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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현재 위기의 근원은 식민지 역사다

2백 년 전에 투쌍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노예들의 오합지졸 군대가 유럽의 우수한 식민지 군대들을 물리치고 아이티의 독립을 쟁취했다.(투쌍 루베르튀르 자신도 노예였다.) 이 놀라운 혁명은 아이티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의 지배 열강은 아이티와 아이티 민중의 승리를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1700년대에 아이티(당시 이름은 산 도밍고였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였다. 부의 원천은 그 섬의 풍부한 플랜테이션들과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 50만 명에 대한 야만적 착취였다.

1791년 산 도밍고의 노예들은 프랑스 혁명 사상에 고무돼 봉기했다. 농기구만으로 무장한 그들은 그 뒤 12년 동안 노예 소유주들이 끌어모은 무장 세력 전체, 스페인 침략군, 영국군 6만 명(한때 7일 동안 일곱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을 잇따라 물리쳤고, 마침내 대규모 프랑스 원정대도 물리쳤다.

그 혁명은 아메리카 전역의 노예 식민지들에 충격을 주었고, 다른 노예 반란들과 존 브라운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고무했다.

노예 소유주였던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아이티를 고립시키는 운동에 앞장섰다. 승리한 노예들은 식인종으로 매도당했다. 아이티와의 무역은 제품 구매를 거부당하거나 미국 상인들의 이익에 맞게 조작됐다. 아이티 독립 승인은 62년 동안 거부당했다.

한편, 아이티인들은 그들의 피만이 아니라 현금으로도 독립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독립의 대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으로는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했다. 노예 소유주들과 그 상속인들에 대한 보상금이라는 것이었다. 첫번째 분할 지급액 2천4백만 프랑의 지급 기일이 닥쳤을 때, 아이티(프랑스 해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는 그 돈을 프랑스에서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됐고, 이 때문에 아이티 경제는 옛 식민지 주인들이 주무르게 됐다.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금융 지배는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해 봉기를 분쇄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 뒤 19년 간의 군사 점령기에 미국 해병대는 약 6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했다. 미군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아이티의] 대통령을 임명하고 경제를 지배했다. 미군은 세관·중앙은행·금 보관소 등을 점령했고, 다시 코르베(강제 노동 제도)를 도입해 도로 건설과 다른 사업들을 시행했으며, 외국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자원을 약탈할 수 있도록 아이티 헌법을 개정했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악명 높은 군대를 창설하고 훈련시켰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로 “파파 독”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뒤발리에 정권을 지원했고,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파파 독”의 뒤를 이어 “베이비 독”이 1971년부터 1986년까지 통치한 뒤발리에 독재 정권은 수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하고, 국고에서 수억 달러를 도둑질했다.

“파파 독”과 “베이비 독”

1980년대 말에 가톨릭 신부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포르토 프랭스[아이티의 수도] 빈민가에서 해방신학을 설파하며 갑자기 빈민들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듯했다. 그는 1990년 선거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장악했다.

개혁 조처들을 시행하려던 아리스티드의 노력은 외세의 개입에 부딪혀 좌절했다. 통화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고 실업이 증가했으며 빈곤이 심화했다. 미국이나 국제 금융계보다 전투적 대중을 더 두려워한 아리스티드는 민중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하지 않고 온유한(그리고 가난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고 그리스도교 식으로 간청했다.[편집자 주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태 5:3)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 6:20)]

미국이 훈련시킨 군인들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집권 7개월 만에 쫓겨났다.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살해당하고 고문당했다. 유엔은 아이티인들을 도와 주겠다며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리하여 아이티의 빈곤을 더 심화시켰다.

3년 뒤인 1994년 9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자신이 아이티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아리스티드가 권좌에 복귀할 수 있도록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한다고 공표했다.

“민주주의 회복 작전”의 배후 동기는 클린턴이 주장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 클린턴은 미국 해안에 도착하는 수천 명의 아이티 난민 “보트 피플”에 대한 미국 국내의 적대감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하면 해결하겠다고 공약한 “위기”였다.

둘째, 이제 막 소말리아에서 치욕을 당한 미국에게는 군사적 성공 사례가 필요했다.

셋째, 미국 당국은 아이티의 군대가 머지않아 민중 반란으로 타도당할까 봐 두려워했다.

넷째이자 결정적 요인은 아리스티드 자신이 미국의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권좌에 복귀하는 대가로 국제 자본이 아이티 경제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 동의했다. 1993년에 그는 저임금 유지, 국유기업 사유화, 관세와 기타 수입 규제 조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원조는 가장 중요한 국유기업 아홉 개를 사유화하겠다는 아리스티드의 동의와 노골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아리스티드 정부가 추진한 이런 정책들은 당연히 빈곤과 불평등 심화를 초래했다.

이조차도 국제 늑대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2000년 5월 선거에서 아리스티드의 라발라스 가(家) 정당이 미국이 선호하는 후보들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미주기구(OAS)의 지원을 받는 야당들은 부정 선거였다고 비난했고, 정부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아이티인들은 또다시 수백만 달러의 원조 중단이라는 국제적 처벌을 받아야 했다. 몇 달 전에 서반구 최빈국인 아이티는 미국에 대출 연체금 3천만 달러를 갚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이 현재의 위기를 설명해 준다. 아리스티드 자신이 도와 주겠다고 공약한 민중을 옹호하지 못해 인기가 폭락한 아리스티드 정부는 지금 경찰 폭력과 시위 진압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야당 세력을 후원하고 경제의 숨통을 죔으로써 민주주의를 계속 훼손하고 있다. 복수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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