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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 단조롭고 따분한 영화
감독인 멜 깁슨 자신은 “그런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라며 시치미떼고 있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영화 장면 중 적잖은 부분이 신약성서에 없고 가톨릭 전통에 근거한 것인데, 깁슨이 채택한 이러한 가톨릭 전통 중 상당 부분은 19세기 초반 독일 수녀 안네 카테리네 에머리히의 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통한 수난》에서 에머리히의 환상은 이렇게 펼쳐진다. “예수의 고통을 보고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냉혹한 유대인들은 그저 혐오로만 가득 차 점점 더 격노할 뿐이었다. 실로 동정심은 그들의 잔인한 가슴 속에서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유대인 영주 헤롯 안티파스는 영화에서 점잔빼는 동성애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신약성서든 역사 기록이든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얘기다. 깁슨은 그의 다른 작품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되던 때 농촌 유대인은 아람어를 사용했으나 도시 유대인과 로마인들은 “코이네”
영화에서 유대인 군중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며 외치는 대사 중에 유대인 인권단체의 격심한 반발을 의식해 영어 자막으로 번역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실제의 본디오 빌라도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이처럼 거꾸로 뒤집어 묘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쾌한 일로, 깁슨의 극우 정치를 반영한다.
물론 문학·예술 작품에서 작가
어불성설
그리고
가톨릭 전통주의는 정치적 극우성과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적의를 포함하고 있는 반동적 사상이다.
가톨릭 전통주의는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 프랑코 치하 스페인에 대한 향수에 젖어 심지어 1960년대 중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황청을 용인하지 않는데, 깁슨은 자기 교구의 성당에 다니기를 거부하고 자기 신조에 맞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스스로 새 성당을 지었을 만큼 열성파이다. “성가족”
가톨릭 전통주의의 정초를 놓은 마르셀 르페브르는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 대주교로 있으면서 히틀러의 프랑스 꼭두각시인 비시 정부에 부역했다. 종전 후 르페브르는 비시 정부의 경찰로서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뽈 뚜비예에게 오랫동안 은신처를 제공했다.
소외
이 영화의 반
외세에 반대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이 항쟁은 새로 권력을 잡은 마카베오 왕조의 부패와 폭정, 그리고 새 정권이 다시 시리아에 의존하며 그리스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카베오서를 자신들의 경전
이 미묘한 입장 차이를 반영하는 책자를 토대로 멜 깁슨이 영화를 만들겠다니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영화의 예수 수난 묘사를 예찬하면서 “2000년 동안 사용된 그 어느 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 수단”이라며 크게 반겼다.
근본주의자들은 전에는 유대인에게 혐오감을 나타냈으나 근래에는 유대인들과 화해하려 애써 왔다. 영화 때문에 둘 사이가 심각하게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유대인 중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지지를 위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충돌하기를 피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깁슨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다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아마 다수는 철저하게 무력한 영화 속 주인공과 일체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계급 사회는 대다수 사람들이 창조적 자기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소외가 종교의 토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물론 신약성서에는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구절들이 꽤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구절들도 꽤 있다. 가령 “내
성서의 이러한 ‘다면성’과 ‘복합성’ 덕분에 이탈리아 좌파 감독 피에르-파올로 파솔리니의
이런 영화라면 멜 깁슨의
최일붕
지난 2000년 이들이 실제로 북으로 ‘송환’되면서 다큐멘터리의 목적도 송환 운동을 돕기 위한 선전물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더욱 입체적인 작품으로 바뀌었다.
조창순 씨와 김영식 씨는 1960년대 초에 같이 북에서 파견되고 잡혔다. 조창순 씨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형을 마친 후 출감한 반면 김영식 씨는 1972년부터 진행된 야만적인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전향서를 작성하고 풀려났다.
배꼽
그러나 전향을 하고 난 삶이 이전보다 낫지는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지킬 것이라고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밖에 없었던 그에게 폭력에 굴복한 이후의 삶이란 더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썩을 놈의 세상”이 흘러나온다. 바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그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우리는 카메라를 따라서 김영식 씨의 방으로 안내된다. 김영식 씨는 그곳에서 고문의 고통과 전향의 회한을 고백한다. 그는 발로 차여서 다 망가진 자신의 정강이를 보이면서 “구두장이들이 구두 끝을 부드럽게 만들었으면 좋겠어”라고 농담을 건넨다.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은 바로 촬영팀에게 먹을 것 하나라도 더 권하려는 웃음 띈 모습으로 바뀐다.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에 상관없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
이 영화는 장기수들을 억지로 천사로 만들지 않는다. 엄청난 식량난과 위기를 겪고 있는 북한의 현실과 납북자 문제를 애써 무시하려는 장기수들의 모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인간적 비극과 정치적 논평이 이 영화를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만들진 않는다. 이 영화에는 장기수들의 비극과 함께 그들이 일상에서 느낀 이런저런 삶의 기쁨들도 같이 묘사돼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남한 국가의 꼴불견을 어떤 코미디보다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반공드라마 자료화면과 김영삼 취임식 연설, 곤경에 처한 조선일보 기자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용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