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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회포럼은 인도 운동에 새로운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다”
크리스 하먼으로부터 인도 정치 상황과 운동에 대해 듣는다

크리스 하먼은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편집자이다. 그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몇 주 전에 인도에 가서 활동가들을 접촉하며 토론해 왔다. 그의 저서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 등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의 의의와 성과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이번 세계사회포럼은 기막히게 좋았다. 사실, 매우 중요했다.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전체 인류의 1/2에서 2/3가 살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인도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 모인 다양한 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단체들은 함께 논의해야 하는 다양한 쟁점들을 제기했다. 또한 인도에게,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이번 세계사회포럼은 중요했다. 세계사회포럼 전에 파키스탄 좌파를 델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굉장히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인도에서는 2개월 뒤에 선거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권 힌두교 배타주의 정부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정부는 18개월 전에 느긋하게 팔짱낀 채 이웃 구자라트 주에서 자기 지지자들이 2천 명을 살해하도록 방조한 정부이다. 이 정부는 끔찍한 정부이다. 좌파는 이 때문에 침체돼 있었고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그런데 세계사회포럼이 개별적으로 분리돼서 싸우던 인도의 많은 운동과 단체들을 한 곳에 모았다. 이들이 한 곳에 모임으로서 함께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자신감이 높아졌다. 인도인의 참가 수준도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오늘 세계사회포럼 소식지를 보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사회포럼을 조직했던 사람들이 이 곳 뭄바이에 엄청나게 많은 가난하고 가장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같은 점을 느꼈다. 이것은 굉장한 성취이다.

이전에 불가촉 천민이라 불렸던 달릿들은 남아프리카와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했던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이 조직돼서 이 곳에 왔다. 그리고 뭄바이의 수천 노동조합원들이 월요일 오후에 휴가를 내고 참가했다. 이러한 노동자 조직의 참가는 매우 중요했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국제적 운동의 한 걸음 진보였다.

카스트 제도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산물이다. 인도는 자본주의 나라인데 왜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는가?

A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전자본주의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재구성한다. 영국 식민당국은 카스트 제도를 원래보다 더욱 견고하게 고착시켰다.

공업화 과정에서 달릿들은 도시로 몰렸다. 그들은 가족 단위로 도시로 이주했고 농촌에서 가장 억압당하던 집단이던 그들은 도시에서도 가장 밑바닥 일을 했다. 그들은 똥을 치우고 바닥을 닦았다. 그들은 모든 육체노동을 도맡았다. 그들은 사회의 한 구석에서 인도 상층계급이 절대 스스로 하지 않는 일을 처리했다. 상층 계급은 자기 화장실과 방을 직접 치우는 적이 없다.

달릿들은 건설 산업에서도 주를 이루었다. 월요일 시위에서 놀라웠던 광경은 달릿 여성 노조 활동가들이 벽돌을 지고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한다.

농촌에서 가장 낮은 카스트들은 대부분의 노동을 담당하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체제가 요구하는 육체노동을 거의 다 처리한다.

집권당은 현상 유지를 위해서 카스트들을 서로 대립시킨다. 뭄바이에는 쉬브 세나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존재한다. 세나는 뭄바이의 마라티 종족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증오하게 만들면서, 힌두교도가 무슬림을 증오하게 만들면서, 중간 카스트들이 하층 카스트인 달릿들을 증오하게 만들면서 성장했다. 그들은 전자본주의적 유산을 체계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목적은 자본주의적이었다. 이것은 하층 계급을 다루는 방식에서 서구의 인종차별과 똑같다.

인도에서 노동자계급은 전체 인구 중 소수이다. 그래서 인도에는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인도 노동계급의 규모는 상당히 크다. 그러나 두 집단으로 나뉜다. 하나는 조직 부문이다. 과거 정부는 이 부문 노동자들의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적 권리를 허용했다. 그들은 상당한 고용 안정을 누리고 노동조합 조직 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노동계급 중 5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 90퍼센트는 소규모 작업장(3∼4인 작업장)에서 일한다. 이 둘을 합한 수는 엄청나다.

하지만 이들은 전체 인구 중에서는 여전히 소수일 뿐이다.(인도의 대다수 인구는 아직도 토지에서 일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이지만 역사적으로 커다란 힘을 행사했다. 그들이 영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했다. 직물업과 부두하역 노동자 들의 파업이 독립에서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후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노동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투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처럼 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사기가 저하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철도와 은행과 부두에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결성돼 있다. 뭄바이에는 작은 중간 규모의 호텔에 이르기까지 웨이터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있다.

인도 도시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점은, 도시 노동계급은 소수이지만 그들이 싸울 때 그들이 도시 정치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1982년 뭄바이에서 1백만 명의 직물업 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그들은 뭄바이의 정치를 지배했다. 거의 일년 간이나 계속된 이 파업은 패배했다. 이 파업이 패배한 뒤에 온갖 형태의 종교적 갈등에 기초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힌두교도를 무슬림과 대립시키고, 중간 카스트를 하급 카스트와 대립시키고, 그들이 정치를 지배하게 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해야 할 뿐 아니라 방대한 수의 가난한 농민, 무토지 농업 노동자, 그리고 직업을 구할 수 없어서 관광객들에게 신발끈을 팔거나 노점상을 열어야 하는 사람들을 조직해야 한다.

한국의 예를 생각해 보자. 1987년 이전에 누구도 한국 노동자들이 그토록 강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에 대규모 투쟁이 발생하고 사장들은 노동자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은 인도에서도 과거에 이미 일어났고 재연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외향해야 한다. 그들은 억압받는 달릿의 해방을 요구하고, 토지를 잃고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을 위한 요구를 내놓아야 한다. 이들이 서로 결합된다면 놀랍도록 강력한 세력을 만들 수 있다.

2002년 구자라트 학살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인도에서 종단주의는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A 인도의 대중은 심각한 빈곤에 처해 있다. 혹독한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은 함께 싸우거나 아니면 서로 공격한다. 노동자 투쟁 패배가 가져온 사기 저하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공격했다. 단지 우익들만이 아니라 국민회의당도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적 갈등을 이용했다.

인도 정치는 뿌리 속까지 부패했다. 그리고 각각의 부패 단체들은 서로 다른 사회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서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유럽이나 미국의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은 변화를 겪었다. 만약 당신이 오늘 뭄바이 빈민가를 거닐면 힌두교도, 기독교도, 무슬림이 이웃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11년 전 뭄바이에서는 쉬브 세나[파시스트들]가 끔찍한 폭동을 일으켜 수천 명의 무슬림이 희생당했다. 쉬브 세나 무리들은 거리를 다니면서 다른 남자들의 바지를 벗기곤 했다. 만약 그가 무슬림임을 표시하는 할례를 받았으면 죽음을 당했다. 모든 무슬림 여성은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광범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특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일정한 직장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무슬림들과 함께 일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엄청난 증오심을 느꼈다. 이런 증오심은 누그러졌지만 다시 불붙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단주의 반대는 인도 운동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인도의 좌파는 부분적으로 아직 강력하다. 따라서 조직 노동자들이 비조직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도록 하고, 이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그리고 자신보다 낮은 층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인도에는 강력한 공산당들이 존재한다. 구 소련의 붕괴 이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공산당이 영향력을 잃은 데 비해 인도에서 스탈린주의의 영향력이 강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역사적으로, 인도 공산당은 해방 투쟁에 참가해 왔다. 일부 지역에서 그들은 식민지 해방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고 기반을 마련했다. 그 뒤에 그들은 일부 지역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쟁점을 다루면서 성장했다. 특히 인도 북동부의 [서부]벵골과 남부의 서부 케랄라 두 지역이 가장 중요했다. 이 곳에서 그들은 대중적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그리고 당시에 제3세계가 옛 소련을 따라 산업화를 하고 있었고, 인도도 같은 방식으로 공업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인도의 핵심 자본가 정당인 국민회의당조차 소련식 발전 전략을 부분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소련식을 따르고 있다. 우리도 소련처럼 될 수 있다.” 너무나 가난했던 사람들은 여기서 희망을 보았다.

소련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인도 공산당은 점진적 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는 두 가지 형태를 띠었다.

첫째, 옛 소련에 일체감을 느꼈던 매우 용감한 사람들은 이제 지지할 대상이 없어졌다. 그들은 계속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옛 소련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아래로부터 노동자 투쟁이 대안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번째로, 세계 체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세계 체제의 일부인 서부 벵골과 케랄라도 위기에 빠졌다. 서부 벵골 정부에 작용하는 압력 때문에 이 정부는 과거에 주민에게 주었던 혜택들을 거둬들여야 했다. 인도 사람들은 모두 서부 벵골과 케랄라 정부가 나머지보다 낫다고 말한다. 케랄라는 매우 가난한 주이지만 어느 곳보다 나은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공격받고 있다. 공산당의 일부는 세계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나는 지난 주에 서부 벵골을 방문했다. 그 곳 정부는 사유화된 의료 서비스의 발전을 고무하고 있었다.

공산당 내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에 반대하고 대안을 찾고 싶어한다. 그 중 일부는 이번 세계사회포럼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고 이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이번 세계사회포럼의 성공이 인도 내 진정한 좌파 세력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한다.

스탈린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대안을 추구하는 정치조직이 인도에는 존재하는가?

A 조직돼 있는 비스탈린주의 정치조직은 드물다. 우리는 일부 도시에서 매우 작은 규모의 단체와 개인들을 만났다. 나는 이번 세계사회포럼이 그러한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사장에 차려진 책방에서 이런 책을 읽고 싶고,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조직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하고 싶은 사람들을 계속 만났다.

그러나 인도까지 시간차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됐고 유럽으로 확산됐고, 그 뒤에 포르투 알레그레로,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로 퍼져 갔다. 하지만 남아시아에서는 이제야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 세계사회포럼이 앞으로 인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글을 읽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런 행사가 있었다니, 대단해! 수자원이든 더 많은 식량이든, 달릿의 억압이든, 노동조합 결성 권리든, 또는 여성 억압이든, 우리는 개별적인 쟁점만을 가지고 싸우지 않아도 되고 서로 단결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

인도에서 가장 산업화됐고 가장 중요한 도시인 뭄바이에 십만 명 이상이 모여서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대다수 인도 사람들에게는 아닐지라도 모든 학교, 모든 대학, 모든 지역사회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기대감을 형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사회포럼에 관해 읽고 “그래 맞아, 이런 일을 우리는 해야 해!”라고 소리칠 것이다.

최근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타협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이 타협은 어떻게 가능하게 됐는가?

A인도와 파키스탄 지배자들은 부분적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겨서 자국 내 통제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은 대여섯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진 6개의 종족 집단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그들을 묶어 주는 것은 우리는 힌두교도와 대립되는 무슬림이라는, 인도와 대립되는 파키스탄이라는 사고이다. 따라서 파키스탄 정부는 그런 태도가 지속되기를 원한다.

이전에 인도 정치는 중도 정당인 국민회의당이 지배했고 지금은 우익 정당인 BJP가 지배한다. 인도는 수백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20개 이상의 주로 구성돼 있다. 인도인 중 40퍼센트만이 모종의 힌두어를 말한다. 따라서 나머지 60퍼센트와의 소통 수단으로 영어를 장려하지만 실제로는 극소수만이 영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국가를 통합해 온 국민회의당과 BJP는 언제나 외부의 적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도인이고 저들은 파키스탄인이다”는 생각을 심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2년 전에 핵전쟁이 발생할 뻔했다. 지금의 타협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미국과 영국이다. 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무기를 팔았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핵전쟁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특히 9·11 이후에 조지 부시는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에게 미국의 지도 아래 협력하면서 핵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

또 다른 요인도 매우 중요하다. 인도 자본가 계급은 시장 확대를 바란다. 시장 확대의 방향은 서쪽으로, 즉 중동의 석유 국가들로 향해 있다. 그러나 서쪽으로 뻗어가기 위해서는 파키스탄과 무역을 해야 한다. 지금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물품을 가득 실은 트럭들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수백 명의 짐꾼들은 다음 트럭으로 옮기기 위해 상품들을 머리에 짊어지고 1킬로미터를 운반해야 한다. 인도 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을 원한다. 펀잡 주의 거대 농업 자본가들은 자기 곡물을 파키스탄에 팔고 싶어한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 자유무역 지대를 설치하기를 바라는 이런 압력이 작용해서 인도의 바지파이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가 회담을 열었다. 그들은 정부간 대화를 조용히 진행하면서, 그와 동시에 대중 속에서 증오심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될 수 없었다. 이것은 세번째 요인 때문이었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언어는 비슷하다. 파키스탄의 언어는 우루두이고 인도의 언어는 힌두어다. 그러나 막상 발음했을 때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언어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우루두와 힌디어는 동일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공통된 이해관계를 발견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과정을 거쳤다.

비하 주의 장관이자 부패한 정치인이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는 유명한 연설가였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그에게 공감했기 때문에 박수를 보냈다. 물론 그는 사기꾼이다. 어쨌든 이 예는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에 파키스탄에서 방문한 사람들 중 사오백 명은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했다. 방문한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과 어울렸다. 뭄바이에는 많은 무슬림 주민들이 힌두교도 주민과 이웃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치 사람들은 뭄바이 사람들을 죽이기 원하고 뭄바이 사람들은 카라치 사람들을 죽이기를 원한다는 주장은 전혀 말이 안 되게 됐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여성의 참가도가 높았다.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 어떠한가?

A단지 인도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 비해 차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 억압은 사회 계급들 사이에 차이가 크다.

상층 계급에는 여성 총리인 간디 여사가 있었다. 현재도 두 개 주에서 여성이 총리이다. 뭄바이의 큰 호텔을 가면 여성들은 다른 곳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부유한 남성들은 그들을 여전히 상품처럼 다룬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구와 비슷한 자유를 누린다.

밑바닥에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공공건설 사업이 있으면 여성과 남성이 함께 육체노동에 종사한다. 그들은 함께 일한다. 때때로 남성은 육아 등의 책임을 여성과 함께 책임져야 한다. 남성이 땅을 파면 여성이 흙을 나르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 모두 손수 벽돌을 나른다. 세계사회포럼에서 건설 노동자, 철강 노동자와 달릿 들의 행진을 보았을 것이다. 대열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중간계급 여성들 사이에서는 [가정]외부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만큼 가난하지 않다는 과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현실에서는 점점 더 많은 인도 여성들이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은행, 전화국, 휴대전화 대리점 등에서 일한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당한다. 여전히 가사와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 여성의 억압은 계급에 따라 차이가 크다. 대기업의 여성 임원 및 CEO와 고급 아파트에서 오물을 처리하는 여성 사이에는 억압의 정도가 다르다.

우리가 혁명적 운동을 건설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A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난 1백년 이상이나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권력은 투표 용지나 개표기에 있지 않다. 권력은 군대와 경찰, 그리고 부를 만드는 수단에 대한 지배에 있다. 그것을 지배하는 자들은 “그래, 네가 더 많은 표를 얻었으니 군대, 경찰, 생산수단 다 가져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증거로 미국 지배계급이 중동의 석유를 원했을 때 그들은 투표를 요구하지도, 설문지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폭격기와 탱크, 헬리콥터를 가지고 갔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침공했지만, 이라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공격한다고 거짓말했다. 이런 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폭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규모가 충분히 크다면 폭력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몽둥이를 가진 다섯 명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가라고 했지만 안 가고 몽둥이로 우리를 쳤다고 하자. 그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우리 중 2백 명이 저들과 똑같은 몽둥이를 가지고 있다면 저들은 아무 짓도 못하고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한 세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힘을 부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조직돼야 하고 집단적 힘을 보여야 한다. 군인과 경찰에게 그들의 형제와 자매, 어머니가 저항 대열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왜 우리는 조직해야 하는가? 모든 운동 안에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한다. 만약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기를 바란다면 인종주의, 차별, 계급, 여성차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에 반대해야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우리 사회의 쓰레기들과 대면한다. 〈선〉 지에는 반라의 여성 사진이 매일 게재된다. 노동계급 남성들은 여성을 상품으로 생각하도록 매일 강요받는다.

그러한 편견이 항상 존재한다.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낡은] 생각을 가진 채 참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멀리 내다보고 우리 사회의 가장 후진적인 사상의 영향력에 맞서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혁명적 조직이 있어야 한다. 운동 밖에서 명령하는 조직이 아니라, 운동 안에 있으면서 논쟁하고 행동을 제안하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에는 정치를 배제해야 한다고 써 있다. 정치가 없어야 한다니? 사회는 언제나 정치적이고 우리는 우리의 정치를 그 안에 집어넣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 정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전 세계은행 총재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현재 체제를 개량하자고 주장했다. 같은 토론 자리에서 인도네시아의 디타 사리와 남아프키라의 트레버 은그와니는 완전한 변혁을 추구해야 하고 노동계급 운동이 필요하며 과거의 개량들이 실패했다고 반박했다. 우리편에서 디타 사리, 응과니,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조직으로 조직돼 있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디타 사리와 응과니 등이 훌륭한 주장을 내놓는 개인이 아니라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조직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