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매서운 겨울, 한 송이 눈처럼 흩어지는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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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반조’는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이다. 초는 그 빛을 다하기 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킨다. 정리해고와 노조탄압에 고통받던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비정규직의 차별에 시달리던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이운남, 청년활동가 최경남, 노조 탄압의 중압감에 시달리던 외대노조 위원장 이호일, 이호일 지부장의 빈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외대지부 수석부위원장 이기연. 이들은 모두 박근혜 당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 버틸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다.
지난 5년간 무참히 짓밟힌 노동자들의 권리, 노조 탄압,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차별. 이에 맞서 목숨을 걸고 철탑과 크레인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지만 노동자들이 삶의 동아줄을 놓지 않았던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차별 없는 세상, 정리해고 없는 세상, 즉 인간의 자의식의 외화라는 아름다운 노동의 권리를 주체적으로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박근혜 당선이라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 힘겹게 잡고 있던 삶의 동아줄을 내려 놓아야만 했다.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남은 것은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뿐이었다.
연이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보며 자괴감에 빠져 있다, 문득 회광반조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들은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바쳐 마지막 불꽃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엥겔스는 “선거는 노동계급의 온도계와 같은 것이다” 하고 말했다. 대선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의 온도는 몇 도일까? 물이 100도가 되어야만 끓듯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우리의 온도가 아직 덜 뜨거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온도가 끓는점에 다다르도록 불꽃을 피우고, 바람을 막고, 기름을 부어야 한다. 지금 울산의 송전탑 위에서, 대한문 앞에서, 강정마을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로 작은 불씨를 지켜가야 한다.
뜨거워진 온도계의 끝에는 자본가들과 부르주아 권력이 무너지고 노동자들과 민중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다섯 분의 노동자도 꺼져 가는 불 앞에서 마지막 불꽃을 일으켜 온도를 높이고 있다. 회광반조다. 그 어느 것보다도 절박하고 눈물겨운 회광반조다.
다섯 분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연대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해서라거나,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보다 다수여서라기보다도, 바로 자본주의가 아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간절함, 인간이 노동의 주체가 되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