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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신화에 대한 도전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지배에 묶어 두고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대안적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비록 선택하는 방법은 유연할지라도 단호하게 행동하고 있다. 냉전에서 승리한 서방 지배자들은 자유에 관한 말은 줄이고(어떤 독재자를 악마로 만들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시장에 관한 말은 늘리고 있다. 우리는 시장이 아닌 대안은 없다는 말(소련의 붕괴와 중국 자본주의의 부흥을 보라는)뿐 아니라 시장력의 ‘세계화’ 때문에 국가의 조치나 노동운동의 행동을 통해 시장력을 길들이려는 시도는 가망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있다. 비극이게도, ‘세계화’는 “오늘날 좌파의 목을 누르고 있는 가장 육중한 이데올로기적 장애물”이자 반자본주의로부터의 후퇴와 패배주의에 대한 변명이라는 엘런 메익신스 우드의 규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좌파는 거의 없는 듯하다.1 킴 무디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세계화가 “설명하는 것 이상을 은폐해 왔으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무정형적 분석 도구’(69쪽)라고 언급하고 있다.

“세계화 담론”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변모하고 있는 외관 뒤에 있는 착취와 축적이라는 본질의 연속성을 신비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세계 경제는 실제로 좌파가 무시해 온 새로운 일들을 겪었다. 세계의 즉각적인 현상의 형태는 그 본질만큼이나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레닌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현상과 본질 간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좌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변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

1998년 여름에 열린 월드컵 결승전은 노동자와 대기업과 국가 간의 관계가 변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었다. 많은 봉급을 받지만 유연 노동자인 호나우두는 경련을 일으켰지만 네 시간 뒤에 나이키의 압력으로 의심되는 모종의 압력을 받고 경기에 출전했다. 브라질의 다국적 기업 스폰서인 나이키는 1억 2천5백만 달러의 후원금을 낸 덕분에 브라질 팀이 어디서 경기를 하고 누가 출전할지 결정한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했던 토스타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브라질을 통치하던 군 장성들이 팀을 선발하려 했다. … 지금은 스폰서, 기업인, 언론계 거물이 그 일을 한다.”2 이것은 변화지만, 우리는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결론을 끌어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숙련 노동에 의존하고 있고 결정적으로는 국제 경쟁 체제에 편입돼 있는 국민 (국가) 팀을 나이키는 후원해 왔다. 국제 경쟁 체제 속에서 다국간 자본주의 조직은 여전히 국가의 지원을 필요로 하며, 여전히 국가에 소속될 필요가 있다.

킴 무디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에서 국제 경제에 내재한 연속성과 변화의 변증법을 미묘한 뉘앙스로 설명했다. 그의 목적은 학자적인 말장난을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제물이 된 사람들의 처지를 탄식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목적은 노동자의 저항을 강조하는 데에, 세력 저울이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하게 변할 가능성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3 그는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실업자, 도시 주민과 농촌 주민,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북반구인과 남반구인을 막론하고 계급 전체의 선두에 서는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임무는 즉자적 계급이 국제적 차원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자각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가 계급 본능에 충실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나는 국제적 생디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디의 입장이 결국은 그가 원하는 종류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 전반부는 ‘자본의 공격’(제1부)과 ‘자본의 통치기구’(제2부)라는 표제 아래에서 세계 경제의 국제화 경향이 지닌 모순적 성격과 불균등성, 그리고 자본과 자본주의적 국가가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규제 방식을 다루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무디의 견해는 좌파들이 벌이고 있는 ‘초세계화’에 대한 점증하는 반격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초세계화론’ 대부분이 ‘세계적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4 1973∼74년에 자본주의가 고전적인 호황-불황 순환으로 복귀한 이래로 해외 직접 투자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을 인정하는 무디는 “오늘날 세계 경제의 통합이 그것에 선행했던 두 주요 시대(1870∼1914년과 1914∼45년)의 양상과 다를 뿐만 아니라 더 심화되고 있다.”(87쪽)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국제 경제가 완벽하게 통합된 전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전히 축적 과정의 중심으로 남아 있는 국민 국가들이 국제 경제를 종횡으로 교차하며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선진 경제들에서는 고용/생산의 무려 70퍼센트가 국내 시장(교육·보험·소매 등등)을 위해 충당되고 있다. 따라서 저임금 경제들이 적절한 사회 기반 시설[도로·항만·공항·통신·우편·용수·댐 ― 옮긴이]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국외의 저임금 경제들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드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지사들은 세계 산업 생산의 15퍼센트 가량을 생산하는 반면, 그 85퍼센트는 단일한 지리적 장소에 소재하는 국내 기업들이 생산한다.”5 다국적 기업이라기보다는 다국간 기업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묘사인 이 기업들은 국내 기반에 입각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더욱이 3장에 등장하는 불균등 발전에 대한 무디의 분석은 국제화가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세계적 균질화와도 거리가 멀었던 자본주의의 확산은 훨씬 더 많은 경제적 분절화를 낳았다. 시장의 지속적인 개방은 이것을 치유하지 못하며,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112쪽)

다양한 모순의 산물인 자본주의적 국가는 그러한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영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흔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모순들이 주로 국민 국가 내부에서 작용한다고 봐 왔다. 따라서, 재산법 체계 제공, 교육과 훈련, 사회 기반 시설, 은행 감독, 사회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 자본간 내분 중재 등등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감축 불가능한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기능들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223쪽.) 이것은 그 자체로 사실이지만, 언제나 국가는 자본처럼 국가간 체제 내에서 복수로 존재해 왔다. 가치 법칙이 국제화함으로써 ‘외적’ 조건이 국가의 내적 논리와 긴밀하게 맞물리는 상황에서 축적 조건을 보장하고 국제화를 중재하는 보증인으로서 국가의 의무는 강화됐다. 1970년대 초 이래로 축적과 이윤율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무역, 생산, 금융의 국제화가 심화하면서 초세계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국가의 중심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모순을 빚기는커녕 실제로는 강화된다. 국가가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세계의 지배 계급들은 규제의 요소를 IMF와 WTO 같은 국제 기구들로 상향 이동시켰지만, 그 기구들의 관할 영역은 지배 계급들 간의 협상과 조정을 통해 결정된다. 시장의 국제화는 경쟁의 국제화를 뜻하며, 따라서 개별 자본과 국민 경제들이 불안정을 일으키는 촘촘한 상호 작용 망에 더 크게 노출되는 것을 뜻한다. 심리적 갈등을 보이는 신경증 환자가 바깥 세계의 적대와 마주치면 이를 상쇄할 방어 수단이 필요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본의 갈등은 국가의 방어를 요구한다. 국가는 직접 생산처럼 케인스주의의 전성기에 습득한 몇 가지 역할을 버렸을지 모르지만, 대자본은 국가를 버릴 수 없으며, 국가는 여전히 자본이 갖고 있는 모순의 중심부에 남아 있다.

4장과 5장에서 무디는 린 생산[유연 생산],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해고 압박 경영], 비정규직 고용, 군살 빼기(‘다운사이징’), 적시 생산 등의 전략을 통한 자본주의 생산 구조조정을 분석한다. 그는 이런 일들이 1970년대 중반 이래로 개별 자본들과 국가의 결합된 권력이 노동 계급에게 가한 심각한 패배 뒤에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6 따라서, “북[북반구]의 노동자들 내에서 일어난 고용과 수입의 손실 중 상당수는 자본이나 일자리 수출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북의 나라들 자체의 비용 삭감 노력이 결합된 결과이다.”(93쪽.) 전후 호황이 가장 더디게 진행됐던 미국과 영국만큼 전후의 계급 타협을 해체하는 것이 자본에게 긴요했던 나라는 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충격은 이 나라들에서 가장 심각했다. 그러나 많은 좌파 출신 학자들이 시장과 블레어주의라는 사회민주주의의 ‘현대판’ 친시장 버전에 순응해 온 반면, 야수의 심장부에 가까이 있는[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방어하는 데서 더 큰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의 선두에 서 있었던 많은 자들이 포함돼 있다. 일본 정부가 자기 나라 경제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맹비난은 이제 이상스럽지 않은 일이 됐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휘발성과 불안정성이 케인스와 폴라니 같은 이론가들과 자본주의적 규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낳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위기는 국가 개입을 다시 자본의 의제에 올려 놓았다. 일본 금융 기관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미국의 투기성 단기자금 회사들에 대한 구제 금융 제공은, 그리고 한국이 기아 자동차를 사실상 국유화했다가 다시 현대에 매각한 것과 말레이시아의 이단아 마하티르의 자본 통제조차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

나는 ‘세계화’에 관한 무디의 분석이 지닌 요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믹 초세계화 이론가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본의 속성이라는 문제에서 명백히 틀렸으며, 무디는 옳게도 ‘세계화’보다는 국제화나 심지어 ‘삼극화[미국·일본·유럽간의]‘7가 더 적절한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디가 20년에 걸친 자본의 지배와 싸우자고 제안하면서 문제가 드러난다.

국제 경제 속의 노동조합

이 책의 후반부에서 무디는 국제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무디는 포스트모던주의자들과 이와 구색이 맞는 ‘계급의 종말’ 이론가들에 맞서 계급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충성을 보이고 있다. “노동 계급이 작업장의 급변에 따라 다양해지고 변화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학계나 다양한 미래학자들은 노동 계급을 끝난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침입하는 위기를 떠넘겨 받았을 뿐, 그러한 사치를 누려 본 적이 없다.”(238쪽.)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노동 계급이 기업의 계획에 저항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예컨대, 노동조합 관료들이 조직 불가능하다고 보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문제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는 옳게도 “실패한 좌파 정당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정당들이 설사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하다.

그는 자본이 사물이 아니라 죽은 노동과 산 노동 사이의 사회 관계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배는 완전할 수 없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서 출발한다. 분명히 자본과 자본주의적 국가는 노동 계급에게 패배를 안길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삶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산 노동은 자본의 필요와 충돌하는 의식, 전통, 기억, 감정, 열망을 가지고 있고, 노동 계급은 이를 통해 조직을 발전시킴으로써 기꺼이 싸울 수 있다. 헨리 포드가 자신은 손 두 개만 필요할 뿐인데 한 사람 전체를 고용해야 한다며 탄식했던 것도 당연하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구축돼 온 국제적 생산 연쇄[생산 사슬]는 분권화의 외관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다국간 기업들의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조정의 필요를 늘리고 있다. 무디가 지적하고 있듯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작은 단위나 고립된 생산 지역으로 이동하는 탈조직화된 파편화가 아니다. 오히려 소수의 거대 기업들에 의해 지배되는 명백한 위계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131쪽.) 객관적으로 볼 때, 적어도 노동자들은 일부에서 일어나는 파업에도 매우 취약한 생산 사슬 속에서 전례 없이 국제적으로 단결하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미국의 개별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으로 북미의 GM 공장 전체가 문을 닫았고, 벨기에에 있는 르노의 빌보르데 공장에 대한 [파업] 위협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 한번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사슬 내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거리와 학교 청소부들의 임금과 조건도 결국 다국간 기업들에 직접 고용돼 있는 노동자들과 똑같은 비용 삭감 조치들을 당한다. 매우 옳게도 무디는 국제화 덕분에 노동 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무디의 설명에는 다른 장점도 있다. 그는 전통적 노조 관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 운동의 보수적 상층을 구성하며, 사회 변혁이 아닌 협상이 그들의 존재 이유다. 그들은 구조조정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실리적 조합주의, 양보 교섭, 유연 생산과 적시 생산 방식에 대한 순응의 길을 따라 왔으며, ‘자기’ 국민 국가에 소재한 자본과 ‘사회적 협력’을 추구해 왔다. 1973년 이후 위기라는 맥락에서 이 전략은 재앙적이었다. 비용 삭감을 위해 노조를 무시하려고 한 선진국 지배 계급들에게 코포라티즘(단체주의)은 더 이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양보 교섭이 이루어진 미국에서는 노조가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수동적인 전략을 내걸고 있는 동안 일일 계약을 전문으로 삼은 파견 근로 업체 맨파워가 GM을 제치고 미국 최대의 사용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세계화’와 세계 노동 계급(과거 어느 때보다 숫자가 많은)의 국제적인 행동 가능성에 대한 본질적으로 정확한 평가와 노조 관료가 그런 행동을 이끌 가능성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무디가 노동자 운동을 위해 옹호하고 있는 전략적 대응은 그의 분석과 모순되며 설득력이 없다. 무디가 국가의 여전한 중심성을 그토록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음에도, 정치를 거의 완전히 빠뜨리고 있는 것, 아니 사실 회피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약점이다. 옛 소련권 체제가 붕괴한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로부터의 후퇴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 무디는 우리에게 좌파의 부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국제적 생디칼리즘에 대한 혼란스럽고 추상적인 충실성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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