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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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점령
이라크에서 내전이 우려돼 점령군 철수를 지지할 수 없다?
지난 11월 27일 조지 W 부시는 이라크를 방문했다. 정확히 말해,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들렀다.” 그는 겨우 두어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이 방문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홍보전이었다. 신문에는 부시가 칠면조와 각종 음식이 가득한 쟁반을 든 채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렸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졌듯이 이 음식들은 플라스틱 모조품이었다.
이 작은 사건은 부시의 이라크 점령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겉으로는 기름지고 풍성해 보이지만 실제로 먹을 수는 없는 것. 부시는 이라크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고 민주주의와 번영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라크의 현실은 악몽이다.
세계의 다수 사람들은 미국의 점령이 잘못됐다는 점을 알고 있다. 미국에서도 점령이 잘못됐다고 믿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어섰다.
그러나 점령에 반대한다면서도 미군 철수를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미군이 철수하면 이라크 내에서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것은 미국의 우익들이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펴 온 주장이었다.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이라크는 환자고 우리는 의사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비판적 안목으로 유명한 로버트 피스크조차 미군 점령에는 반대하면서도 새로운 점령(다국적군)에는 찬성한다. 그는 “만약 [미국이] 국제사회와 책임을 나누지 않으면…이라크는 내전에 빠져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분열
이런 주장은 언뜻 보면 그럴 듯하다. 이라크는 종교, 종족 등으로 분열돼 있는 복잡한 사회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교적 분리다. 이들은 대부분 아랍인이다. 북부에는 쿠르드족이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거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나뉘어 있다. 수니파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소위 “수니 삼각지대”에, 시아파는 바스라를 중심으로 남부에 집중돼 있다.
이들의 분열은 순전히 종교적 교리 문제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20세기 내내 이들은 서로를 억압하고 살육하는 데 동원돼 왔다.
영국 제국주의는 1917년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을 점령한 후 인도에서처럼 종교간 분할 통치 전략을 사용했다. 영국은 소수 수니파 지배자들을 권좌에 앉히고 다수 시아파를 억압하도록 조종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담 후세인은 이 전략을 반복했다. 시아파가 있는 남부 지역은 개발 계획에서 계속 소외됐고 시아파는 정치적 억압을 당했다.
1991년 걸프전 종전 후 남부에서 시아파가 봉기했을 때 후세인은 수니파 군인들을 동원해서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한편,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쿠르드족은 제국주의와 이라크 지배자들의 억압에서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이들의 자치 염원을 이용하고는 버렸다. 후세인은 이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때때로 이들의 분노는 이라크 내에 있는 “아랍인” 전체에게 향하기도 했다. 이번 이라크 전에서 쿠르드군은 모술로 진격한 후 수백 명의 “아랍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분열은 각 집단의 지배자들이 이러한 분열을 유지하는 데서 이득을 취해 왔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앞으로 이들 지배자들이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위해 서로 총구를 겨누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해서 미국이나 다국적군에 의한 점령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점령은 이러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 미국이 추진하는 “이라크화” 정책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베트남화” 전략의 재연이다. 이것은 저항 세력에 맞서 이라크 안에서 부역자들을 대거 만들어 내려는 시도이다. 미국은 시아파 내에서 부역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라크 군대는 종파에 근거해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지배 전략은 20세기 초·중반 영국 제국주의나 그 뒤 후세인의 지배 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미국은 분열 지배 전략을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베트남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이러니이게도, 지금 수니파와 시아파를 단결시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미 점령군 자신이다. 미군이라는 공통의 적은 둘이 단결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이것은 이라크에서 미군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자결권
미국은 점령 이후의 정치적 전략을 진지하게 준비한 적이 없다. 럼스펠드는 자신이 “국가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시 정부 내에서 이라크 점령 후 정치적 작업에 대한 논의는 공격 개시 3주 전에야 시작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규모 군대로 거대한 나라를 지배한다는 야망은 미군을 사나운 늑대로 만들었다. 미군이 투하한 “스마트” 폭탄이나 미군이 쏜 총알은 “스마트”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시아파를 피해서 수니파만 명중하지는 않았다. 미군 폭격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는 미국의 부역자 명단에서 1순위인 남부 시아파 주거지였다. 나자프에서 미군 총탄에 쓰러진 시위대도 시아파들이었다.
따라서 저항 세력이 후세인의 근거지인 “수니 삼각지대”에 한정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최근에 〈보스턴 글로브〉는 저항 세력의 공격 중 40퍼센트는 수니 지역 외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존 필저는 시아파들이 조용히 저항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아파 저항세력이 수니파와 결합하는 그 날로 미군 점령은 끝장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시아파와 수니파가 단결할 수 있다면 제국주의 열강에 휘둘리지 않고 쿠르드족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둘의 단결이 어떤 조건에서 더 수월할 것이냐는 점이다.
분열이 통치의 조건인 제국주의 점령 하에서? 아니면 이라크인들이 점령군을 몰아내고 자결권을 획득한 후에?
점령이 종결된 후 이라크의 모습이 어떨지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종교간 분리선이 정치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종파에 근거한 내전이 자동으로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다. 이라크 대중은 종교간 분열이 이라크 정치의 핵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증거가 있다.
옥스퍼드 국제조사(ORI)가 최근에 발표한 이라크 내 여론조사에 따르면 70퍼센트의 사람들이 종교지도자에 신뢰를 보내지만 역시 70퍼센트가 종교는 오직 개인의 문제라고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오직 12퍼센트만이 종교적 원칙에 따라 정부가 구성되는 것에 찬성했고 90퍼센트가 민주적 정부를 원했다. 이라크 사람들은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이라크 사회를 바란다.
조지 W 부시는 “외부 테러 세력”이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안정을 해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 외부 세력은 무려 14만 6천 명이나 된다. 그리고 그들은 미군 군복을 입고 있다.
생각해 보자. 이라크인의 이라크와 14만 6천 명의 “외부 테러 세력”이 주둔하는 이라크 중 어느 것이 종교간·종족간 단결과 민주주의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겠는가?
우리는 점령군의 즉각 철수를 주장하고 이라크인들의 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
유엔군이 주둔해야 하나?
조지 W 부시 시대 미국 제국주의의 특징 하나는 막가파식 일방주의이다. 부시는 이전 대통령들처럼 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다자간 틀”을 사용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세살배기보다도 참을성이 없는 제국주의자다.
그렇다 보니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유엔 같은 “다자간 기구”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 중 미군 철수 후 이라크에서 내전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내전을 막기 위해 유엔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라크인들의 정서와는 도통 맞지 않는다. 이라크인들은 “미국의 일방주의 대 유엔의 다자주의” 구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8월에 유엔 건물에 대한 공격이 있은 후 로버트 피스크가 지적했듯이, 이라크인들은 굳이 미군과 유엔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전 유엔 인도주의 구호담당관이던 데니스 핼리데이도 같은 점을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미국은 13년 간 이라크를 공격하고 이제는 점령하고 있고, 유엔은 미국의 전쟁을 승인하고 1백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제 제재도 승인하고 감독했다. 이라크 내에서 유엔이 두 차례나 공격당한 것은 이러한 정서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현재 미군 점령을 지원하고 있는 이탈리아나 폴란드 군이 파란색 유엔 헬멧으로 바꿔 쓴다고 해서 갑자기 평화의 사절이 됐다고 믿을 이라크인은 없다. 전에 중동을 지배했고 지금은 이라크 석유에 눈독을 들이는 프랑스·독일 군이 유엔군으로 온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들은 제국주의 점령군일 뿐이고 그것이 바로 이라크인들의 정서다.
우리 운동이 형태만 다른 제국주의 점령을 지지할 이유는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