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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 교육학: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한 교육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새부터인가 협력교육이 새로운 유행으로 뜨고 있다. 전교조나 진보적 교육운동진영에서는 한참 전부터 ‘협력교육’을 이야기해 왔지만 최근엔 ‘배움의 공동체’등 새로운 교육담론, 진보교육감들 심지어 제도권에서도 ‘협력학습’을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협력교육 담론의 유행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유럽교육위원회나 PISA(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 교육지표 관련 논의도 협력을 가장 중핵적인 지표로 설정하기 시작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협력교육 담론의 확산은 한국보다 더 먼저 더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학생들을 사기 저하시키고 발달을 저해하는 경쟁 교육이 아니라 진정한 협력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같은 협력교육 대세가 형성된 것은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에 대한 반발과 비판, 그리고 공생과 연대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이 함께 맞물리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협력을 강조하는 비고츠키 교육학의 이론적 공헌도 상당하다.

비고츠키 교육학의 부상

협력교육이 유행하면서 비고츠키 교육학 역시 함께 부상하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2000년대 이후 문화역사주의라는 새로운 교육학사조를 형성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경쟁교육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협력의 교육담론을 주도적으로 형성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비고츠키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최근 대안적 교육모델로 각광받고 있는 핀란드와 북구 교육의 기반이 비고츠키 교육학이고, 프레이리나 사토마나부 등도 비고츠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삼스런 관심과 조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고츠키 교육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경쟁교육과 대립되는 협력교육 패러다임이며 또 하나는 주지주의· 경험주의라는 오래된 교육학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통합적 교육 패러다임이다.

비고츠키 교육학은 ‘협력’을 통한 ‘전면적 인간 발달’을 추구하며 인간 발달을 사회와 역사와 인간의 총체적 관계로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 발달을 ‘주체와 세계’, ‘이론과 실천’, ‘개념과 경험’, ‘일상과 과학’의 변증법적인 상호작용 과정이라고 본다. 비고츠키 교육학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인간 발달을 총체적·역동적 과정으로 본다.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이 인간 발달에 사실상 무관심하거나 이론적으로는 양적 누적의 과정(학력, 학업성취도 등)으로 설명하는 것과 달리 비고츠키 교육학은 인간 발달을 교육의 중심문제로 놓고 다른 차원의 여러 과정(생물학적 계통발생의 과정, 역사문화적 과정, 개체발생적 과정, 미소발생 과정)이 결합, 상호작용하는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나선형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둘째, 교수·학습을 통일된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기존의 시각이 교수와 학습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학습자 중심주의나 교수 중심주의로 양분됐다면 비고츠키 교육학에서 교수와 학습은 한 과정의 두 측면으로 통일된다. 따라서 양자 간의 관계 형성과 상호작용에 초점을 둔다.

셋째, 협력을 통한 발달을 추구하며 협력이야말로 가장 효과적 발달 과정을 이룬다고 본다. 시장주의나 기존의 관점들이 경쟁을 인간 발달의 불가피한 원리로 한다면 비고츠키 교육학은 협력이 인간 발달의 중심 기제이자 조건임을 보여 준다. 인간의 고등정신기능 발달의 토대는 ‘사회적 관계’이며 문화역사적 발달의 토대 위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발달해 나간다.

넷째, 현재의 상황만이 아니라 발달 가능성을 중시한다.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이 모든 인간의 발달 가능성 대신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고 제도교육을 이를 확인하는 장으로 위치시킨다면 비고츠키 교육학은 모든 인간의 발달 가능성에서 출발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다섯째, 전면적 인간 발달을 추구한다.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은 인간 사이의 발달 가능성의 차이와 특정 기능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은 정신기능 사이 관계의 구조적 변화다. 따라서 인간의 발달은 개별적 기능의 독립적 발달이 아니라 정신기능들이 연결되는 연관된 발달이며, 정신기능은 인간의 의지·정서와 연결된 총체적 발달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 사람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조건을 형성하고 도와주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본다.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 비고츠키 교육학
인간발달 양적 관념, 혹은 무관심 발달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중심문제

사회관 능력주의 인간 발달의 문화역사적 토대
주요 기제 경쟁 모방과 협력
교육과정 구성 원리 지식의 위계 (학문 중심),

경험의 제공 (경험 중심)

고등정신기능의 형성
교육과 발달 학습 = 발달 (쏜다이크),

발달 후 학습 (피아제)

교육(교수 학습)이 발달을 선도
교사관 관리인, 보조자, 전달자 발달을 이끄는 선도적 협력자
학습자관 사회화의 대상, 독립적 학습자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객관적

지식(과학적 개념)을 능동적으로

내재화함으로써 고등정신기능을

형성하는 주체

평가관 실제적 발달 수준

확인, 비교(변별력 중시)

학습자의 발달에 대한 이해.

발달 가능성 중시. 교수학습의 일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

비고츠키는 발달이 인간의 본질적 요소이며 인간은 자신의 깨달음과 발달 과정에 기쁨을 느끼는 발달 지향적 존재라고 봤다. 또한 ‘주체적 사고’를 중시했는데 인간의 주체성은 ‘현상을 넘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개념적 사고’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봤다. 그리고 개념적 사고에 기반한 주체성만큼 자유를 획득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비고츠키 교육학은 주체성의 교육학, 행복의 교육학이라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과 민중의 지성화(주체화)를 추구한다.

비고츠키는 이러한 교육적 관점과 개념을 체계적으로 분석, 설명해 낸다. 아마도 비고츠키 교육학의 확산은 우선적으로 체계적 설명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협력을 단지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 발달에 불가피하며 가장 효과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체계적 분석과 설명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과학적 관점과 방법론에서 비롯한 것이다. 비고츠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자신의 저작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자신의 방법론을 ‘구조적·기능적·발생적 연구’로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의 발달과정을 구조, 기능, 발생과정의 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통일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비고츠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실질적 문제는 그 같은 철학, 방법론에 동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하고 실천적으로 승화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역사가 증명하듯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증법적 유물론에 동의하는 것과 실제로 그에 입각해 세계와 현상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는 민중의 교육학

신자유주의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리고 공생과 연대, 참된 민주주의, 협력적 창조의 방향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고츠키 교육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붕괴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교육학이라 할 수 있다. 비고츠키 교육학은 인간의 평등한 가치를 전제하면서 모든 사람의 발달과 주체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본질적이며 계급적이다. 또한 과학적 설명과 실천을 지향한다. 그리고 핀란드 등의 사례를 통해서 이미 일정하게 현실화되고 있으며 PISA나 유럽교육위원회의 미래의 교육에 대한 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관점과 내용, 학문적 체계성과 실천적 현실성 그리고 시대적 조건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비고츠키 교육학은 기본 관점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뿐 실제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는 교육담론과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구체적 실천의 문제다. 그와 관련한 문제를 간략히 제기해 본다.

우선, ‘탱자’ 비고츠키와 ‘귤’ 비고츠키의 구분이다. 다소 엉뚱하게도 비고츠키는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또 다른 교육학 사조의 원조로도 위치해 있다. 구성주의가 비고츠키의 내용을 일부 떼어 내 사회적 조건의 영향에 대한 뛰어난 설명력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구성주의는 ‘개별화 학습’ ‘수준별 교육’을 수용하는 것으로 비고츠키 교육학의 관점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쟁교육을 옹호하기도 한다. 왜곡의 결과이지만 아이러니이게도 비고츠키는 신자유주의를 떠받치는 흐름과 극복하는 흐름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주로 ‘탱자’ 비고츠키가 소개돼 왔고 따라서 이 둘을 구분하면서 비고츠키를 올바로 복권시키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교육담론과 실천을 조직하는 문제는 지금의 문화역사적 조건과 교육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내용과 대안, 행위를 만들어 가는 문제라는 것이다. 비고츠키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과 방향에서 구체적 이야기와 행위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올바른 적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