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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故 조성민 추모의 글:
“형의 삶이 내게 건네는 말을 들으려 한다”

형의 죽음을 전하다 수화기 너머로 서럽게 우는 한 선배를 따라 나도 울면서 비로소 실감이 났다. 성민이 형이 세상에 없다.

형은 과 선배의 동기였다. 당시에도 NL 경향이 운동에서 다수였지만 우리가 다녔던 한양대에서는 압도적으로 다수였고, PD 경향이 워낙 소수였던 터라 학교 전체에서 이래저래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고 들었다.

술자리에서만 간혹 보던 형은 뭐든 물어보면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선배였다. 보통은 반말을 썼지만, 진지하게 토론이 될 때는 바로 존댓말로 바꾸던 형이 신기했다.

벌써 15년 전 일이지만 총학생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보기 드물게 들뜬 표정으로 활짝 웃던 얼굴과 노동자 집회에서 사수대 맨 앞에 서 있던 형의 한껏 고무된 표정이 기억난다.

형이 감옥에서 나오고 환영식 자리에서 ‘갇힌 자 더욱 자유로운 땅’으로 시작하는 정태춘의 ‘형제에게’를 맘을 다해 불러 주면서 가슴이 더웠던 생각이 난다.

당시 나는 국제사회주의(IS) 신문 독자였고,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던 형은 IS가 학생운동을 통한 변혁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거리를 두고 있었다.

환송식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형은 IS 정치를 탐구해 볼 계획이라고 말을 해 나를 놀라게 했다. 감옥에서 만난 국제사회주의자와의 토론으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형은 이미 IS 회원이 되어 있었다. 1년 넘게 IS 독자로 토론만 하며 가입 권유가 부담스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내게 형의 가입은 충격이었다. 이미 많은 토론으로 IS 정치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의 권유는 결정적이었다.

앞으로의 삶을 두고 뭐 하나 분명한 게 없던 내가 내 의지로 삶의 방향을 결정 할 수 있었던 건 형이 내게 가지고 있던 권위 덕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형의 덕분이다.

졸업을 하고 지방에서 일하게 되면서 주말에만 활동할 수 있었던 나는 운동이 뜨면 덩달아 자신감이 높아지고 운동이 가라앉으면 사기가 떨어지곤 했다. 한동안 고립감 때문에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던 내 열정을 다시 일깨웠던 건 형이 권유해 준 책 《나의 생애》와 《세계를 뒤흔든 10일》이었다.

꼭 돌려달라던 형의 부탁이 무안하게도 빛 바랜 형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지방 생활을 정리하며 서울로 올라오는 내가 진로를 두고 고민을 할 때도 형은 내가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좋은 동지였다.

그 뒤로 지역에서 착실히 활동에 매진하면서 나는 더는 형을 찾지 않았던 것 같다. 직장과 활동에서 쉴 틈 없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많은 동지들이 형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때로 의기소침해 보이는 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형이 내게 해 주던 역할을 나는 형에게 해 줄 수 없었다. 형의 홈페이지에서 흘러나오던 허클베리 핀의 ‘사막’을 들으며 형이 많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짐작만 할 수 있었다.

형에게 위로가 되었을 그 음악을 아무리 들어봐도 형이 없는 허전함을 어쩔 수는 없다.

형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내가 봐 온 시간 내내 그랬지만 어린 시절에도 지독하게 가난했다고 말하곤 했다. 한 번은 지독히도 추운 노동자대회 전야제가 끝나고 새벽에 형의 집으로 가게 됐다. 이삿짐도 미처 다 풀지 않은 지하 단칸방은 냉골이었고, 밤새 추위에 떨며 나는 형의 가난이 참 믿음직스러웠다.

우연히 TV에 나오는 형을 두 번 보게 됐다.

2000년대 초반의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며 켜 놓은 TV 뉴스에 나오는 장소는 한양대 정문이었고, 얼굴에 피를 흘리며 경찰에게 끌려가는 사람은 분명 형이었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던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연대하러 간 모양이었다. 종일 두근거리는 심장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기억이 선하다.

EBS 콘서트에서는 허클베리 핀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스탠딩 관중석 맨 앞에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흐느적거리며 음악을 즐기는 얼굴이 또한 형이었다.

피 흘리며 끌려가던 모습도, 앳된 청년들 사이에서 음악에 취해 있던 모습도 생각해 보니 참 형답다. 굳건한 사회주의자였던 형도, 음악으로 쓸쓸함을 달래던 형도 그저 그립다.

형이 생의 마지막을 좌절과 소외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의 확신과 활기로 보냈다는 게 많이 위로가 된다.

형의 마지막 삶의 모습이 줄어든 내 열정에 건네는 말을 조용히 들어 봐야겠다. 몇 년간 나누지 못한 대화가 될 수 있겠지.

성민이 형, 편히 쉬세요. 미안해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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