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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들이 보통선거권을 지지하지 않았는가?
〈다함께〉 25호의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의 날”은 3·8 국제여성의 날이 역사적인 기원에서 ‘국제 노동 여성의 날’임을 강조한 인상적인 글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과 보통선거권 관련한 부분에는 이견이 있다.
그 글에는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 제한된 투표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보통선거권 요구는 매우 중요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반대해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들이 투표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을 요구했다.’고 돼 있다. 그 글 옆에 소책자를 읽어보라는 표시가 있었다.
소책자[콜론타이의 《국제여성의 날》]를 읽어보면, 부르주아지들은 여성들의 선거권에도 노동자들의 선거권에도 반대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들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반대했다는 논의는 어디에서 근거를 찾아야 하는지 보충해 주었으면 한다.
린지 저먼은 《성, 계급, 사회주의》 (7장)에서 노동당 내 페미니스트적 경향의 여성들에 대해 선거권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먼은 이들의 페미니스트적 경향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중간계급적 특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나라의 특정한 국면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이고, 이를 ‘많은 페미니스트’라고 적기엔 그 근거가 빈약하고, ‘페미니스트들에 반대해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적기에도 미흡하다.
저먼이 언급하고 있는 여성은 엄밀히 페미니스트들이기보다는 노동운동하는 여성 인물이었고, 성인참정권에 우호적이던 노동당내 남성들도 분명한 사회주의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1791년 프랑스의 여성 올랭쁘 드 구쥬가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에서 통과된 ‘남성 및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남성’을 ‘여성’ 혹은 ‘남성과 여성’으로 의도적으로 고쳐 발표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뒤 여성의 날을 기점으로 점점 전투적인 저항세력으로 여성들이 성장함에 따라, ‘노동여성의 전투성이 발휘되는 여성의 날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의식과 조직을 키우는데 보탬’이 되어 오고 있다는 것도.
페미니스트 관련 구절은 사실을 침소봉대해 3·8 여성의 날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는 데 있어 논리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현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참정권운동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성인의 보통선거권(재산이나 소득 수준, 성, 민족, 인종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선거권) 대신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른 제한된 선거권을 지지했다는 내 지적은 결코 침소봉대가 아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과 러시아 국가는 노동계급 운동과 그 조직을 잔인하게 탄압했고 그래서 선거권 문제는 계급적 쟁점이 됐다. 사회주의 정당은 모든 성인의 보통선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사정이 크게 달랐다. 독일과 러시아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미숙련공과 숙련공, 남녀를 포함하는 산별노조를 건설한 반면, 영국 노동운동은 차티즘 운동의 패배 뒤 19세기 말 보수화됐다. 노동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여성참정권을 거부함에 따라 영국에서는 여성참정권 운동과 성인 참정권 운동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영국에서는 남성에 대한 선거권 부여가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점진적으로 도입됐는데, 당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당시 남성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조건의 여성 참정권. 다른 하나는 모든 성인의 보통선거권. 전자의 입장은 사실상 극소수의 여성만이 선거권을 얻는 것을 뜻했는데, 이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들은 단지 5퍼센트만이 자격이 있었다(토니 클리프, 《여성, 이중의 굴레》, 유월, 176쪽).
영국의 유명한 여성참정권조직인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이 이런 입장이었는데, 이 사실은 린지 저먼의 《성, 계급, 사회주의》에도 나오고 영국 역사가 리처드 에반스도 지적했다. “WSPU는 이미 1906년 경에 노동운동과 결별했고, 재산에 다른 제한선거권을 지지하고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다.”(《페미니스트: 비교사적 시각에서 본 여성운동 1840∼1920》, 창비, 271쪽).
그런데 WSPU를 만든 팽커스트 집안 여자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출신의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인데, WSPU는 1908년에 조직한 시위에 25만∼50만 명이 모였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나는 당시 보통선거권에 반대한 페미니스트들을 “많은 페미니스트”로 언급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위의 책에서는 미국의 많은 페미니스트들도 제한된 선거권을 지지했다고 지적했고, 다른 책을 보면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의 주요 경향이 지독한 인종차별주의를 띠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사라 에번스, 《자유를 위한 탄생 ― 미국 여성의 역사》, 이대출판부).
올랭쁘 드 구쥬는 프랑스 혁명기의 지도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였는데, 혁명 초기에는 열렬한 왕당파로 혁명을 반대했다. 1789년에 왕이 쫓겨나고서야 온건 공화주의자인 지롱드파가 됐는데, 비천한 계급의 여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온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혁명의 급진적 진행에 따라 많은 다른 지롱드파 지도자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됐을 때 노동여성들은 박수를 보냈다.
정진희
두 달 가까이 영웅적인 전면파업을 벌였던 외환카드 노동자들이 쓰라린 패배를 맞아야 했다.
2백19명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당했다. 현재 해고자 일부와 사무금융연맹 간부들이 외환카드 본사 앞에서 농성중이다. 이 쓰라린 패배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외환카드는 새로운 금융 구조조정의 출발점이었다. ‘저승사자’ 이헌재가 정부에 복귀하면서 제2금융권 구조조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정부는 론스타의 불법 직장폐쇄를 눈감아 주었다.
이처럼 지배자들이 단결할 때 한국노총의 외환은행노조는 이 투쟁을 외면했고 민주노총은 기껏 ‘불매운동’을 주장했다.
결정적 갈림길이었던 2월 25일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의 실질적인 연대파업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면파업에도 굴복하지 않은 론스타가 불매운동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오히려 론스타는 카드 결제 거부를 두 번이나 단행해 정부와 시장을 압박했다.
저들이 직장폐쇄로 반격한 만큼 우리도 외환카드 단사의 전면 파업을 넘어서는 강한 투쟁이 필요했다. 투쟁의 열쇠는 상급단체들 특히, 민주노총이 쥐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칼을 휘둘러야 할 시점에서 칼자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문제에 총연맹이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총연맹 역할은] 상층교섭을 적절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층교섭은 잘 되었을까? 3월 4일 이수호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존중하도록 하자”고 답변했다! 2천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어떻게 존중받을 수 있는가.
외환카드 파업 자체가 내재한 약점도 있었다. 외환카드 정규직 조합원은 전 직원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노동자 2천8백여 명 정도가 업무를 계속하면서 파업의 실질적 효과는 줄어들었다.
론스타는 합병시 외환카드에서만 인원감축이 있을 거라며 외환은행노조를 달랬고 외환카드 비정규직들에게는 잔여 계약기간 임금과 6개월치 추가 임금을 주겠다며 회유했다.
정규직 노조는 아쉽게도 비정규 직원들의 고용승계를 함께 요구하며 파업 동참을 끌어내는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김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