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슬럼프》 서평: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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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슬럼프》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맥낼리 교수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원인과 저항을 다룬 책이다.
맥낼리는 번역자인 강수돌 교수와 한 인터뷰에서 두 가지 계기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을 탓”하는 지배자들과 주류 경제학을 반박하려고다. 예를 들어 보수 언론은 그리스 위기를 설명할 때도 그리스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과 복지 혜택 때문에 망한 것이라며 호도한다. 맥낼리는 저들의 거짓을 폭로한다.
“그리스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8백3유로(약 1천63달러)인데, 이것은 놀랍게도 아일랜드의 월 최저소득 1천3백 유로나 네덜란드의 월 최저소득 1천4백 유로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 책은 이런 거짓말과 고통전가를 폭로하며, 저항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곳곳에 담고 있다.
맥낼리가 이 책을 쓴 둘째 계기는 “금융권만 잘 규제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에 맞서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의 본질에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맥낼리 교수는 마르크스가 이미 1860년대에 “체제의 전반적인 위기가 얼핏 보면 … 단순히 금융 및 화폐 공황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썼다고 지적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번 경제 위기의 원인을 단지 금융의 문제로 설명하는 데 그친다. 문제의 원인을 금융으로 보다 보면 대안도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는 금융을 개혁하는 선에 머무르고 만다.
그러나 맥낼리 교수는 “글로벌 슬럼프의 근본적인 원인은 단순한 금융 불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이윤율 저하”라고 설명한다. 그는 착취와 경쟁,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의 동학을 분석한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분명한 장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몇 가지 분석에서 타당하지 않다.
첫째는 이윤율이 저하하는 원인에 관한 것이다.
맥낼리 교수는 이윤율이 저하하는 원인으로 “과잉 축적”과 “기계화가 낳는 모순”을 꼽는다. “기계화가 낳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옳다. 이는 기계에 투자하는 비율이 늘어날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해 이윤율이 줄어드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술 생산성이 급속히 늘어나는 컴퓨터 같은 상품의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면 노동절약적인 기술 발전이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잉축적, 즉 과잉생산을 이윤율이 하락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이윤율이 높다면 자본가는 투자를 늘릴 것이고, 이를 통해 모든 생산물은 소비될 것이다. 반대로 이윤율이 낮다면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자본이 남아도는 과잉생산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과잉생산은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위기의 징후”(조셉 추나라)로 보는 것이 옳다.
둘째는 1982~2007년 신자유주의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크리스 하먼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어느 정도 이윤율 회복”의 기미가 있었지만 “자본주의를 장기 호황의 장기적 패턴으로 되돌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고 썼다. 로버트 브레너도 1973년 이후 세계 경제를 진단하면서 “장기 침체”로 정의했다.
그런데 맥낼리는 이런 규정에 반대해 1982년부터 2007년이 신자유주의 팽창기라고 주장한다.
맥낼리는 “1982년 이래 25년간 … 세계 경제는 그 규모 면에서 3배나 증대”했고, “미국의 이윤율이 2배로 증가했다” 하고 썼다. 그러나 이윤율의 장기적인 추세를 보려면 이윤율의 등락 속에서도 평균적 수치를 계산해내야 한다. 그런데 맥낼리가 이윤율이 가장 낮을 때와 가장 높을 때를 비교해서 이윤율이 크게 올랐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을 왜곡하는 분석이다.
장기 침체
신자유주의 시기를 호황으로 보는 맥낼리의 관점은 금융화를 분석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한다. 금융화가 급속하게 벌어진 원인에 대한 그의 분석과 설명은 충분치 않다. 신자유주의 시기를 실질적인 경기 팽창기라고 보다 보니 그 시기에 낮은 이윤율 때문에 자본가들이 생산적 투자보다 금융 투기로 몰렸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맥낼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착취를 강화한 것과 함께, 동아시아가 새로운 축적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세계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80년대 동아시아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다른 주요 OECD 국가에 대한 투자보다 낮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맥낼리의 주장은 근거가 불충분하다.
맥낼리가 위기에 맞선 저항을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고무적이고, 영감을 주는 사례가 많다.
볼리비아에서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멕시코 오아하카에서는 투쟁이 발전해 민중의회가 한 도시를 운영하는 상황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런 투쟁들을 소개하며 그는 노동운동이 “경제적 노조주의”가 아닌 대중 참여형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로 가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이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해 광범한 연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방향은 옳다.
다만 맥낼리의 주장에는 “백인 노동계급 대중의 일상 속에는 대개 인종주의나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순응과 존중 등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저항에 나설 가능성이 적다는 생각도 반영돼 있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저항을 다룰 때 이주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 주요 조직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일 것에서 보듯 이런 생각은 다소 일면적이다.
맥낼리는 “사회혁명이 목표라면,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수단이다”는 콜린 바커의 말을 인용하며 개혁과 혁명을 변증법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는 투쟁 속에서 “새로운 연대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리스의 좌파 연합인 시리자 등을 예로 든다. 투쟁 속에서 반자본주의 좌파들의 연대 세력을 건설해야 한다는 강조는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맥낼리는 동시에 독자적인 혁명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은 말하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혁명정당 볼셰비키를 “좌파연합세력”이라고 왜곡되게 표현하는 데서도 반자본주의 세력의 연대전선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변혁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관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대중 운동의 성장은 좌파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 속에 놓이게도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운동을 성장시키려면 혁명적 정치를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제시하며 조직할 수 있는 혁명 정당의 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책이 저항의 영감을 주는 읽을 만한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몇 가지 분석상의 오류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