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99퍼센트가 일어섰을 때 ①:
1930년대 미국 노동자 파업과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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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하라’ 운동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국 민중 저항의 역사와 교훈을 돌아본다.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에서는 커다란 투쟁이 두 번 있었다.
그중 하나가 1930년대 중반의 연좌파업 물결이다.
이 파업 물결은 1929년 대공황이 회복되는 듯하다 다시 공황에 빠져들기 직전에 벌어졌다.
또한 이 파업 물결은 ‘개혁파’ 정치인을 자처하는 루스벨트의 통치 시기에 벌어졌다. ‘개혁파’에 대한 기대가 투쟁을 소생시켰고 ‘개혁파’에 대한 환상이 투쟁을 종결시켰다.
1929년에 닥친 대공황은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풍과 홍수와 달리 공황은 저절로 소멸하지 않았다. 되레 공황은 계속 악화됐고 여러 나라로 번졌다.
또 자연 재해와 달리 불황의 타격 뒤에는 적십자 구호물자나 구조대도 없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대부분 실업과 가난을 부끄러운 병처럼 여기며 집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실업자 위원회에 가는 것은 공산주의자나 거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노는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민주당 루스벨트의 대통령 당선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공황기에 정권을 쥐고 있었던 후버의 공화당 정부는 대중의 신뢰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당시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돌았다. “미키마우스가 출마해도 공화당에게는 이길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당선은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이 투표를 통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첫 취임 연설은 기대감을 높였다. 그가 사람들을 감동시킨 구호는 구제, 부흥, 개혁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런 말에 기대를 걸고 투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쌓아 두었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분노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34년이었다. 1934년 톨레도의 오토라이트 자동차 부품공장 파업, 미니애폴리스의 화물트럭 노동자들의 파업,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하역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달아 승리를 거둔 것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세 파업 모두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보수적 노조 관료들을 위협했다.
강인한 체구의 광산 노동자 존 L. 루이스가 애틀란타시 AFL(미국노동총동맹) 대표의 얼굴에 라이트 훅을 날렸을 때 미국의 전투적 노동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좌파 노조인 CIO(산업별노동조합회의)가 건설됐다.
미국 노동자들은 이후 연좌파업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투쟁 방법을 사용했다. 그전에는 공장 밖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이 파업의 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었다. 연좌파업을 벌이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사전에 경고하지 않은 채 파업을 벌인다. 파업에 들어가면 멈춰진 라인에 앉아 농성에 들어간다. 공장을 지키고 파업을 사수한다. 공장은 강철 같은 요새가 된다.
1936년 고무 노동자들은 영하 9도의 추위 속에서도 장장 11마일의 피켓 행렬을 일구어냈다. 1937년 봄에만 약 40만 명의 노동자가 4백77회의 연좌파업을 벌였다.
“빌어먹을 공장, 점거해 버려”
연좌파업의 절정은 GM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당시까지 GM 사측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낌새만 있으면 사설 용역 깡패를 동원에 철저하게 분쇄하는 데 성공해 왔다. GM 공장이 있는 모든 시의 관료와 경찰, 언론은 항상 GM의 손아귀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들은 이제 더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점거하자, 점거하자, 빌어먹을 공장 점거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GM의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일단 파업에 들어가자 노동자들은 멈춘 라인 위에서 잠을 잤고 규찰대를 조직하고 강철 같은 규율을 지켜냈다.
사장들은 거품을 물었다. 한 하원 의원은 “파업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끌어내 총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던 부인들을 경찰이 습격했다. 경찰의 발포로 14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파업은 GM의 다른 공장으로 확대됐다. 농성자들을 지지하는 연대 행렬이 플린트 공장 밖을 에워쌌다.
GM 사장과 플린트 시장은 군대 투입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강력한 파업 물결이 만든 두려움에 질려 그 카드를 사용하지 못했다.
파업의 후반기에는 15만 GM 노동자 중 14만 명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렇게 44일을 버틴 노동자들은 드디어 미국 최강의 기업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승리는 미국 노동자 운동 역사상 최고의 성과였다. 이어서 철강산업 같은 중공업부터 식당 노동자들까지 파업이 줄을 이뤘다. CIO 조합원 수는 1백만 명에서 4백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의 뒤편에서 노조 관료주의도 같이 성장하고 있었다. 노조 관료기구들은 더 비대해졌고 더 위계적으로 구성됐다.
CIO 지도부는 민주당과 루스벨트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은 뉴딜 정부의 관리들과 손을 잡고 협상에 매달렸다.
루스벨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친CIO 경향의 노조 관료들과 동맹을 공고히 했다.
CIO의 위원장이 된 존 루이스는 1937년 3월에 GM의 승리를 재현하려던 크라이슬러 노동자들의 시도를 유산시켰고 디트로이트 총파업을 좌절시켰다.
1937년 여름에 미국에 다시 강력한 공황이 닥쳤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파산했고 민주당은 더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공격했다. 뉴딜 정부에 종속된 CIO는 힘이 계속 약화됐다.
그럼에도 공산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루스벨트의 시도가 그렇게 쉽게 성공하진 못했을 것이다.
공산당은 1934~1937년 투쟁을 주도한 일등공신이지만 민중전선(계급협력) 정책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미국판 ‘민중전선’은 공산당이 민주당과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산당은 CIO 지도자들과 함께 루스벨트 찬양에 앞장섰다.
공산당은 독자적 노동자 정당 건설 요구도 거둬들이고 1938년에 이르러서는 당의 공장 세포와 공장 신문들을 없앴다. 마침내 공산당은 1944년에 와서는 아예 당을 공식 해산했다.
그렇게 해 미국에 대중적 노동계급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