화는 시급하고 중차대한 혁신과제로 학교사회에 부각되어야 한다.
4. 〈관료적 스쿨미투의 문제〉 염려와 우려는 스쿨미투가 아니라 스쿨미투에 대응하여 도마뱀 꼬리자르기식 일벌백계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교육행정이다. 학교는 익명의 공간이고 다중의 공간이다. 지금까지 학교문화는 학생을 ‘제자’라는 사제 휴머니즘으로 일원화했지만 학생은 급식의 힘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수업에 들어오는 십여 분의 교사 중 단 한 두 분의 교사로 인해 학교생활에 희망을 느끼며(학생마다 대상교사는 다르지만), 약간의 동아리활동과 몇 명의 친구로 인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학생들이 다수이다. 교사의 선의가 분명해도 학생은 얼마든지 불쾌하고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 학교이다. 나와 같은 도덕교사가 정규교육과정에서 가르치게 되어 있는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듣는 학생에 따라선 앞뒤 맥락 없이 불쾌감과 혐오로 반응하고 기억하며 이를 설문으로 신고할 수 있는 곳이 학교이다.
학생들이 교사들의 어떤 언행에 거리감을 느끼고 혐오를 느끼는지 확인하기 위해 학생 전체에게 설문하는 전수조사는 필요하고 혹은 확산되어야 한다. 학생들 스스로 학교의 주체로서 존중받는 가운데 학생자치시스템을 통하여 마땅히 추방하고 쇄신해야 할 교사언행을 엄중히 학교에 전달하는 절차를 운용할 수 있다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또 교사들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반성하고 주의할 점을 찾기 위해서 공적인 절차를 따라 익명의 학생글을 검토하고 성평등한 학교를 위해 결의할 사항과 학생들과 소통할 지점을 판단하는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 스쿨미투에 대응하여 교사와 학생의 만남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려는 교사의 노력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학교모습처럼 교사를 향한 징벌과 공포, 학생 개개인의 설문에 근거한 신고와 보호주의만으로 성 평등한 학교문화가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학생은 학교사회에서의 성장체험을 통해 이후 자신이 살아갈 사회와 직장에서도 성평등 세상을 가꾸어가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보호의 대상은 교육청의 실적이나 청렴, 행정권력이 아닌 학생이며, 학생의 성주체성이며, 학생집단의 자치적 대응력까지 포괄하는 학생의 인권이다. 학생의 왜곡된 성문화로부터 학생을 보호하는 것은 학교의 당위적 역할이기에 세심한 판단과 정책, 행정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교육청의 역할 또한 중차대함을 지적하는 것은 몇 번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스쿨미투 행정은 오히려 교사-학생간 인격적 관계맺음과 소통을 포기할뿐더러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스쿨미투에 대한 백레시(backlash)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크다. 신고에 이은 사법절차 의존한 해결과정은 성비위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이며, 성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 그것은 처방의 여러 방도 중 하나일 뿐이다.
사법절차와 행정징계의 경우학생의 신고에 대해선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 확인과 혐의 교사의 진술 절차를 확보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경찰에 수사의뢰를 해야 할 사안과 학교운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을 판단하는 학교와 교육청의 협의는 꼭 필요하다.
5. 학교 교사들에게 교육부와 광주시교육청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의 매뉴얼에 근거 책임추궁 당하지 않고자 자기보신에만 급급하는 것처럼 비친다. 학교조직과 학교문화의 특수성에 근거한 적용규칙과 운영매뉴얼을 법제화하는 노력도 없고, 스쿨미투의 학생자치력을 높이고 학교를 성평등한 공동체로 가꾸는 세부적 조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영혼도 느껴지지 않는다. 학생도 학부모도 원하지 않는 경찰수사를 교육청이 막무가내로 고소해놓고 무혐의가 되면 고소당했으니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했다고 징계하겠다고 한다. 이는 교육청이 과잉행정의 책임추궁을 회피하고자 일을 키우는 탈선행정의 혐의가 짙다.
6. 2019년 스쿨미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쿨미투의 정치학에 관심을 갖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하지 않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우슈비츠의 극단적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고발하는 이유는 ‘학생보호’ ‘단호한 대처’ 등과 같은 요란한 슬로건과 일벌백계 속에 감추어진 무능행정 보신행정 탈선행정의 관료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는 스쿨미투로, 스쿨미투는 행정의 전문성과 학교운영의 자치력으로 일신 우일신해야 한다. 스쿨미투는 학교의 민주주의, 교육행정의 진보를 진정으로 검증하고 인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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