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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레닌을 왜곡하기 워너 본펠드·쎄르지오 띠쉴러 외 지음, 《무엇을 할 것인가?》, 갈무리

이 책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지 100년이 되는 2002년에 출간됐다. 한국어판은 레닌이 죽은 지 80년이 되는 2004년 1월에 출간됐다.

이 책의 목적은 레닌주의를 반자본주의 운동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본펠드와 띠쉴러는 “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30쪽)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필자들은 최소한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은 채 레닌의 정치 이론과 실천, 볼셰비즘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난도질한다.

사이먼 클락은 레닌이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였다고 가정한다. 레닌은 “결코 러시아 인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인 전통과 단절하지 않았[다.]”(102쪽)

레닌을 인민주의자로 몰아붙이려면 클락은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와 인민주의(나로디즘)를 날카롭게 구분짓는 핵심 쟁점들을 추려내 다뤘어야 했다.

세 가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첫째,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비켜가 농촌 공동체(미르)에 바탕을 두고 사회주의로 직접 도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둘째, 테러를 투쟁 방식으로 채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 셋째, 혁명을 이끌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인가 아니면 농민인가 하는 문제.

클락은 첫째 쟁점은 암시할 뿐이고, 셋째 쟁점은 무성의하게 다룬다. 그리고 둘째 쟁점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둘째와 셋째 쟁점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가장 시급한 문제이자 마르크스주의와 인민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가른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레닌이 매우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던 쟁점이기도 했다.

클락은 볼셰비즘과 노동계급의 관계를 폄훼하거나 무시한다. 그는 19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135쪽)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지식인들의 전문 분야로 남아 있었고, 따라서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135쪽)고 말한다.

이것은 19세기 말 러시아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노동자 운동이 소규모였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877∼1879년에 26건의 파업이 있었다. 이 투쟁의 결과 북부러시아노동조합이 건설됐다. 그 운동은 1880년대에 쇠퇴했다가 1890년대에 다시 회복됐다. 레닌이 이끌었던 페체르부르크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의 성원들이 지도적 구실을 한 1896년 직물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은 그 운동의 절정이었다.

1903∼1917년의 상황은 클락의 진술과 완전히 다르다. 1905년에 거대한 대중 파업들과 미수에 그친 봉기가 일어났다. 1907∼1911년에 극심한 반동기를 겪은 뒤 1912∼1914년에 다시 파업 물결이 일었다.

거대한 노동자 투쟁 물결 속에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과 유기적 연관을 맺었다. 예를 들어, 1912년 제4대 두마 선거에서 6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이 선출됐다. 그들은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선거구에는 1백14만 4천 명의 산업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일간지였던 〈프라우다〉는 1912년에 6백20개의 노동자 모임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았다. 1914년 5월 경에는 2천8백73개로 증가했다.

레닌의 당 이론

본펠드와 띠쉴러는 “혁명의 조직 형식으로서의 혁명정당이라는 이념은 포기되어야 한다. 정당이라는 형태는 혁명의 내용, 즉 인간해방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혁명적 주체는 자본과 그 국가와의 끊임없는 갈등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지 “당에 의해 선포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8쪽)

두 사람은 한 무리의 이데올로그들이 모여 당을 만들고 매우 비민주적인 수단을 사용해 자신들의 의지를 노동계급에게 강요하는 틀에 박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레닌의 당 이론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레닌에게 당의 필요성은 노동계급 투쟁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했다.

레닌은 체제에 맞선 투쟁이 본질적으로 불균등하다는 점을 주목했다. 서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상을 갖고 체제에 저항한다. 노동계급의 불균등한 의식 때문이다.

헝가리 태생의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그 루카치가 잘 지적했듯이, “공산당의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의식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이 경우에는 공산당과 계급의 조직상의 분리는, 공산당이 계급 자체를 대리해서 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하고자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G 루카치, 《역사와 계급 의식》, 거름, 500쪽)

계급 투쟁에는 시기와 투쟁 형태의 불연속성, 노동계급 내 상이한 부문들 간의 불연속성, 노동계급과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나머지 사회집단들 사이의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노동계급 투쟁의 기본 현실과 관련 맺을 수 있는 조직을 어떻게 노동계급 속에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조직된 소수라는 사상은 소수가 노동계급의 나머지와 단절되거나 소수의 의지를 노동계급의 다수에게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투쟁 속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운동 내에서 다수의 의지를 얻으려 한다는 뜻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비유했다. 전투의 압력을 받는 병사들은 한층 발전한 군사 전술을 개발한다. 훌륭한 지휘관의 임무는 자신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아니라 전투의 한복판에서 병사들이 고안해 낸 최상의 전술을 받아들여 이를 군대 전체로 보편화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

카요 브렌델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임금노동의 폐지가 지평에 오르지조차 않“(52쪽)았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지 없이, 더구나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수행되어야만 했다.”(50쪽)

그러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이미 정착하고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에서 이 점을 이론적·경험적으로 증명했다.

트로츠키도 혁명 전에 비록 러시아 농민의 토지 경작은 전반적으로 17세기 수준에 머물렀지만, 공업은 자본주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거나 심지어 앞지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거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17.8퍼센트를, 러시아의 경우 41.4퍼센트를 차지했다!”(레온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상》, 풀무질, 32쪽.)

트로츠키는 바로 이런 불균등·결합 발전이 “짜르 체제의 집중적인 억압과 함께 러시아 노동자들을 혁명 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에 쉽게 동화되도록 만든 요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조정환 씨는 역자 서문에서 러시아혁명은 “‘자본’에 반한 혁명”이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역설적 표현을 인용해 브렌델의 주장을 옹호한다(17쪽). 그러나 그람시는 같은 글에서 “볼셰비키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행한 언급들을 폐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저작의 정수라 할 더 깊은 메시지를 폐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민중이 영국의 역사가 그대로 러시아에서 반복되기를, 부르주아지가 형성되고 계급투쟁이 작동되기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지금 시기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정당성을 갖는다.”(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갈무리, 101∼102쪽.)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혁명도 있는가. 그렇기는커녕 짜르 타도, 8시간 노동제, 토지 개혁 같은 부르주아 과제조차 노동계급 혁명으로만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또, 노동자 국가(소비에트)가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보다 비할 데 없이 더 민주적임을 보여 줬다. 소비에트 대표는 선출됐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노동자 대중 집회에 나와 설명해야 했다.(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보시오.)

브렌델은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이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었다고 주장한다. “크론슈타트는 혁명의 진자 운동이 왼쪽으로 가장 멀리 흔들렸던 혁명적 순간이었다.”(56쪽)

그러나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은 노동자 국가를 심각하게 위협한 반혁명적 농민 반란이었다.

1917년 7월,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요새를 “혁명의 자부심이자 명예”라고 말했다. 1917년의 수병들은 페체르부르크 지역의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1921년의 크론슈타트는 더는 1917년의 크론슈타트가 아니었다. 1917년 혁명에 참가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그 뒤 내전에서 가장 위험한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수병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21년의 크론슈타트 수병은 4분의 3이 농민이었다.

1921년의 수병들은 내전과 제국주의 군대의 개입이 낳은 혼란과 파괴의 결과를 부인했고, 그 모든 책임을 볼셰비키 정부에 떠넘겼다. 공공연하게 유대인 혐오를 선동했다. 가장 끔찍한 반유대주의 비난이 유대인인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에게 퍼부어졌다.

또, 그들은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했다. 사회혁명당과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인 카데츠가 이런 요구에 호응했다.

아나키스트 출신 공산주의자 빅토르 세르쥬는 처음에 크론슈타트 수병의 요구에 공감했지만, “볼셰비키 독재가 실패할 경우 … 또 다른 독재가 나타날 것이다. 그 독재는 반프롤레타리아적일 것”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반란 진압을 지지했다.

브렌델은 “크론슈타트 반란은 레온 뜨로쯔끼에 의해 진압되었다.”(60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를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한 독일사회민주당의 구스타프 노스케에 비유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에 있었다. 그는 그 곳에 있다가 제10차 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곧장 모스크바로 갔다. 당대회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해 지노비에프와 논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이 책의 필자들은 레닌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너무 많이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레닌주의를 제대로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마르셀 리브만의 《레닌주의 연구》(미래사)와 토니 클리프가 쓴 《당 건설을 향하여》(북막스)를 추천한다.

김인식

영화평

판타스틱 플래닛

만화 영화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딱히 〈판타스틱 플래닛〉을 볼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스틱 플래닛〉은 TV 만화 시리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점을 가졌다.

거인족인 트라그들은 소인족인 “옴”(프랑스어로 “사람”)을 “테라”(지구)에서 사냥해 왔다. 트라그들은 옴들이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트라그들은 옴을 애완동물로 사육하지만, 일부 트라그들은 옴을 벌레로 여긴다.(발로 밟아 죽이기도 한다!)

트라그 통치자들은 “야생” 옴들이 조직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끼고 무시무시한 소탕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옴들은 “애완용 옴”이었던 테어가 가져 온 트라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트라그들에 맞서기 시작한다.

〈판타스틱 플래닛〉의 줄거리 자체는 위대한 활극물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이 만화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억압자는 피억압자를 영원히 무지와 수동성에 가둬둘 수 없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체코 출신의 공상과학 소설가 스테판 울의 단편 소설에 기초해 있다. 원작 소설에는 1968년에 소련이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탱크와 군대를 투입했던 충격이 담겨있다. 또, 만화가 제작되던 1970년대 초반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알제리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의 민족 해방 운동이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던 때였다.

〈판타스틱 플래닛〉에는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선 위대한 투쟁들에서 받은 영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라크 민중이 미국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는 지금,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는 관객들은 이 만화 영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옴들은 판타스틱 플래닛에 감춰져 있던 트라그들의 비밀을 알아내서 “종족 해방”을 이룬다. 아쉽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트라그들은 여전히 옴을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지만 옴들의 투쟁 정신에 쓴 맛을 본 트라그들은 더는 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만화 속의 옴들처럼 피억압자들은 언제든 싸우기 마련이다. 이라크 민중의 거대한 저항 앞에서 부시도 트라그처럼 쓴 맛을 보고 있다. 남은 것은 이라크 민중의 해방이다.

김용욱