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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 단조롭고 따분한 영화(원제: The Passion of the Christ; ‘구세주의 수난’이라는 뜻. 이하 〈패션〉)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매우 반동적인 영화다. 영화 곳곳에서 유대인은 혐오스럽고 사악하고 냉혹한 생명체로 그려지고 있다.

감독인 멜 깁슨 자신은 “그런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라며 시치미떼고 있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영화 장면 중 적잖은 부분이 신약성서에 없고 가톨릭 전통에 근거한 것인데, 깁슨이 채택한 이러한 가톨릭 전통 중 상당 부분은 19세기 초반 독일 수녀 안네 카테리네 에머리히의 반(反)유대인적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통한 수난》에서 에머리히의 환상은 이렇게 펼쳐진다. “예수의 고통을 보고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냉혹한 유대인들은 그저 혐오로만 가득 차 점점 더 격노할 뿐이었다. 실로 동정심은 그들의 잔인한 가슴 속에서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유대인 영주 헤롯 안티파스는 영화에서 점잔빼는 동성애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신약성서든 역사 기록이든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얘기다. 깁슨은 그의 다른 작품 〈더 페이스〉와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동성애자 혐오를 드러냈었다.

〈패션〉의 등장 인물들은 아람어나 라틴어로 말하는데 ― 대신에 영어 자막이 나온다 ― 이는 〈패션〉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되던 때 농촌 유대인은 아람어를 사용했으나 도시 유대인과 로마인들은 “코이네”(‘공용’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라틴어는 단지 법조문·행정공문서·의전(儀典)·과학·의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언어였다.

영화에서 유대인 군중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며 외치는 대사 중에 유대인 인권단체의 격심한 반발을 의식해 영어 자막으로 번역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라는 말이다. 1960년대 중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이 성경 구절을 근거로 반유대인 정서를 정당화했다.

〈패션〉의 로마 총독 묘사는 유대인 묘사와 대조적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고귀한 의인(義人)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령 그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가 유혈낭자하게 고문당한 것을 보고 예루살렘 성전 제관들에게 그들이 신문 전에 피의자를 구타하는 게 관행이냐고 묻는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없는 얘기다.

실제의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동시대 유대인 철학자 필로에 따르면 “뇌물 수수, 폭행, 약탈, 악행, 모략, 재판 없이 집행되는 끊임없는 처형, 끝없고 견딜 수 없는 만행들”로 악명 높은 독재자였다. 유대인들에게 하도 못되게 군 나머지 빌라도는 마침내 로마 본국 정부의 문책성 소환을 받았다. 〈패션〉에서처럼 빌라도가 소규모 군중에 겁을 집어먹고, 자기가 임명한 성전 제관들에게 밀려 자기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이처럼 거꾸로 뒤집어 묘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쾌한 일로, 깁슨의 극우 정치를 반영한다.

물론 문학·예술 작품에서 작가(감독)의 이데올로기가 작품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멜 깁슨의 경우 자기가 “신의 소명에 응답해 이 영화를 만들었”고 자기 신앙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 허튼 깁슨은 홀러코스트(나찌의 유대인 대량학살)의 역사적 실재를 부인하는 극우적 인물이다.

어불성설

그리고 〈패션〉의 주인공인 예수 역의 제임스 카비젤도 깁슨 부자와 똑같은 가톨릭 전통주의자이다. 〈하이 크라임〉, 〈몬테 크리스토〉, 〈엔젤 아이즈〉, 〈씬 레드 라인〉 등에 출연한 카비젤은 성모 마리아가 자기 앞에 나타났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 전통주의는 정치적 극우성과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적의를 포함하고 있는 반동적 사상이다.

가톨릭 전통주의는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 프랑코 치하 스페인에 대한 향수에 젖어 심지어 1960년대 중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황청을 용인하지 않는데, 깁슨은 자기 교구의 성당에 다니기를 거부하고 자기 신조에 맞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스스로 새 성당을 지었을 만큼 열성파이다. “성가족”(聖家族)이라는 깁슨의 교파는 지금도 여전히 라틴어로 미사를 본다.

가톨릭 전통주의의 정초를 놓은 마르셀 르페브르는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 대주교로 있으면서 히틀러의 프랑스 꼭두각시인 비시 정부에 부역했다. 종전 후 르페브르는 비시 정부의 경찰로서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뽈 뚜비예에게 오랫동안 은신처를 제공했다.

소외

이 영화의 반(反)유대인 정서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무마한답시고 깁슨은 자기가 다음에 만들 영화는 기원전 2세기 중엽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맞서 일어난 유대인 독립 전쟁에 대한 것으로, 이 얘기를 담은 마카베오서(書)는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다.

외세에 반대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이 항쟁은 새로 권력을 잡은 마카베오 왕조의 부패와 폭정, 그리고 새 정권이 다시 시리아에 의존하며 그리스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카베오서를 자신들의 경전(흔히 “히브리 성서”로 일컬어진다)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은 “제2경전”의 자격으로 이 책자를 경전에 포함시켰다.

이 미묘한 입장 차이를 반영하는 책자를 토대로 멜 깁슨이 영화를 만들겠다니(그것도 “서부영화식”으로!) 유대인 인권단체들의 반응이 “고맙지만 사양한다”는 것이었던 건 당연했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영화의 예수 수난 묘사를 예찬하면서 “2000년 동안 사용된 그 어느 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 수단”이라며 크게 반겼다.

근본주의자들은 전에는 유대인에게 혐오감을 나타냈으나 근래에는 유대인들과 화해하려 애써 왔다. 영화 때문에 둘 사이가 심각하게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유대인 중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지지를 위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충돌하기를 피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깁슨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다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아마 다수는 철저하게 무력한 영화 속 주인공과 일체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계급 사회는 대다수 사람들이 창조적 자기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소외가 종교의 토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물론 신약성서에는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구절들이 꽤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구절들도 꽤 있다. 가령 “내[예수]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성서의 이러한 ‘다면성’과 ‘복합성’ 덕분에 이탈리아 좌파 감독 피에르-파올로 파솔리니의 〈성 마태오 복음서〉(1964년) 같은 영화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비록 1960년대 초 이탈리아공산당의 대(對) 교황청 관계 개선이라는 기회주의적 동기가 제작 배경을 이루고 있으나,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이들은 고리대금업자였다)을 추방하는 얘기, 예수가 제자들에게 천국 입장을 허가받으려면 재산을 모두 빈민 구제를 위해 헌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얘기,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정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얘기, 가난한 사람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연민 얘기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영화라면 멜 깁슨의 〈패션〉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의 아편”(원인 치료는 못 해도 진통제 효과는 내는), “심장 없는[냉혹한] 세계의 심장[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최일붕

삶으로 ‘송환’된 다큐멘터리

〈송환〉은 놀라운 다큐멘터리이다. 만든 이들의 관점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토록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 있고 감정적으로 풍부한 영화는 보기 드물다.

〈송환〉은 만든 이들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작 기간만 12년이 걸렸고, 김동원 감독은 대부분 남파 간첩인 비전향 장기수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 2000년 이들이 실제로 북으로 ‘송환’되면서 다큐멘터리의 목적도 송환 운동을 돕기 위한 선전물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더욱 입체적인 작품으로 바뀌었다.

〈송환〉에는 수십 명의 장기수들이 출현하지만 조창순 씨와 김영식 씨 두 명의 삶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창순 씨와 김영식 씨는 1960년대 초에 같이 북에서 파견되고 잡혔다. 조창순 씨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형을 마친 후 출감한 반면 김영식 씨는 1972년부터 진행된 야만적인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전향서를 작성하고 풀려났다.

배꼽

그러나 전향을 하고 난 삶이 이전보다 낫지는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지킬 것이라고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밖에 없었던 그에게 폭력에 굴복한 이후의 삶이란 더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썩을 놈의 세상”이 흘러나온다. 바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그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송환〉의 장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카메라를 따라서 김영식 씨의 방으로 안내된다. 김영식 씨는 그곳에서 고문의 고통과 전향의 회한을 고백한다. 그는 발로 차여서 다 망가진 자신의 정강이를 보이면서 “구두장이들이 구두 끝을 부드럽게 만들었으면 좋겠어”라고 농담을 건넨다.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은 바로 촬영팀에게 먹을 것 하나라도 더 권하려는 웃음 띈 모습으로 바뀐다.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에 상관없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

〈송환〉은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장기수들의 삶의 면면을 드러낸다. 특히 세계 최장기수인 김선명 씨가 아흔이넘은 노모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장기수들을 억지로 천사로 만들지 않는다. 엄청난 식량난과 위기를 겪고 있는 북한의 현실과 납북자 문제를 애써 무시하려는 장기수들의 모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인간적 비극과 정치적 논평이 이 영화를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만들진 않는다. 이 영화에는 장기수들의 비극과 함께 그들이 일상에서 느낀 이런저런 삶의 기쁨들도 같이 묘사돼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남한 국가의 꼴불견을 어떤 코미디보다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반공드라마 자료화면과 김영삼 취임식 연설, 곤경에 처한 조선일보 기자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용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