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독자편지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이중성, 그리고 혁명적 신문의 필요성

최근 필자는 트위터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팔로워 수도 적고 자체 트윗만 엄청 많지만, 그리고 가끔 스스로 ‘애국 보수’라 지칭하는 분들이 나타나서 필자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트위터 상에 올라오는 정보들을 보고 토론도 하며 나름(?) 즐겁게 지내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 올라오는 트윗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경향신문〉이 어렵다’라는 것이다. 듣자하니 〈경향신문〉 국장급이 월 1백5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고 한다.(트위터 상의 정보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한동안 신문배달을 해 본 필자 경험상으로도 〈경향신문〉, 그리고 〈한겨레〉는 1백여 가구 중 단 두 가구만 구독을 할 정도로 구독률이 매우 낮았다.

〈경향신문〉의 어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낮은 구독률로 인한 경영,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이겠지만 필자는 부르주아 언론이라는 한계에서 비롯하는 그들의 ‘이중성’이 근본적 원인라고 본다. 〈경향신문〉뿐만 아니라 〈한겨레〉 역시 이에 포함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바로 최근 MBC 노조 파업과 관련해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MBC 노조 측을 대변하는 기사와 MBC 노조의 파업을 공격하는 광고를 함께 지면에 나란히 실은 것이다.

MBC 노조 파업이 정당한가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지만, 적어도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진보적’ 관점을 대변한다면 그들이 지지해야 할 계급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망각한 것인지, 아니면 대놓고 조롱하려는 것인지 두 가지 상반된 기사와 광고를 실어 놓았다. 그들이 만약 진정 ‘진보적’ 관점을 대변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그들이 지지하는 계급에 대한 기만이요, 위선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중적’이다.

언론의 계급성? 부르주아 언론?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언론은 중립적인 자세로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집단이 아닌가? 이렇게 필자에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너는 내 함정카드를 발동시켰다”)

위 문구는 유머 사이트에서 한때 유행하던 문구인데,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trap’(함정) 한 단어다.

그렇다, 함정이다. 언론의 중립성은 사실 함정에 불과하다. 언론은 중립적이지 않다. 달리 말해, 언론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 언론의 중립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언론의 역사를 살펴보자.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언론이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랜 역사는 아니다.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발간했던, 다시 말해 정부 측이 발간한 ‘한성순보’였다. 민간 자본 측에서는 ‘독립신문’이 최초로 발간됐고, 그 후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발행되면서 언론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다.

필자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져본다. “왜 언론이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언론은 반드시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불멸의 법칙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이 돼 주는 언론이 만약 거짓된 정보에 기반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과는 별개로 언론이 ‘중립적’이라는 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흔히 중립을 표방하며 들고 나오는 것이 ‘양비론’이다. 그러나 양비론은 ‘중립’이 아니다. 양비론은 단순히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준’이 존재한다면 ‘관점’ 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언론은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중립’은 불가능하게 된다.

최근 몇몇 언론의 ‘편파성 보도’에 따라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실 언론은 ‘중립성’의 함정 때문에 ‘중립’일 수가 없다. 따라서 언론은 필연적으로 ‘편파적’이다.

당장 조선 시대에 나온 언론들만 보더라도 언론이 편파적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발간한 것이고, 또한 관보적 성격을 띠었기에 친정부적이었으며, 사용한 글자 역시 한문, 즉 친유생적이었다. ‘제국신문’의 경우 부녀자를 주로 대상으로 했기에 한글을 사용했다. 당장 두 개의 신문만 놓고 보더라도 언론의 ‘계급성’이 드러나는데 하물며 오늘날에서랴.

오늘날 조중동과 〈뉴데일리〉, 〈데일리안〉, 〈문화일보〉 등 보수색이 강한 언론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의 초점은 권력자의 눈이고, 국가의 눈이고, 자본가의 시각에 맞춰져 있다. 〈뉴데일리〉처럼 강하게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조중동 등 주류 언론들은 박정희를 찬양하며 친독재, 친재벌, 친제국주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확실히 ‘그들’의 편이다. 당당하게, 또는 은밀하게 자신의 계급색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부르주아 언론이라는 자신들의 위치를 십분 활용하며 부르주아를 대변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간혹 그들이 비판을 쏟아내는 경우는 자신들의 ‘이익기반’이 흔들릴 우려가 있거나 기성 언론에서 자신들의 점유한 위치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레〉, 〈경향신문〉은 스스로 모순된 위치와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언론들이다. 형태상 ‘기업’이라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이지만, 이들이 신문 지면으로써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은 노동자, 서민이다. 조중동 등 보수 일색 언론들이야 자신들의 부르주아적 위치를 자각하고 정권, 기업과 결탁해 수많은 왜곡보도 등을 일삼아 오며 자신들의 세를 부풀려 갔지만, 〈한겨레〉나 〈경향신문〉은 그럴 수 없었다.

비록 사원대주주제 등을 통해 자본의 논리로부터 최대한 자유롭고자 노력한 흔적이 면면히 엿보이기는 하지만, 기성 언론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자본의 논리에 부분적으로나마 순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성 언론이라는 점은 독자들의 참여 수준을 일정하게 제한하기도 한다. 독자들의 참여가 제한된다는 부분은 신문으로써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계급적’일 수가 없는 이유이며 부르주아 언론의 ‘한계’다.

진보언론으로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위상과 역할은 가치가 크다. 최근까지도 김정남의 천안함 발언을 날조한 〈조선일보〉 등에 맞서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최대한 노동자들을 대변해 왔고 앞으로도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갈수록 자본의 논리가 득세하는 가운데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불어 그들이 부르주아 언론의 위치를 지키는 한 MBC 노조 파업에 대한 그들의 태도같은 ‘이중적 작태’는 계속될 것이다.

기존 언론들의 이중성과 한계로부터 우리가 또 한 가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은 바로 ‘양비론’적이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으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해주는 〈레프트21〉과 같은 ‘혁명적 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성 부르주아 진보언론이 진정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중성을 계속 내비칠 때, 사람들은 갈수록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의 이중성과 ‘참여의 실질적 제한’에 의해 또 다른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염증과 소외 현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스트들에게 열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신문은 기성 언론이 가지는 그러한 잠재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동자 계급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대변하며 직접 참여할 수 있고 신문을 매개로 언제든지 토론할 수 있으며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것이다.

지노비에프는 1921년 코민테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신문과 사회민주당 신문들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공장과 작업장에서 남녀 노동자들이 보내거나 또는 병사들이 보내는 편지다.”

하먼 또한 이를 인용하면서 “노동자 대중의 생생한 경험들을 표현”하는 신문이야 말로 “노동자들을 위한 신문이자 노동자들의 신문”이라고 이야기했다.(인용 - 『혁명적 신문의 구실』, 김승주)

흔한 말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두고 ‘찌라시’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종북’이니 ‘반미 선동 신문’이니 하면서. 그들을 감히 ‘찌라시’라며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진보언론에서 그동안 담당해 온 구실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중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부르주아 언론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결코 노동자 계급의 신문은 될 수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최소한 이중성을 버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중성을 가지고도 스스로 ‘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관점 없는 진보’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정말 뚜렷한 관점과 신념이 있다면 이중성만큼은 버리라. 못 버리겠다고?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당신들을 통해서 혁명적 신문이 왜 필요한지 반증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