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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교사의 무한권력과 체벌은 철폐돼야 한다

경기도 교육청이 “학생 체벌 금지”를 각 학교에 시달해 논란이 불거졌다. 보수 신문은 ‘교실 붕괴’를 빌미로 연일 특집 기사를 실었다. 대부분이 교실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장면, 교사에게 폭언을 가하는 장면, 혹은 음란한 단어를 내뱉은 장면 등을 예로 들어 ‘체벌을 못 하니 통제가 안 된다’라는 내용이었다. 교실 붕괴에 관한 이성적, 합리적 분석을 하는 기사는 거의 볼 수 없었다.

한편, 직접체벌이 금지되자 간접체벌이 문제가 됐다. 이른바 ‘5초 엎드려 뻗쳐’가 대표적인 간접체벌의 사례다.

나는 교실 붕괴 현상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실 붕괴가 체벌 금지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검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체벌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체벌과 관련해 고3 교사가 누리는 무한한 권력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체벌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고3 교사에게는 학생을 통제하는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다. 비단 고3 교사 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에게도 체벌은 학생을 통제하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3 교사들은 대학이라는 학생의 ‘미래’를 담보로 해 ‘교사 지시 불이행’ ‘복장 불량’ 등의 명목으로 손쉽게 학생들에게 ‘탄압’을 가할 수 있다.

이처럼 체벌과 고3 교사의 전제적 권력은 비합리적인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체벌은 학생의 제 권리를 보호하는 데 명백히 위협적인 존재다.

나는 체벌과 관련해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고발함과 동시에 고3 교사에게 무서운 권력을 하사(下賜)한 비이성적인 사회구조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엎드려 뻗쳐’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영어교사인 C씨가 수업 도중에 반장인 L군에게 구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L군이 ‘그 이전에 만든 구호가 있다’고 말하자 당시 구호를 만들었던 당사자인 P군을 C씨가 불러냈다. 교사가 P군에게 구호가 있느냐 묻자, P군이 ‘친구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구호를 만드는 것은 시간 낭비 같다’고 주장했다.

교사는 P군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지X하네 지X’이라고 말하면서 J군과 부반장인 Y군을 불렀다. 교사는 Y군에게 ‘네가 구호를 만드는 장(長)을 맡아라’ 하고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Y군은 갑자기 장을 맡게 된 것을 당혹스러워하며 ‘거수 투표로 구호를 만들지 안 만들지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교사는 그러한 Y군의 의견을 묵살했고, ‘만들지 않을 경우 한 시간 내내 엎드려뻗쳐를 시키겠다’며 협박성 어조로 말했다. 마지못한 Y군은 ‘친구랑 쉬는 시간에 한 번 해보기로 했던 게 있다’라며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친구의 별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평소 ‘흑인’ 또는 ‘부시맨’이라 불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고 다니던 반장 L군과 G군의 별명이었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으나 C씨는 그러한 Y군을 못마땅하게 쳐다봤고, ‘싸가지 없다. 리더로서 자질이 없다. 교사 지시 불이행이다. 친구에게 상처를 준다’며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면서 Y군에게 40분 이상 ‘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이 사건은 체벌의 규정이 명확하지 않고, 교사의 권력이 무한한 상황에서 일어난 비극으로서 매우 부당한 사건이다.

첫째, 학생들의 암묵적 거절을 묵살한 채 교권을 휘둘러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학생의 의견을 배제했으므로 매우 비민주적이다.

둘째, 별명으로 불린 L군과 G군의 반응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처벌의 명목에 추가했다. 물론 친구의 별명을 이용해 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L군과 G군이 동의를 한 상태였으므로 ‘친구에게 상처를 준다’라는 명목을 추가한 것은 처벌의 근거로 매우 부적절하다. 또한, ‘싸가지 없다’라는 명목은 그 범위가 불분명하고,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사회의 관습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민주적이어야 할 학교에서 쓰이기에는 부적절한 근거다.

셋째, 한 행동에 비해 처벌 강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40분간 ‘엎드려 뻗쳐’를 하면서 Y군은 극심한 체력 소모를 느꼈다고 호소했다. Y군은 ‘엎드려 뻗쳐’를 하는 동안 팔에 무리가 갔는지 심하게 떨었고, 일어선 후에는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였다. 게다가 ‘싸가지 없다’ 등의 죄목으로 40분 이상 ‘엎드려 뻗쳐’를 시킨 것은 가혹한 처사임에 틀림없다.

체벌을 합리화하는 사회구조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의문을 품어보자. 과연 체벌, 특히 간접체벌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또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최소한계선은 무엇인가?

아직 이 물음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마다 학칙이 다르고, 체벌을 적용함에 있어 윤리적 요소를 고려하는지, 고려한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등은 교사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체벌에 관해서 사회적으로 공통된 합의사항을 도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체벌 문제는 청소년과 교육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체벌이 당연시되는 경향을 여기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구축해 왔다. 유교에서는 예법을 특히 강조하는데, 이 예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었기에 정책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체벌은 예법을 가르치고, 지키기 위해서 정당화됐다.

그러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칼을 찬 교사를 학교로 들여보냈고, 일본의 차별 정책에 따라 조선인에 대한 멸시, 차별, 폭력, 강요 등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군국주의적 일제의 정책 하에 군대식으로 운영된 학교 안에서 학생에 대한 폭력은 당연시됐고, 조선인 교사들 역시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체벌을 했다.

해방 후, 독재정권에 의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산업의 역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학생들은 주입식 암기를 강요받았고,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군대식으로 운영된 학교에서 암기경쟁에서 낙오하는 학생들은 가차없이 버림받거나 두들겨 맞았다.

사회가 갈수록 고학력화되고 ‘대학을 가야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면서, 학부모들은 엄청난 교육열의 광풍 속에서 성적으로 자녀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성적이 낮을 경우에는 부모들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거나 교사들에게 ‘우리 아이 때려서라도 사람 만들어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대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체벌’이라는 수단이 정당화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정착되어 있는 체벌 문화는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배움의 주체

직접 체벌이든 간접 체벌이든, 그것이 수반하고 있는 전제는 학생을 ‘교정해야 할 객체’로서 여길 뿐, ‘배움의 주체’로 여기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체벌 문화는 객체화된 청소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학생을 더 이상 ‘교정해야 할 객체’가 아니라 ‘배우는 주체’로서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행동에 있어 어느 정도 교정이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 교정을 위해 체벌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객체화된 청소년 앞에서는 체벌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지만, 주체를 가진 청소년으로 인정하는 그 순간 가르침의 대화, 배움의 대화가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로 인간의 주체성을 아주 정확히 표현했다. 바꿔 말해,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만이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학생 역시 이와 같다. 학생을 주체로서 인정할 때, 그들은 비로소 책임성을 지니게 된다. 객체화된 상태에서 체벌은 교정의 수단일 뿐이고 학생에게 진정한 책임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고통에 의한 수동적 교정에 불과하다. 주체로서 스스로 책임져야 함을 깨달을 때만이 진정 책임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교실 붕괴를 외치며 체벌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이들은 학생을 여전히 객체화된 존재로서 보고 있다. 거꾸로, 그들이 외치는 교실 붕괴는 오랫동안 객체로서 존재해 온 학생들이 느끼는 무력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입시와 체벌의 톱니바퀴

앞에서 고3 교사의 무한한 권력을 지적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간단한 분석을 해 보려고 한다. 나는 고등학생이며, 이 글은 고등학생의 시각에서 분석한 것이므로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으나, 거꾸로 학생들의 입장이 반영돼 있으며 동시에 현실적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고3 교사들이 누리는 불가침적 권력은 고학력화로 인한 입시 위주의 교육 실태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또한, 대학 간의 지독한 위계서열에 의한 사회적 학력차별 역시 그 원인임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학이 심각하게 서열화돼 있다. ‘서 연 고 서 성 한 중 경 외 시 건 동 홍 국 숭 세 단…’ 서울대가 독점적 1위이고 그 다음이 연세대, 고려대 하는 식이다. 거의 노랫말처럼 불리는 이 가사(?)들은 심각하게 서열화되고 고착화된 대학 위계질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학생들은 이 가사에 따라서 좀 더 높은 대학에 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런데 대학에 가려면 우선 성적이 좋아야 한다. 지필평가든 수행평가든, 어쨌든 학생들은 점수를 잘 받아야만 한다. 점수를 잘 받아야만 좀 더 높은 대학에 갈 기회, 그리고 사회에서 대접받으며 살아갈 기회가 생긴다.

대학마다 고3 성적을 제일 높게 반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3학년에서 점수를 1점이라도 깎인다면 크나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비록 교사들이 양심적이고 공정하다 할지라도 교사가 학생들의 평가권을 쥐고 있는 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선생님께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점수를 좀 더 잘 받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노력은 교사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수반하게 된다. 선생님이 부당하게 체벌한다 해도 항의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만약 교사에 대해 일체의 반항과 항명이 있다면 극단적으로는 대학 입학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스승의 얼굴을 빙자한 폭력의 그늘에는 학생들의 미래를 담보로 삼은 악랄하고 비이성적인 사회구조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앞선 M고의 실제 사례는 이러한 사회구조와 맞물린 교사의 무한권력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진보적인 배움의 장소가 되어야 할 학교가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 가장 점수를 잘 받는 법을 배우는 학교로 천락(賤落)하고 만 것이다.

학생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닌 점수를 받는 법을 배우는 학교가 있는 사회구조와 무한경쟁 속에서 승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비이성적 대학 간 위계질서는 과연 합리적인가?

대답은 당연히 NO다.

혹자는 ‘필자가 주장한 대로라면 사회구조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지금의 구조는 근본부터 바뀌어야 마땅하다.

만약 현재처럼 반지성적 위계질서와 상명하복형 사회구조가 깨지지 않는다면, 배움의 학도들이 가득해야 할 학교는 가르침을 빙자한 폭력의 장으로 변할 것이다. 학생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고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는 과연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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