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 반민주ㆍ반노동자 '소신'으로 보내 온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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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2년 정도 앞둔 지금, 각종 일간지와 주간지는 이회창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자신을 뽑아 준 대중의 열망을 저버리고 앞으로도 지난 3년처럼 환멸만 자아낸다면 급진화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의 청와대 입성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회창은 법관,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시절의 '대쪽', '참신함', '개혁성'의 이미지로 주가를 올렸다. 1994년에 김영삼이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였던 이회창을 넉 달만에 경질하고서도, 2년만에 이회창을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은 그의 이런 이미지를 팔아 15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뒤 신한국당 대표와 1997년 대선 신한국당 후보를 거쳐 지금의 한나라당 총재가 되기까지 이회창의 '대쪽', '참신함', '개혁성'의 이미지는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이 나라의 부패하고 더러운 정치판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회창은 애초에 '대쪽', '참신함', '개혁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회창은 4·19 혁명 직전인 1960년 3월에 판사가 됐다. 그 후 그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아래서 승승장구해 전두환 군사정부 초기인 1981년 4월에 대법관에 임명됐다.
법관 시절 이회창의 전력은 반동적 행위들로 가득차 있다.
'소신'의 본질
이회창은 지방법원 판사로 있을 때 5·16 쿠데타 지지 성명에 서명했다. "마지 못해 이름만 올렸다."는 변명과 달리 그는 25세 나이에 박정희의 '혁명재판소'에서 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심판관으로서 군사 재판에도 적극 협조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정부가 4·19 혁명 뒤 창간된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한 사건의 심판관이었던 이회창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71년 7월,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반대해 서울 민사·형사 지방법원 판사 전원의 사표 제출로 시작된 제1차 사법파동 때에도 이회창은 '대쪽' 이미지가 무색하게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대가로 그는 안정적인 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 3공 이후 최연소로 46세에 대법원 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 공로로 1985년 전두환으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전두환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1987년 6월 항쟁 당시 많은 변호사들이 항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항의 성명에 서명할 때, 이회창은 변호사로 있으면서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이 민주주의,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노태우는 이에 대한 대가로 그를 다시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당시 진보적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한 노태우의 민정당이 주도한 '민주화합 추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이 위원회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다가 복역, 재판, 수사, 수배중인 인사에 대해 석방이나 감형과 함께 특별 사면과 조속한 재판 및 기소 유예, 수배 해제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회창은 "사법부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리고 1988년 제2차 사법파동 때에는 "사법연수원생까지 서명에 동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 편을 들었고, 1989년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보낸 혐의로 구속된 남국현 신부의 상고에 대해서도 당시 대법관으로서 주심을 맡았던 이회창은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회창이 민주주의가 압살됐던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은 그의 이러한 보수적 본질 때문이다.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시절에 이회창은 '대쪽' 이미지를 얻었다.
1989년 중앙선관위원장 시절 이회창은 동해와 영등포 보궐선거에서 당선자, 후보자, 선거사무장 전원을 불법선거 혐의로 고발했다. 당시 동해 보궐 선거에서 5천만 원에 공화당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민주당 서석재 사무총장은 1993년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이듬해 국무총리가 되자마자 서석재를 사면 복권시켰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감사원장이었던 이회창은 의혹이 짙던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평화의 댐'과 '율곡 사업'을 감사했다. 이회창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안기부를 조사 대상에 올리는 개혁적 이미지로 주가를 올렸다. 그러나 이회창은 1997년 15대 대선 신한국당 후보 시절,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 대통합의 차원에서 사면할 것을 주장했다.
반노동자적
그의 '소신'·'대쪽'은 일관되게 반노동자적이다.
"제3자 개입 금지를 규정한 노동쟁의조정법 제13조의 2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이것은 1990년 대법관 이회창이 판결한 대법원 판례다. 이로써 이회창은 수많은 활동가들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 대표적 노동악법인 제3자 개입 금지의 법률적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이회창은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 날치기를 주도한 자이기도 하다. 전국민적 분노를 자아낸 만행에 대해 이회창은 뻔뻔스럽게도 "적법성은 갖추었다고 본다."(1997년 6월 7일, SBS)고 말했다. 나아가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와중에도 이회창은 "우리 경제를 살리자는 바탕에서 개정되었다."(1997년 1월 6일)며 개악된 노동법을 변호했다.
그는 재벌의 변호자이기도 하다. 이 점은 대우그룹의 고문 변호사 노릇을 한 전력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을 부패정권이라 비난하지만 그 자신이 누구 못지 않게 부패한 자다.
지난 총선 당시 이회창은 여당 선거를 두고 불법·관권·금권·타락 선거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대선 당시 선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세청까지 동원했다.
이회창 진영은 삼성, 현대, 대우, SK, 동부, 진로, 쌍용 등 25개 대기업으로부터 밝혀진 것만 167억 원을 모았다. 특히 이회창은 삼성으로부터 대선 훨씬 이전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 이회창 동생 이회성은 1997년 9월부터 11월까지 단 몇 달 동안 네 차례나 거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당시 이회창에게 현대·삼성 등 대기업의 돈줄을 연결시켰던 전 국세청 차장 이석희는 여전히 미국 도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